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쉰여섯 번째 강론
로마서 11:7-12
이스라엘의 실패
로마서 11장을 근거로 이스라엘이 실패했기 때문에 그 구원을 하나님께서 임시방편으로 지금 교회에 주셨다고 흔히들 주장한다. 이방인에게 주신 것으로 시기 나게 해서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도록 하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구상에 있는 이스라엘이 예루살렘을 회복하여 다시 그곳에 성전을 세우고 민족적인 회개가 있으면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진다는 식이다.
그러나 그것은 유대인들이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살해한 그 해석과 같은 차원의 것이다. 유대인의 성경해석 연장선 위에 있는 것이 세대주의자들이다. 예수께서 요한복음 4장에서도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아 장소적이거나 시간적인 예배는 더 이상 의미가 없다는 것을 말씀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성전이 어떤 장소에 서게 되는 것으로 종말을 가늠하고 지상의 이스라엘이 회개할 것을 기대한다는 것은 세상의 현상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한 것에 불과하다.
하나님의 구원은 결단코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이고 혈통적인 테두리 안에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구원을 얻는다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아도 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구원받을 사람을 이스라엘 사람으로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선택하신 것은 결코 이스라엘을 구원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민족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이 아브라함 언약 안에 이미 드러나 있다(창 12:1-3). 한 마디로 언약의 한 인물을 통해 구원을 이루는 은혜를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11:5에서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라는 말씀은 남은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이루어지는 구원으로 우리의 행위가 완전히 배제된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서 은혜란 하나님의 행위이지 우리의 행위가 아니다. 그래서 7절에서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라고 말씀한다. 여기서 “남은 자”(헬, 로이포이)란 5절에서 말한 “남은 자”(헬, 레임마)와 다른 존재로 ‘다른 사람’(다른 번역본에서는 ‘나머지 사람들’이라고 번역하였다)을 의미하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를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이다.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라고 하였는데 이스라엘이 구한 것이 무엇인가? 지금도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있지만 그것을 얻지 못하고 자기 의를 세웠다(10:3). 인간이 구하는 것은 언제나 자기 중심적인 것들이기에 구원도 자기를 위한 구원이다.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으로 부르시는 것과 늘 충돌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으로 택하신 은혜가 주어지지 않는다면 인간에게 구원이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라고 하였다.
“우둔하여졌느니라”(헬, 포로우)라는 말은 ‘굳어지다. 어둡게 되다, 무감각해지다, 완악하게 되다’라는 뜻이다. 그것이 죄의 권세에 매인 인간의 본 모습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은혜가 입혀지지 않은 상태가 완악함이다(참고 고후 3:14). 많은 교인들은 내가 살아 있는 상태에서 지옥을 갈 것인가 천국을 갈 것인가를 내 믿음으로 선택한다거나 아니면 내가 있는 상태 거기서 불러내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은 지옥에서 끄집어내심이다. “내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그들이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일컬음을 받으리라”(9:26)라고 하셨고,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이”(4:17)시기 때문이다. 죽은 자를 살리신 것이고, 없는 상태에서 부르신 것이며 자기 백성이 아니라 한 그 곳에서 아들들로 만들어 내신 은혜의 구원이다.
이러한 문제에 대하여 율법으로 하나님의 의를 구한 유대인의 입장에서는 이해가 안 될 것이다. 어쩌면 오늘날 우리도 유대인들과 동일한 입장에서 문자적으로 성경을 본다면 이 문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또 구약의 말씀을 증거로 제시한다. 8절에 보면 “기록된 바 하나님이 오늘까지 그들에게 혼미한 심령과 보지 못할 눈과 듣지 못할 귀를 주셨다 함과 같으니라”라고 말씀하는데 이는 이사야 선지서와 신명기의 인용이다.
대저 여호와께서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을 너희에게 부어 주사 너희의 눈을 감기셨음이니 그가 선지자들과 너희의 지도자인 선견자들을 덮으셨음이라(사 29:10)
2 모세가 온 이스라엘을 소집하고 그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을 너희가 보았나니 3 곧 그 큰 시험과 이적과 큰 기사를 네 눈으로 보았느니라 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신 29:2-4)
이사야서에는 “깊이 잠들게 하는 영”이라고 하였다. 성경에서 잠들었다는 말은 현실적으로는 죽었다는 표현이다. 따라서 영이 잠들어 있다는 것은 한 마디로 영에 대해서는 죽었다는 뜻이다. 이것을 바울은 “혼미한 심령”이라고 표현하였는데 헬라어로는 ‘프뉴마 카타뉘크시스’라는 말로 ‘영이 무감각한’ 상태를 의미한다. 즉 영적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신명기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출애굽 때의 상황을 보여주는데 하나님께서 애굽에게 행하신 일들을 보긴 보았지만 그 일이 어떤 목적으로 주셨는가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다윗이 이르되 그들의 밥상이 올무와 덫과 거치는 것과 보응이 되게 하시옵고 그들의 눈은 흐려 보지 못하고 그들의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 하였느니라”(9-10절)라고 하였는데 이는 다윗의 시를 인용한 것이다.
22 그들의 밥상이 올무가 되게 하시며 그들의 평안이 덫이 되게 하소서 23 그들의 눈이 어두워 보지 못하게 하시며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리게 하소서(시 69:22-23)
시편에 가끔씩 나오는 저주시 중의 한 편이다. 저주시라는 것은 개인적인 감정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언약적 관점에서 하나님의 의로우심과 공평하심이 영원하며, 궁극적으로 그 사람의 행한 것이 결국 메시아를 대적하여 마땅히 심판의 대상이 된다는 차원에서 기록된 계시의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어떤 입장으로 오시는가를 보여주는 말씀들이다.
“밥상”이란 잔치에 베풀어진 음식인데 그것이 올무가 되고 사냥의 그물이 된다고 하였다. “등은 항상 굽게 하옵소서”(헬, 슁캄프토)라고 하였는데 강제로 굴종하는 포로들이 등을 구부린 데서 취한 비유적 표현이다. 즉 이스라엘은 율법의 종으로, 포로 잡힌 것과 같은 그런 모양새로 살았다는 의미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신 것들을 누리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들을 얽어매는 것이 되어 사로잡혀 있는 상태라는 뜻이다. 이것은 이미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 속에 나타내셨다. 어찌하여 비유로 말씀하시느냐는 제자들의 물음에 이렇게 답변하셨다.
11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12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마 13:11-13)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저주 아래에 있기 때문에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며 늘 올무 속에 갇혀 있는 존재이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 눈을 열어주시고 귀를 뚫어주지 않으시면 인간은 하나님을 보지 못하며 그 말씀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풀지 않는다면 인간은 항상 자기의 행위로 하나님을 찾아 나가려고 노력하나 그것은 어두움에서 방황하는 것이고 사실은 죽은 상태라는 말씀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그들이 넘어지기까지 실족하였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그들이 넘어짐으로 구원이 이방인에게 이르러 이스라엘로 시기나게 함이니라 그들의 넘어짐이 세상의 풍성함이 되며 그들의 실패가 이방인의 풍성함이 되거든 하물며 그들의 충만함이리요”(11-12절)라고 선언한다. 이 말씀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바대로 이스라엘이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가지고 온 구원을 어찌할 수가 없어서 이방인에게 주셨다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이 유일한 구원의 대상이었는데 저들이 실패함으로 하나님이 마지못해 그 빈 자리를 이방인으로 채워 넣는 구원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본문의 말씀은 이스라엘이 실패했기 때문에 하나님 편에서 은혜를 베풀어 주셔야만 구원이 가능하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하고 확실해졌다는 뜻이다. 이스라엘의 실패로 말미암아 인간의 모든 행위가 깡그리 부정된다는 것이 완전히 드러났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이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한 것을 봐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을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은 도무지 불가능한 것이기에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알라는 의미이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이다. 이스라엘을 통해 인간의 실패를 보여줌과 동시에 그 언약의 통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을 설명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을 이미 3:2에서 유대인의 유익은 범사에 많지만 그 중에서 말씀을 맡은 것이었다고 밝혔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말씀을 맡긴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받아 들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기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하는 것인가? 그럴 수는 없다. 이 때문에 바울 사도는 11:1에서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라고 말했다. 사도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를 말할 수 있게 된 것은 이스라엘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것에 의한 것이라는 뜻이다. 이스라엘인이라고 해서 무조건 구원에서 제외될 수 없고 이방인이라고 해서 누구나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
도리어 율법에 매여 이스라엘이 넘어지고 실패한 것 때문에 하나님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 말미암아 성취된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고 복음이 더 풍성히 드러날 수 있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해 인간의 율법적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고 하나님의 언약이 한 사람을 향해 있었던 그것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은혜라는 것이 더욱 확실하게 증명되었다. 이스라엘이 자기 힘으로 구원받으려고 했던 어리석은 모습이 있었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면 결코 인간의 행위라는 것으로 하나님의 구원을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해 왔던 것, 한국교회가 행하는 기도, 전도, 예배 등의 모든 종교적 행위는 이스라엘 속에 다 들어 있는 것들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진 모든 조직들은 예수님 당시에 있었던 것들의 재현이고 그 조직들이 힘을 합쳐 예수님을 십자가에 살해하였다. 제도나 어떤 종교적 형태나 의식으로 하나님을 섬기려고 하는 모든 것이 이스라엘이 한 실패의 행위 속에 다 들어 있던 것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께서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십자가로만 이루신 은혜이다. 그러므로 십자가는 인간의 모든 행위를 거부하는 하나님의 일이다.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3-6)
(2021121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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