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46강 로마서 9:1-5 약속 있는 이스라엘

불편한 진리 2020. 9. 28. 0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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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마흔여섯 번째 강론

 

로마서 9:1-5

약속 있는 이스라엘

 

예수님이 승천하신 이후부터 초대 교회는 예수님이 곧장 다시 오실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 이후로 역사가 흘러오면서 종말에 관한 이야기가 없었던 때는 없었다. 그래서 온갖 예언이 난무하며 시한부 종말론자들이 자기 나름대로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날짜를 점치면서 어리석은 민중들을 선동하였다. 그 대표적인 부류가 세대주의자들인데 세대주의성경과 교회의 역사를 시대별로 구분하여 하나님의 통치 원리나 구원의 방법들이 시대마다 다르다고 주장하는 견해이다. 어떤 과정과 단계를 거쳐서 지금 이 지구의 종말이 올 때 이스라엘이 어떻게 회복되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한다. 그 근거로 로마서 9-11장을 가지고 이스라엘의 회복을 중심으로 이해하고자 한다.

그래서 지금 중동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고 그 사건들을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들과 연결하고 짜맞추기에 급급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사람을 모을 수 있고 이 시대에 예언자로 인기를 끌 수 있기 때문이다. 시중에 종말에 관한 책들이 상당히 많이 나와 있는데 그 책들의 대부분이 이런 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 교회의 대부분이 이런 주장들에 대해서 영향을 받았고 또한 지금도 받고 있다. 그래서 교리상으로 건전(?)하다고 하는 교회나 목사도 어느 날 갑자기 시한부 종말론자로 둔갑한다. 이렇게 되는 이유가 종말에 대한 오해로 인해 성경보다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중요한 것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종말이 어떤 것인가를 생각하지 않고 지금 세계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진다. 그리고 그것을 성경에 적용해 예수님의 재림 날짜를 알아 미리 대비하려는 기회주의적 발상과 얄팍한 상술이 동원된 결과이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종말이란 하나님의 뜻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로 온전히 다 드러난 상태를 말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때부터 다시 오실 때까지를 종말이라고 한다. 역사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지 이스라엘이 아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역사를 끝내시겠다는 증거이다. 다시 말해서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 왜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도 없고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는가 하는 것을 철저히 보여주셨다. 이스라엘이 이렇게 실패할 수밖에 없었기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 보자.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 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1-2). 우리 성경에서 참말(, 알레데이아)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진리라는 뜻이다(쉬운성경). 성경에서 진리란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고 그 진리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나타내신 것이다(1:14). 이 말씀을 직역하면 진리,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고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이다. 그리스도 안이란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 연합의 의미이다. 바울 사도는 진리라는 단어를 문장 맨 앞에 넣어서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라고 하였다. 이 말을 풀어서 말하면 거룩한 영 안에 있는 나의 양심이 함께 증거한다는 말이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에 비진리인 거짓을 말할 수 없고 진리를 말하며 이는 두 증인, 즉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이 증언하는 것인데 내 양심은 그 거룩한 영 안에 있어서 함께 진리를 증언하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유대인들은 바울 사도가 큰 변심을 하였다고 생각했다.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는 바울이 유대에서뿐만 아니라 로마제국 전체에 자기 명예를 드러내고 싶어서 타협한 사상으로 세상을 미혹하는 자라는 것이다. 이것은 바울 사도 개인적인 차원에서 참기 어려운 오해였지만 근본적으로는 자신이 오해를 당함으로 인하여 전하는 복음이 오해되는 것이 더 심각한 문제였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 즉 진리 안에 있으므로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이라고 밝힌다.

그리고 3절 이하에서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이라”(3-4a)라고 했다. 이 말씀을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여 가족을 비롯한 친인척, 혈육의 구원을 위해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해야 한다거나 또 나라와 민족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긴다. 아니 우리도 바울의 심정으로 가족의 구원과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기도할 것을 더 독려하지만, 이 말씀은 결코 그런 의미의 말씀이 아니다.

이 말씀은 모세의 기도를 생각나게 한다. 출애굽기 32장에 보면 모세가 시내 산 위에 올라가 있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섬겼을 때 모세가 이렇게 기도하였다. “31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32:31-32). 모세는 자신이 저주를 받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사해주시기를 구한 것이다. 모세가 이렇게 기도하였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한 마디로 언약의 인물인 모세를 통해 자기 백성들의 죄를 담당하여 십자가에서 진짜 저주를 받으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주고 있다.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 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3:13-14)

 

저주란 말은 헬라어로 아나데마라는 말인데 어원은 올려진 것을 의미하는데 이 말에서 신에게 바치는 것’, ‘신전에 올려놓는 제물이라는 뜻이 되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한 죽음이 아니라 죄인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께서 홀로 저주를 받으심으로 자기 언약 백성들을 죄에서 건지신 상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진리를 말하게 된 바울 사도가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진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저주를 받아서 끊어질지라도 좋다는 것은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에 대하여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는 말씀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의 이 말은 자신이 정말 저주를 받아 끊어져도 형제, 골육, 친척이 구원을 받았으면 좋겠다는 말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그들은 이스라엘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변하지 않기 때문에 이미 이스라엘은 하나님에 의해 버린 바 된 상태로서의 이스라엘이라는 말이다.

바울 사도가 왜 이렇게 말하는가 하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로서 이미 많은 혜택을 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표현들을 공통된 의미로 반복 표현하면서 이스라엘이 어떤 혜택을 누렸는지 다음과 같이 밝힌다. 그들에게는 양자 됨과 영광과 언약들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이 있고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4b-5). 양자 됨-영광, 언약들-율법, 예배-약속들로 나타내고 있다.

여기서 양자 됨이란 이미 8:1523절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아들 됨이라는 말이다. 성경에서 아들 됨의 의미는 아버지의 영광을 그대로 누린다는 차원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말씀한다(참고/4:4-7). 이런 점에서 아들 됨영광이란 다른 의미의 표현이 아니다. 또한 언약들이란 언약을 율법으로 주셨다는 뜻이다. 그리고 예배’(, 라트레이아)섬긴다.’, ‘봉사한다란 말인데 하나님께서 언약을 완성하신 약속으로 이스라엘을 섬기고 봉사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같은 의미의 다른 단어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들로 삼으시고 언약적 사랑으로 어떻게 철두철미하게 섬기셨는가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리는 전문이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성취를 이스라엘에게 맡기지 않으시고 애초에 자기 언약이라고 하셨고 자기 죽음으로 친히 언약을 성취하실 것을 수없이 보여주셨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언약은 묵시 속에서 완성된 것이었고 그 완성된 것을 역사 속에 풀어서 나타내 보이셨다. 따라서 역사란 단순한 시간적 흐름의 도식인 수평이 아니라 굳이 표현하자면 수직으로 이스라엘의 죄의 깊이와 바닥을 폭로하는 현장이었다.

결국 하나님의 언약은 하나님께서 친히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온전히 완성하셨다. 그래서 5절에서 조상들도 그들의 것이요 육신으로 하면 그리스도가 그들에게서 나셨으니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을 개정성경으로는 쉽게 이해하기 힘든데 쉬운성경에서는 족장들이 그들의 조상들이며, 그들의 혈통에서 그리스도께서 나셨습니다라고 번역하였다. 즉 이스라엘이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시는 데 필요한 혈통으로서의 통로라는 의미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는 만물 위에 계셔서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니라 아멘라고 선언하고 있다. 실로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언약을 계획하시고 말씀하시고 온전히 완성하신 하나님이시기에 이스라엘로부터 거부당하거나 외면당하실 분이 아니라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 말씀하는 이스라엘이란 지금 지구상에 있는 국가 이스라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다름 아닌 약속의 실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제까지 이스라엘을 두고 유대인이라고 썼지, 이스라엘이라고 하지 않았다(1:16, 2:9,10,17,28,29, 3:1,9,29 ). 이스라엘이라는 말은 로마서에서는 여기 처음 등장한다.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서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이스라엘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시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요 통로라는 말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구약에서 이스라엘에 주신 계시는 예수 그리스도로 성취되었다는 뜻이다.

 

11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와 12 그 나라의 본 자손들은 바깥 어두운 데 쫓겨나 거기서 울며 이를 갈게 되리라(8:11-12)

 

여기서 말씀하는 나라의 본 자손이란 일차적으로 당시의 유대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동 서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른다는 것은 이방인들을 두고 하신 말씀이다. 즉 예수님 자신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나라가 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완성된 나라가 하나님 나라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이다.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가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의 자녀이며 곧 이스라엘이다. 결국 본문에서 말씀하는 이스라엘이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말하는 것이다.

목사, 장로, 권사, 집사 혹은 모태신앙이며 교회 생활을 수십 년 하였다는 것, 구원의 확신이 있고 내가 이제 십자가 복음을 알았다는 것으로 천국은 이미 받아 놓은 것이기에 자신은 거기서 결코 제외될 수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안위하는 사람이라면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자이다. 이제 우리는 지구상에 있는 국가 이스라엘이 어떻게 회복되는가 하는 것으로 자기 구원에 관심을 가진 자가 아니라 새로운 이스라엘로 십자가를 지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죽고 살아난 자이다. 성도는 혹시 구원에서 탈락하지는 않을까 하며 염려하는 자가 아니라 십자가에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죽는 자이기 때문이다(20200927_강론/김영대).

 

롬46.0901-05 약속 있는 이스라엘(20200927)_주성.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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