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쉰다섯 번째 강론
로마서 11:1-6
은혜로 택하신 남은 자
오늘 본문에서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나도 이스라엘인이요 아브라함의 씨에서 난 자요 베냐민 지파라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1-2a절)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라고 바울 사도는 단언하면서 묻는다. 지난 강론에서 보았던 10:21을 다시 보면 “이스라엘에 대하여 이르되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라고 하였다. 늘 배반하고 거역하는 이스라엘에 대하여 하나님은 계속해서 자비의 손을 나타내셨다. “내 손을 벌렸노라”라는 말씀은 자신의 능력을 나타내셨다는 뜻이다.
그 능력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다름 아닌 이스라엘이 항상 배반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성취하셨다는 의미이다. 어쩌면 자신도 이스라엘 사람이고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베냐민 지파이기 때문에 구원에 참여 된 것으로 착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으로 인해 당연히 받는 구원은 아니라는 뜻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1절에서 어떻게 표현되어야 하는가?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셨느냐?’라고 해야 문맥상 맞는 물음일 것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그렇게 표현하지 않고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라고 묻고 2절에서는 스스로 “하나님이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셨나니”라고 답변하였다. 하나님께서 버리지 않은 자는 “자기 백성”이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의미가 없어졌지만 이스라엘 안에 있는 자기 백성은 버리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아마도 “여호와께서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아니하시며 자기의 소유를 외면하지 아니하시리로다”(시 94:14)라는 시편 말씀을 근거로 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더욱 명확히 하기 위하여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계시하신 구약의 말씀을 예로 든다. “너희가 성경이 엘리야를 가리켜 말한 것을 알지 못하느냐 그가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되 주여 그들이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으며 주의 제단들을 헐어 버렸고 나만 남았는데 내 목숨도 찾나이다 하니 그에게 하신 대답이 무엇이냐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 하셨으니”(2b-4절). 엘리야 선지자는 이스라엘을 하나님께 고발하였다고 선언한다.
이 말씀은 한 마디로 엘리야를 통해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셨는가 하는 한 단면을 보여준다. 엘리야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북 왕조 이스라엘의 가장 악했던 아합 왕 시대의 선지자였다. 열왕기상 18장에 보면 엘리야는 갈멜 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신을 섬기는 850명의 선지자들과 대결한다. 그때 엘리야는 물을 번제물과 나무 위에 쏟아부었는데 하나님께서 불을 내려서 제물을 태우심으로 여호와 하나님만 이스라엘 중의 하나님이심을 나타내셨고 엘리야는 이방 선지자들을 기손 시냇가에서 죽인다(왕상 18:16-40). 여기까지만 보면 엘리야의 완전한 승리였다.
그러나 열왕기상 19장으로 넘어가면 아합 왕의 아내 이세벨이 기가 하나도 꺾이지 않고 오히려 엘리야를 잡아 죽이겠다고 나선다. 그러자 엘리야는 광야로 도망을 하였고 호렙 산에 이르렀을 때에 하나님께서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왕상 19:9,13)라고 묻자 엘리야는 “오직 나만 남았거늘”(왕상 19:10,14)이라고 하였다. 그때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 말씀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왕상 19:15-18)
엘리야는 이 기회에 아합과 이세벨을 비롯한 우상숭배자들을 모조리 다 심판해 주셔야지 왜 그들에게 다시 위협이 되게 만드시는가 하는 의문이 있었다. 오직 나만 남았다고 푸념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메섹에 가서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 왕으로 세우고, 또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는 말씀을 주신다.
아람은 이스라엘의 가장 가까이 있는 원수의 나라였다. 그런 아람 나라가 유지되게 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아합이 다스리는 나라인 북이스라엘에도 왕을 세워 계속 유지되게 하고, 엘리야 너를 대신하는 선지자도 세우라고 하셨다. 이게 무슨 뜻인가?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은 기름 부음 받은 자를 통해 계속 이어서 하나님께서 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한 마디로 하자면 언약을 지향하고 계시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중에 칠천을 남겨 두셨다는 것이다. 여기서도 그렇고 로마서 본문에서도 번역하면서 “칠천 명”이라고 하였는데(개역한글판에서는 “칠천”이라고만 표현하였다) 엄밀하게 말해서 “명”이라는 말은 없다. 즉 ‘칠천’인데 7이 1,000이다. 7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나타내고 1,000이란 하나님께서 주시는 영생을 표현하는 수로 둘 다 하나님의 숫자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 일한 결과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하신 결과로 남겨 놓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4절에서 “내가 나를 위하여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칠천 명을 남겨 두었다”라고 하였는데 여기 “내가 나를 위하여”라는 말을 직역하면 ‘나의 것’, ‘나 자신의 것으로’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것으로 남겨 두신 자들이 칠천, 즉 이스라엘에 의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자신의 것으로 남겨 놓으셨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남은 자란 인간의 손을 떠나 있는 것이라고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이스라엘을 고발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남은 자란 단순히 이스라엘 전체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안에 자신의 능력에 의한 자기 백성을 남기신다는 것이 바울 사도가 구약의 엘리야 사건을 예로 든 이유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능력으로 남기신 “자기 백성”이란 어떤 의미인가? 아니 “그 미리 아신 자기 백성”이란 누구인가? 이 백성은 창세 전에 아신 바 되신 자기 백성이다. 즉 하나님께서 주신 언약의 취지대로 언약을 나타낼 한 인물의 자기 백성을 지향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여기서 “백성”을 단수로 쓰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19 오직 흠 없고 점 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된 것이니라 20 그는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린 바 되신 이나 이 말세에 너희를 위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으니(벧전 1:19-20)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 능력에 의해 자신의 것으로 남기신 자기 백성이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께서 구약 시대에 엘리야 선지자를 남기시고 칠천을 두셨다고 하심으로 이스라엘을 고발하신 것은 참 이스라엘이시고 남은 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한 것이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미 9:27에서 이사야 10:22을 인용하여 “또 이사야가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치되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니”라고 선언하면서 하나님께서 두신 “씨”(사 1:9)로 온전히 성취되었다고 하였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수가 비록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데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이 땅에 어느 누구도 구원받을 자가 없다는 것이 성경의 선언이다. 구원받을 수 있는 자는 오직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온전히 순종하시고 율법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그래서 남은 자만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은 결코 개인 구원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나 한 사람 하늘로 집어 올리는 구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몸의 구원이다.
그런데 바울 사도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놀라운 선언을 한다. “그런즉 이와 같이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5절).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라는 말은 ‘하나님 은혜에 의해 남은 자로 이 땅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오늘날 남은 자는 언약을 이루신 참 이스라엘이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남은 자로 삼으시는 은혜가 주어진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이름의 정의를 이렇게 명확하게 밝혀주고 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지금도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라고 하였는데 “남은 자가 있느니라”라는 말씀을 직역하면 ‘남은 자가 되었다!’라는 선언이다. 그리고 부연 설명을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느니라”(6절)라고 하였다. 바울 사도가 9장에서 이미 남은 자에 대한 말씀을 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에서 또 남은 자에 대한 말씀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오직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되는 것임을 명확하게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하나님은 엘리야 선지자를 통해 자신의 은혜를 은혜로 드러내시는 일을 어떻게 행하시는가를 보여주신 것이었다. 하나님의 은혜로 남은 자를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온전히 순종하게 하셨고 그 십자가에 의해 오늘날도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 즉 자기 백성들을 만드신다. 결국 구약의 이스라엘은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었기에 지상의 이스라엘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되었다. 하나님은 언약에 의해 자기 백성, 즉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고 지금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 된 자들인 교회를 남기신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주성교회는 버리실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 된 교회는 결코 버리지 않으신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남은 자를 두신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행위를 거부하신다. 우리의 행위가 개입된다는 것은 은혜를 모독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남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 그들이 바로 교회이다. 왜 우리가 모일 때마다 우리의 죄를 폭로하며 십자가를 선포하는가? 바로 하나님의 은혜로 택하심을 따라 남은 자가 주님의 몸 된 교회로 있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남은 자는 세상의 말을 싫어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같은 말씀으로 말하게 되어 있다. 이것은 인간의 힘으로 불가능하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께서 오셔서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에 죽게 만드시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이 은혜를 아는 자가 하나님의 자기 백성이요 성도이다. 하나님의 자기 백성 된 자, 성도의 일생은 이 은혜를 날마다 확인하는 삶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고전 2:12)
(2021120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 신약강론 > 로마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57강 로마서 11:13-16 거룩한 처음 것 (0) | 2021.12.19 |
---|---|
제56강 로마서 11:7-12 이스라엘의 실패 (0) | 2021.12.13 |
제54강 로마서 10:16-21 믿음과 들음과 말씀 (0) | 2021.11.28 |
제53강 로마서 10:9-15 주의 이름 (0) | 2020.11.22 |
제52강 로마서 10:1-10 자기 의와 하나님의 의 (0) | 2020.11.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