●──── 신약강론/로마서

제72강 로마서 14:13-18 하나님의 나라는

불편한 진리 2022. 4. 10. 1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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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일흔두 번째 강론

로마서 14:13-18

하나님의 나라는

 

마태복음 16:18에 보면 예수님께서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내 교회”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 세우신 “내 언약”에 근거한 말씀이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로 완성하셨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세우신 교회는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는 그리스도의 몸 자체이다.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한다는 것은 죽음의 세상과는 다른 차원의 세계라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교회의 원형은 하나님의 나라이고 그 모습이 제대로 드러날 때만 교회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들은 많은 교인 수, 생동감 있는 예배, 목사의 신실함, 개혁적인 모습, 교회 체제의 견실함, 재정의 투명성, 선교의 실적 등 외형적이고 눈에 보이는 것으로 교회 됨의 의미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교회 됨의 의미는 그런 것이 아니다. 오늘 본문 17절을 보면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7절)라고 인간 세상에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에 대해 먼저 부정하고 있다. 모일 때마다 성찬을 가졌던 당시 초대교회 상황에서 비추어볼 때 비록 그것이 성찬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율법으로 규정된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란 언약의 말씀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면 여기서 말씀하는 하나님 나라가 무엇인가? 그것은 9절에서 “이를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셨으니 곧 죽은 자와 산 자의 주가 되려 하심이라”라고 이미 선언한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죽은 자와 산 자의 주인으로 다스리심,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심으로 자기 백성들을 부르셔서 주의 것으로 삼으신 상태가 하나님 나라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의와 평강과 희락’이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라고 하였다. ‘의, 평강, 기쁨’이란 세상의 것이 아니기에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령 안에 있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서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 기쁨이 하나님 나라이다. 바울 사도는 지금 하나님 나라에 대해 정의를 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사람들이 복음을 몇 가지 규칙들로 규정하고 착각하고 있는 점 때문에 그런 것에 관심 빼앗기지 말고 본질적인 것, 즉 하나님 나라에 관심을 가지라는 뜻에서 이 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 아니 믿게 되었다는 것은 주님의 소유가 되었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사랑을 받은 것이고 그 사랑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되었다. 그렇다면 법이란 이런 사랑 앞에서는 무용지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음식을 구분하여 자기 기준에서 먹고 안 먹고를 주장한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들도 말은 율법이 완성되었다고 하지만 실제는 온갖 교회 내의 법을 가지고 판단하고 있다.

서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 나라를 보여주는 교회라면 성령 안에서 ‘의, 평강, 기쁨’을 보여주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아니면 우리는 의와 평강, 기쁨은 누릴 수 없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의와 평화, 기쁨’이란 내가 예수를 믿어서 자기 의를 드러내는 것, 마음에 평화가 있고 그래서 마음이 늘 기쁜 상태에 있다는 것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사는 상태 그 자체를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슬픈데도 일부러 기뻐하고, 마음이 힘들고 복잡한데도 평강을 누리고 있는 것처럼 나타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날마다 죽음에 넘겨짐을 확인하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 나라의 ‘의와 평화, 기쁨’이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비판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칠 것이나 거칠 것을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하도록 주의하라”(13절)라고 하였는데 “비판하지 말고”라는 말과 “주의하라”라는 말이 헬라어로는 같은 단어 ‘크리노’(판단, 심판)이다. “부딪칠 것”(헬, 프로스콤마)이란 ‘걸림돌’이고 “거칠 것”(헬, 스칸달론)이란 ‘실족, 함정’의 뜻이다. 이 구절을 직역하면 ‘그런즉 다시는 서로를 위해 판단하지 말고 형제 앞에 걸림돌이나 함정을 놓지 않는지 판단하라’라는 말이다. 단순히 주의하라는 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자라면 먼저 자신을 판단하는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게 하는 이유를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노니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14절)라고 밝히고 있다. 근본적으로 성령에 의해 주님의 사람으로 바뀌어 있지 않다면 속된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을 구분해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 근거해 있다.

 

1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도 이렇게 깨달음이 없느냐 무엇이든지 밖에서 들어가는 것이 능히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함을 알지 못하느냐 19 이는 마음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배로 들어가 뒤로 나감이라 이러므로 모든 음식물을 깨끗하다 하시니라 20 또 이르시되 사람에게서 나오는 그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21 속에서 곧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 곧 음란과 도둑질과 살인과 22 간음과 탐욕과 악독과 속임과 음탕과 질투와 비방과 교만과 우매함이니 23 이 모든 악한 것이 다 속에서 나와서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막 7:18-23)

 

속되고 속되지 않는 것의 기준은 음식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먹는 것과 먹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사람의 마음에 있다. 예수님은 그것이 죄라고 지적하신 것이다. 먹어야 하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를 문제 삼는 것은 결국 자신의 행동으로 상대의 구원을 책임지겠다는 발상이다. 따라서 형제라고 하면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으로 구분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무시하는 것이 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전서와 디도서에서도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3 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4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5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딤전 4:3-5)

 

15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 16 그들이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딛 1:15-16)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실 때 그 영을 넘겨주셨는데 이렇게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신 이유는 율법 안에서의 만남이 아니라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신 것에 근거하여 성령 안에서 죄인들과 만나시겠다는 뜻이다. 따라서 성도가 어떤 음식을 먹고 안 먹고, 어떤 날을 지키고 안 지키고 하는 문제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거나 할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근원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그 이유를 “(왜냐하면) 만일 음식으로 말미암아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하지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음식으로 망하게 하지 말라”(15절)라고 밝힌다. 음식으로 말미암아 형제를 근심하게 만들면 그 형제를 망하게 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헛된 것으로 돌리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뜻이다.

우리는 종교적 행위를 하면 할수록 남을 판단하고 싶어하는 죄성을 가진 존재이다. 예컨대 자신이 기도하면 기도할수록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만 보이고, 성경을 많이 읽고 Q.T를 열심히 하면 할수록 말씀을 등한시하는 사람들만 보이고, 교회에 많은 봉사를 하면 할수록 봉사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을 믿음이 없는 사람으로 여긴다. 그런 종교적 행위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독하는 것이 된다.

이제 바울 사도는 결론적으로 음식과 날에 대한 문제로 무엇을 판단할 것인가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라면 당연히 관심가지고 집중해야 본질이 무엇인가를 밝힌다.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16절). “선한 것”이란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늘에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신 십자가만 선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가 예수를 믿었으니까 그 후로는 자신의 행위가 선하다고 착각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이 말씀을 하는 것은 우리가 선하다고 생각해서 하는 행위들이 도리어 사람들에게 비방거리가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는 의미로 말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17-18절)라고 선언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음식을 먹는 문제에 있어서 어떤 사람은 깨끗한 것이니까 마음대로 먹어도 된다고 여기지만 또 어떤 사람들은 구별하면서 먹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무엇이 선한 것인가? 각자의 입장에서 선이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주장하는 선은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상충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선의 기준이 “하나님 나라”라고 선언하였다.

우리 성경에 “이로써”라고 하였는데 직역을 하면 ‘이것들’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이것들이 무엇인가? 문맥상 “의와 평강과 희락”이다.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라고 우리 성경에 번역하였는데 알기 쉽게 표현하자면 ‘그리스도께 속한 자’라는 말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며”라는 말은 12:1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려진’ 것을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써 자신을 제물로 드리신 것에 근거하여 한몸된 것자체가 이미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상태가 된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어떤 종교적 행위로 새삼스럽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즉 그리스도께 속한 것 자체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다.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라고 하였는데 이것이 가능한 것인가? 갈라디아서 1장에 보면 “9 우리가 전에 말하였거니와 내가 지금 다시 말하노니 만일 누구든지 너희가 받은 것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10 이제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 사람들에게 기쁨을 구하랴 내가 지금까지 사람들의 기쁨을 구하였다면 그리스도의 종이 아니니라”(갈 1:9-10)라고 말씀한다. 즉 복음은 사람들을 좋게 하고 기쁨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 것이 될 수 있는가?

“칭찬을 받느니라”라는 말은 헬라어로 ‘도키모스’인데 ‘시험받은, 인정된’이라는 뜻인데 야고보서 1:12에서는 같은 단어를 “시련을 견디어 낸 자”라고 번역하였다. 즉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는다는 의미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사람들에게서 시련을 받아 주의 것으로 인정되어진 상태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하나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라 의와 평강과 희락인데, 그리스도께 속한 자는 사람들에게서 시련을 받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의와 평강과 희락으로 성령 안에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몸된 자들이 하나님 나라이고 하나님의 기쁨 안에 있는 자들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몸된 교회요 성도는 늘 자신의 죄를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 안에서 발견하고 애통하면서 십자가를 바라보게 되어 있다. 먼저 자신을 하나님의 심판대에 세우는 자가 성도이다. 성도는 십자가 앞에서 할 말이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서로 다툴 때 흔히 입장을 바꿔 놓고 생각해 보라는 말을 한다. 그러나 보통은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기보다 자기 입장이 되어 생각해 보라는 것으로 이 말을 더 많이 사용한다. 인간은 모든 일을 자기 중심에서만 생각하는 죄성으로 똘똘 뭉쳐져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나’라는 자기 세계 안에 갇혀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런 나에게 십자가로 찾아오셔서 나의 세계와는 다른 하나님 나라가 존재함을 나타내셨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한 몸이 되었다는 것은 자기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의와 평강, 기쁨 안에 생명으로 살게 되었음을 확인하는 것이다. 우리가 주성교회로 모인다는 것은 이런 하나님의 나라가 드러나는 공동체여야 한다(20220410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롬72.1413-18 하나님의 나라는(20220410).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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