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45강 로마서 8:35-39 끊을 수 없는 사랑

불편한 진리 2020. 8. 9. 18:48

로마서 마흔다섯 번째 강론

 

로마서 8:35-39

끊을 수 없는 사랑

 

본문은 교인이라면 누구나 다 좋아하는 구절이다. 직접적인 자신의 문제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나를 지극히 사랑하시기에 누구든지 그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굉장히 소중한 말씀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시며 결코 나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것이 많은 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변함없는 확신(?)이다. 흔히들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었다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식이다.

그렇다면 생명책에 내 이름이 기록되었는지 어떻게 아는가? 내가 믿었기 때문인가? 성경에 내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말씀하고 있는 곳은 어딘가? 만약 있다면 그 이름이 나를 지칭하는지 아니면 지구상에 있는 또 다른 사람의 이름을 지칭하는 것은 아닌지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생명책에 자신의 이름이 기록되었는데 만약 개명을 하면 어떻게 되는가? 내가 이름을 바꾸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과거에 썼던 것 지우고 다시 기록하시는가?

 

사실 이 모든 생각들은 하늘에 물리적인 생명책이 있고 하나님께서 거기에 나의 이름을 기록해 놓으셨다는 만화같은 상상을 하고 성경 해석을 하며 또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구절들이 다 자기 자신을 위한 구절로 생각하기 때문에 나온 해석들이다. 죄를 폭로하고 책망하는 구절은 다 빼버리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여 언제나 나의 필요한 것을 시시때때로 적절하게 공급해 주신다는 이런 구절들만 뽑아서 다 자기를 위해서 말씀하신 것으로만 생각한다는 것이 문제다.

우리 신앙의 문제점은 근본적으로 여기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에 성경이 말씀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차원이 되고 말았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그 출발점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것을 거부하고 근본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 출발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니 처음부터 이미 삐뚤어져 있다. 방향을 잘못 잡고 있었다. 그래서 성경의 어떤 구절을 해석하더라도 다 자기의 유익과 편의를 위한 논리로 풀어 간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인데 이 구절에서 내가 사랑 받아야 하고 나를 사랑하신다는 뜻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근거가 있는가? 이미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성경은 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를 말한다. 바울 사도가 말한 우리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그의 몸된 교회를 가리킨다. 그래서 31절에서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라고 하였는데 33절에서는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라고 하여 우리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로 나타내고 있다. 바울은 누가 대적하리요”, “누가 고발하리요라고 한 것에 이어 34절에서는 누가 정죄하리요라고 하였다. 그리고 35절에서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라고 선언하였다. 이렇게 선언한 이유는 구원의 근거가 내 쪽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내가 구원을 이루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였다.

 

오늘 본문에서는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5)라고 하였다. 여기서 끊으리요(, 코리조)라는 말은 나누다’, ‘분리하다라는 뜻이다. 즉 주님의 몸된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랑과 분리하거나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생명을 누리게 된 구원이 나의 사랑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근거해 있기 때문이다. 나의 사랑은 감정에 따라 수시로 변하는 사랑이기에 구원이 내 쪽에 근거해 있지 않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가?

 

그런데 35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39절에 가서는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였다. 바울 사도가 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것은 미리 아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미 나누었던 8:29-30의 강론에서 하나님께서 광야 마른 땅에서 너를 알았거늘”(13:5)이라는 말씀이 단순히 이스라엘이 광야에 있는 것을 알고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출애굽시켜 광야의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하고 계시고 말씀으로 그들을 보살피셨다는 것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또한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 알았나니”(3:2)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애굽에서 건지신 것은 자신의 언약을 보여주기 위한 존재로 선택하셨다는 의미임을 신명기 7:6-8 말씀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것은 이스라엘을 선택하실만한 무슨 근거가 이스라엘 쪽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 자신의 사랑에 근거한 것이었고 그 사랑은 언약 성취를 드러내시는 것으로 방향이 잡혀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언약적 사랑이 온전히 드러난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이 땅에 온전히 드러난 것이었다. 그래서 5장에서 이미 이렇게 선언하였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랑하나님의 사랑이기 때문에 35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39절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 “누가 능히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들을 고발하리요”(33), “누가 정죄하리요”(34)라는 말씀은 35절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에 근거하고 있음을 밝히며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할 수 없기에 그의 몸된 교회를 대적할 수 없고 고발할 수 없으며 정죄할 수도 없는 것이다.

 

환난(, 들립시스)이란 억압’, ‘압박’, ‘고통이나 괴로움을 말한다. 곤고(, 스테노코리아)라는 말은 좁은 장소라는 말에서 유래된 단어인데 감옥에 갇혀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박해(, 디오그모스)핍박이란 뜻이고 기근(, 리모스)이란 배고픔’, ‘굶주림을 의미하며 적신(, 귐노테스)이란 벌거벗음으로 옷이 없는 상태라는 말이다. 위험(, 킨뒤노스)이란 대체적으로 선원들이 직면하는 위험과 관련된 용어이며, (, 마카이라)이란 단어는 마코마이’(싸우다)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바울 사도는 시편 44:22을 인용하여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36)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 대한 말씀이고 그 십자가가 교회를 통해 드러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 고백을 그대로 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의 자랑이 아니라 주님의 몸된 교회가 이 땅에 어떤 모습으로 드러나는가를 실제적으로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23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이냐 정신 없는 말을 하거니와 나는 더욱 그러하도다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으니 24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25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 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26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27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후 11:23-27)

 

그런데 주님의 몸된 교회가 세상에 단순히 고난과 핍박 가운데 있는 것으로만 드러나는 것같이 보이지만 실제는 승리 안에 있다고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37)라고 선언한다. 넉넉히 이기느니라라는 말은 헬라어로 휘페르니카오인데 휘페르’(~위에, ~을 뛰어 넘어서)니카오’(이기다, 승리하다)의 합성어로 승리자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 즉 가장 영광스러운 승리를 얻는다는 뜻으로 엄청난 승리로 이기고도 남는다는 말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로 이 땅에 존재한다는 것은 온갖 시련과 고난, 핍박 가운데 있지만 실제는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고난이 없는 평온한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고난과 죽음, 이 모든 것들을 이긴다는 뜻이다. 성도가 자기 사랑으로 하나님을 붙잡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기 사랑으로 성도들을 붙잡고 있다는 것이다.

이제 바울 사도는 최고의 흥분된 어조로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라고 선포한다. 여기서 확신하노니(, 페이도)라는 말은 스스로 설득 당하다’, ‘신뢰하다’, ‘복종하다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의 사랑에 의해 스스로 설득 당한 상태에 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 다음 본문을 보면 사망/생명”, “천사들/권세자들”, “현재 일/장래 일”, “높음/깊음을 대조하였는데 38절 끝에 대조된 표현같이 보이지 않는 능력이라는 말이 들어가 있어서 사실 이해하기 힘든 부분인데 능력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로 이해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미리 정하신 것은 철저히 하나님 자신의 사랑에 근거한 선택이기에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느니라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사망이나 생명 가운데 있는 어떤 것, 능력의 천사들과 세상의 통치자나 지배자들 사이의 그 어떤 것, 역사 속에 일어난 그 어떤 것, 최고로 높음과 깊음의 상태 가운데 있는 그 어떤 것이라도 그것은 피조물일 수밖에 없고 피조물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분리시킬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 예수 안이다. 그 그리스도 예수 안이 하나님의 사랑이다.

 

에베소서 5:22 이하에 보면, 남편과 아내에 대해 말하면서 남편의 역할은 예수 그리스도가 죽기까지 자신을 내어주시며 교회를 사랑하심과 같이 남편이 아내를 사랑해야 하는 것을 말씀하는데 실제 이 말씀대로 남편들이 그렇게 살라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였는지를 보여주는 말씀이다. 주님은 자신의 몸된 교회를 그렇게 사랑하셨다. 그러므로 교회란 주님의 사랑을 입은 자들이다. 그래서 주님만을 사랑하게 된 자들이 교회이다.

오늘도 세상은 우리의 죄에 대해 정죄하고 송사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려고 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된 것으로 돌리고 무효화시키려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교인들은 죄를 짓는 자기 행위를 생각하고 그것 때문에 천국에 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리스도와 분리시키려고 하는 악한 영의 계략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 모든 것들에 대하여 승리하신 가장 명백한 증거이기에 그의 몸된 교회요 성도는 주와 더불어 날마다 십자가에 죽는 것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선언하였다.

 

7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에 가졌으니 이는 심히 큰 능력은 하나님께 있고 우리에게 있지 아니함을 알게 하려 함이라 8 우리가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여도 싸이지 아니하며 답답한 일을 당하여도 낙심하지 아니하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린 바 되지 아니하며 거꾸러뜨림을 당하여도 망하지 아니하고 10 우리가 항상 예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몸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11 우리 살아 있는 자가 항상 예수를 위하여 죽음에 넘겨짐은 예수의 생명이 또한 우리 죽을 육체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고후 4:7-11)

 

(20200809 강론/김영대).

 

롬45.0835-39 끊을 수 없는 사랑(20200809).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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