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54강 로마서 10:16-21 믿음과 들음과 말씀

불편한 진리 2021. 11. 28.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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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서 쉰네 번째 강론

로마서 10:16-21

믿음과 들음과 말씀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는 완전히 차단되어 있다. 인간의 자기 의는 철저히 하나님의 의를 거부한다. 자기 사랑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땅에서 인간들의 어설픈 사랑으로 하나님을 찾아 나간다는 것은 애초부터 거부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신 것에 기인한다. 하나님의 의가 믿음으로 나타났는데 그 믿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것은 오직 이 땅에 십자가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먼저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 이사야가 이르되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하였으니”(16절)라고 선언한다. “그러나”라는 접속사를 통해 어떤 누구도 믿음이 없었다고 단언한다. 하나님의 복음이 선포되었지만 인간은 그 복음에 순종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 사도의 새삼스러운 선언이 아니라 이미 구약에서 이사야 선지자가 선포했었다.

 

1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냐 여호와의 팔이 누구에게 나타났느냐 2 그는 주 앞에서 자라나기를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 같아서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가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3 그는 멸시를 받아 사람들에게 버림 받았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이 그에게서 얼굴을 가리는 것 같이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1-3)

 

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면 구원을 받지만 믿지 않으면 주의 이름을 부를 수 없고, 부른다는 것 또한 들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인데 듣는 것 또한 전파하는 자가 없다면 불가능한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는 것을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15절)라는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밝힌다. 좋은 소식, 즉 복음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이 땅에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발, 그 발로 사탄의 머리를 밟으시고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신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복음을 선포하셨기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7절)라고 하였다.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고 하니까 우리는 너무 쉽게 문자적으로 이해하여 믿음이 없다면 무조건 교회 와서 목사님의 말씀, 설교를 열심히 들어야 한다고 적용한다. 목사의 설교가 다 하나님의 말씀인가? 또한 예배당에 나와서 설교를 많이 들으면 믿음이 생기는가? 성경은 결코 그렇게 말씀하지 않는다. “들음”이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코에’인데 ‘아쿠오’(듣다, 들어서 깨닫다)라는 동사에서 온 말이다. 이 말은 70인역에서 히브리어 ‘샤마’의 역어로 쓰인 단어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약의 근거를 살펴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하나님께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5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6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출 19:5-6)

 

하나님께서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여기서 “듣고”라는 말이 히브리어로 ‘샤마’이고 “지키면”이라는 말이 ‘샤마르’이다. 이 말의 명령형이 ‘쉐마’인데 ‘쉐마 이스라엘’(들으라 이스라엘!)을 신명기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4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 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6 오늘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말씀을 너는 마음에 새기고 7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을 갈 때에든지 누워 있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 8 너는 또 그것을 네 손목에 매어 기호를 삼으며 네 미간에 붙여 표로 삼고 9 또 네 집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할지니라(신 6:4-9)

 

“이스라엘아 들으라!”라고 하시고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는데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가? 죄인이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그것을 말씀해 주시는 것이 6절 이하의 말씀인데 이 언약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라는 것이다. 마음에 새기기 위하여 자녀들에게 부지런히 가르치고, 말씀을 강론하고, 손목에 매고, 미간에 붙이며, 문설주와 바깥 문에 기록하라는 것이었다. 즉 주된 본질은 마음에 새기는 것이지 가르치고 기록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가르치고 기록하는 것은 마음에 새기기 위한 방법에 불과하다.

결국 언약의 말씀을 잘 듣는 것이 지키는 것이고 지킨다는 것은 행위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품고 새긴다는 의미이다. 실제 제사장 나라가 되고 거룩한 백성이 되는 일은 이스라엘이 행위로 잘 만들어 낸다는 뜻이 아니라 언약의 말씀을 마음에 담고 새기는 것으로 되는 것이다(사실 이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건져내셨기에 이미 이루어진 것이나 다름 없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어 ‘샤마’는 ‘듣다, 순종하다’라는 뜻을 가진다. 그런데 마음에 새기는 것조차도 하나님께서 성령을 보내셔서 성취하실 것이라고 예레미야 31:31-34, 에스겔 36:26-28에서 예언하고 있고 그것의 온전한 성취가 새 언약, 즉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으심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순종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 없다.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온전히 순종하신 것이 “들음”이다. 그러기 때문에 들음은 오직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이미 8절에서 “믿음의 말씀”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결국 무엇이 우리에게 믿음이 생기게 하고 무엇 때문에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된다는 것인가?

한 마디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 오셔야 된다는 의미이다. 복음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성되어 구약에서 약속하신 모든 것들이 다 성취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이 왜 믿지 않는가? 18절에서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냐 그렇지 아니하니 그 소리가 온 땅에 퍼졌고 그 말씀이 땅 끝까지 이르렀도다 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한다. 시편 19:4을 인용한 말씀인데 시편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다윗의 시, 인도자를 따라 부르는 노래] 1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의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2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하니 3 언어도 없고 말씀도 없으며 들리는 소리도 없으나 4 그의 소리가 온 땅에 통하고 그의 말씀이 세상 끝까지 이르도다 하나님이 해를 위하여 하늘에 장막을 베푸셨도다(시 19:1-4)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은 말씀이 세상 끝까지 선포되는 것인데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온전히 성취되어 땅 끝까지 증거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세 가지 언어(참고 요 19:20)로 예수 그리스도가 왕이시라는 사실이 세상 끝까지 선포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이 십자가로 온전히 다 드러난 이 상태를 종말이라고 한다.

유대인들이 듣지 못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수없이 선포하셨고 약속으로 주신 것이었기에 이스라엘은 다 들었다. 그러나 듣는다고 해서 다 들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구약을 더 인용하여 “그러나 내가 말하노니 이스라엘이 알지 못하였느냐 먼저 모세가 이르되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 하였고”(19절)라고 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이 아닌 것으로 내 질투를 일으키며 허무한 것으로 내 진노를 일으켰으니 나도 백성이 아닌 자로 그들에게 시기가 나게 하며 어리석은 민족으로 그들의 분노를 일으키리로다(신 32:21)

 

신명기 32장은 모세의 노래인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기름지고 아름다운 것으로 풍성하게 은혜를 베푸셨지만 “15 그런데 여수룬이 기름지매 발로 찼도다 네가 살찌고 비대하고 윤택하매 자기를 지으신 하나님을 버리고 자기를 구원하신 반석을 업신여겼도다 16 그들이 다른 신으로 그의 질투를 일으키며 가증한 것으로 그의 진노를 격발하였도다”(신 32:15-16)라고 하시며 이방인들로 하여금 분노를 유발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실상이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또 이사야서를 인용하여 “이사야는 매우 담대하여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말하였고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하였느니라”(20-21절)라고 말씀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1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2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3 곧 동산에서 제사하며 벽돌 위에서 분향하여 내 앞에서 항상 내 노를 일으키는 백성이라(사 65:1-3)

 

신명기와 이사야서를 인용함으로 모세는 구약 율법서, 이사야는 선지서를 대표해서 나타내고 있다는 뜻이다. 즉 구약 성경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원하고 요구하며 노력했기 때문에 주신 것이 아니라 찾지도 않았고 하나님께 묻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거부하고 언약을 무시한 이스라엘에게 하나님께서 약속을 은혜로 계시하셨었다. 그런데도 막상 언약의 말씀이신 예수님께서 오시자 거부하였고 마침내는 십자가에 죽였다.

하나님을 거부하는 세상의 모습은 유대인 모두가 선하게 생각하고 천국에는 확실한 자리가 예비되어 있으리라고 여긴 유대종교 지도자들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철저히 실패했다. 약속을 받았다는 것, 제사 제도를 가지고 있고, 성전이 있다는 것으로 안심할 문제가 아니었다. 도리어 그런 것들을 유지시키려는 것 때문에 제사의 본질적 제물이 되시고 온전한 대제사장 되시며 완전한 성전이신 예수님을 죽이고 말았다.

히브리어 헬라어를 공부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아니며, 성경을 수십 수백 독하였으며, Q.T를 얼마나 꼬박꼬박하였는가를 주께서 물으시는 것이 아니다.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오랜 시간했고, 전도를 몇 사람 하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주일성수나 십일조를 얼마나 잘했는가? 목사, 장로, 권사, 집사라는 직분이 구원을 이루어주는 것이 아니다. 죽을 때까지 행하는 종교 행위가 우리를 구원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말인가? 구원은 우리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자신을 나타내시고 말씀을 은혜로 베푸실 때에 가능하다. 이런 점에서 기록된 말씀으로 주신 성경이란 아무나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니 누구나 읽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씀을 가지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는 없다. 그리스도의 말씀으로만 믿음이 된다. 내가 이루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 이루신다. 그 말씀에 붙잡혀 십자가라는 현장에서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으며 믿음 없음의 죄가 날마다 폭로되는 것이 감사와 찬양이 되는 자가 성도이다(2021112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롬54.1016-21 믿음과 들음과 말씀(20211028).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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