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마서 마흔일곱 번째 강론
로마서 9:6-13
이스라엘과 이스라엘
오늘날 많은 목사나 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은, 교회를 이미 존재하는 것으로 전제하고 내가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목사는 목사대로 교회를 시작하여 목회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고 성장시켜 큰 교회로 만들 수 있는 이 모든 것들은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본다. 또한 교인들은 교인들대로 대형교회로 성장시킨 훌륭한 목사, 공부를 많이 하여 박사 학위를 가진 목사가 목회하는 교회, 소위 말해서 건강한 교회나 분위기 좋은 참신한 교회를 자신이 선택해서 다닌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거기에 구원이 있는 것으로 여긴다.
결국 구원은 자신의 선택에 달려 있다고 보는 것이다. 내가 건강한 교회, 좋은 교회를 선택했기 때문에 구원은 이미 받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안심한다. 이렇게 인간은 끊임없이 선택의 주도권을 자신이 가지고 살아가면서 거기에 한 가지 더 추가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 하나님의 선택과 같다고 착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혹시 하나님의 선택과 나의 선택이 서로 차이가 있을지도 모를 불안감을 맹신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래서 오늘도 많은 교인은 가게에서 무엇을 살 것인가로 고민하는 것처럼 구멍가게(?) 같은 교회보다는 대형 백화점과 같이 번듯하게 걸린 간판을 보고 안전하고 전통적으로 인정된 교단의 교회 마당에서 서성댄다. 이러한 교인들의 요구에 순응하듯 교단들은 로고를 만들고 교회들은 간판에 대문짝 하게 붙여 유명 교단에 속한 교회라는 것을 증명하고자 한다. 그렇게 좀 더 참신한 교회, 좀 더 신선한 교회, 좀 더 건강한 교회를 찾아서 바람에 구름이 밀려가듯이 여기저기로 떠돌고 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은 우리가 교회를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고 단언한다. 묵시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예정은 우리 각 개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예정하셨고 그 예정으로 인해 하나의 교회가 하나님의 선택으로 드러난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선택하는 교회가 아닌 하나님의 선택인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속한 것인지 말씀에 비추어 자기를 점검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앞의 강론에서 이스라엘이라는 한 나라를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것은 무조건 그들을 구원하고자 하신 것이 아니라 언약을 온전히 성취하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는 도구요 통로로 사용하시기 위한 선택이라는 것을 생각했었다.
이스라엘의 민족과 국가는 실패하였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불러내셔서 참 이스라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약속은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오늘 본문에서 더 구체적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 같지 않도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또한 아브라함의 씨가 다 그의 자녀가 아니라”(6-7a절)라고 선언한다. 바울 사도는 자신의 골육 친척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은 것이 결코 하나님의 말씀이 폐하여진 것은 아니라고 단언한다. 이스라엘이 실패하였지, 하나님은 자신의 약속, 자신의 말씀을 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것을 유대인들이 조상으로 여기고 있는 아브라함을 예로 들어 제시한다.
그다음 말씀을 보면 “오직 이삭으로부터 난 자라야 네 씨라 불리리라 하셨으니 곧 육신의 자녀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요 오직 약속의 자녀가 씨로 여기심을 받느니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7b-9절)라고 하였다. 이 말씀을 창세기에서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이르시되 네 아이나 네 여종으로 말미암아 근심하지 말고 사라가 네게 이른 말을 다 들으라 이삭에게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 부를 것임이니라(창 21:12)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아브라함은 자신을 통해서 이루어지면 된다고 생각하였기에 여종 하갈을 취하여 이스마엘을 낳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마엘이 아닌 “이삭에게서(직역하면 ‘이삭 안에서’) 나는 자라야 네 씨”라고 하셨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스마엘을 허락하신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을 바울 사도는 “육신의 자녀”와 “약속의 자녀”를 대조해서 보여주시기 위한 것임을 밝힌다. 즉 이스마엘은 육신의 아이, 이삭은 약속의 아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여기서 약속이 말씀에 대한 증거를 “약속의 말씀은 이것이니 명년 이때에 내가 이르리니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심이라”라고 하였는데 “명년 이때”라는 말을 직역하면 ‘바로 (특별한) 이때’라는 말이다. 그러면 ‘바로 특별한 이때’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말씀은 창세기를 인용한 말씀인데 창세기의 말씀을 확인해 보자.
그가 이르시되 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하시니 사라가 그 뒤 장막 문에서 들었더라(창 18:10)
이 말씀은 아브라함이 하갈에게서 이스마엘을 낳은 후에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셔서 하신 말씀인데 개정성경에는 “내년 이맘때”라고 번역하였는데 정확하게 번역하면 ‘생명의 때’라는 말이다(킹제임스흠정역 참고). 그리고 그다음 말씀을 보면 “내가 반드시 네게로 돌아오리니”라고 하셨다. 즉 사라가 아들을 낳는 날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다시 찾아오시는 것으로 말씀하셨고 그것을 생명의 때라고 하신 것이다(참고/창 18:14, 21:1).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표현한 ‘바로 특별한 이때’란 단순히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낳는 날이라는 의미를 넘어서서 하나님께서 다시 찾아오심의 때를 말하고 그 ‘생명의 때’가 온전히 드러나는 것을 바울 사도는 ‘바로 특별한 이때’라고 한 것이다. 결국 생명이 온전히 드러나는 때란 약속의 성취자가 이 땅에 오심을 의미하는 것이고 이것이 약속의 말씀이다. 그래서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이렇게 선포하였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 3:16)
약속의 자녀란 이스마엘이라는 육신의 아이와는 대조된 약속의 아이로 이삭을 지칭하며 이삭을 주신 하나님의 약속은 하나님의 찾아오심으로 생명의 때가 온전히 드러나는 것인데 그것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자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여럿이 아닌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겨냥한 것이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구약의 말씀으로 하나님의 선택에 대해 좀 더 진전시켜 이렇게 나타내고 있다. “그뿐 아니라 또한 리브가가 우리 조상 이삭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임신하였는데 그 자식들이 아직 나지도 아니하고 무슨 선이나 악을 행하지 아니한 때에 택하심을 따라 되는 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 리브가에게 이르시되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나니 기록된바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10-13절). 이스마엘과 이삭이 같은 아브라함의 씨라고 할지라도 하갈을 통해 낳은 아들과 사라를 통해 낳은 아들로 구분된다면 이삭의 씨 중에서도 다 이삭의 후손이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을 에서와 이스라엘인 야곱으로 설명한다.
창세기 25장에 의하면, 리브가가 임신하였을 때 복 중에서 두 아이가 서로 싸우는 것으로 나타난다. 서로 싸우는 투쟁성으로 말씀하여 상호 간의 화해나 연합의 가능성을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인간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 때문에 아버지인 이삭과 어머니인 리브가까지도 편이 갈라져 서로 싸우는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싸움의 근거는 장자 개념에 대한 것이다. 인간적인 혈통의 기준에서 보는 장자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한 장자의 개념이 서로 일치가 되지 않는 문제이다.
장자라는 의미가 처음 태어날 때 시간적인 순서에 의해서 확정된다는 것이 이 땅에 사는 인간들의 인식이라면, 같이 붙들고 싸우고 있는 채로 태에서 나오게 되는 에서와 야곱에게는 선택된 장자의 의미를 새롭게 보여준다. 혈통적 출생 서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장자가 아니라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는 방식으로 하나님에 의한 장자의 선택이 드러난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창 25:23)
이 언약의 방식대로 큰 자이신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어린 자기 백성들을 섬기신 것이 십자가 죽음이다. 이것이 약속의 성취이다. 에서와 이스라엘이 된 야곱의 관계에서 혈통적 기반 위에 있는 장자 개념을 공격하면서 주어진다는 것은 십자가란 인간적인 모든 것을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의 뜻대로만 세워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하나님은 선택의 기준이 오직 십자가라는 것이다.
결국 본문을 통해 바울 사도가 말하고자 한 것은 한 마디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고 해서 이스마엘과 이삭으로 갈라지고 이삭의 후손이라고 해서 또한 다 이삭의 후손이 아닌 에서와 야곱으로 갈라지고 야곱이 이스라엘이 되었지만, 야곱의 후손이라고 해서 다 이스라엘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내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하였다 하심과 같으니라”라고 말라기 1:2-3을 인용하였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를 사랑하였노라 하나 너희는 이르기를 주께서 어떻게 우리를 사랑하셨나이까 하는도다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에서는 야곱의 형이 아니냐 그러나 내가 야곱을 사랑하였고 3 에서는 미워하였으며 그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그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겼느니라(말 1:2-3)
하나님께서 야곱을 선택하신 것이 사랑에 근거한 것이라고 밝히고 있는데 그것이 하나님의 주권이고 선택이라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하여 그들의 땅이 황폐하게 되었지만, 야곱을 사랑하였기에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하나님께 응답하기를 ‘당신은 한 번도 우리를 사랑한 적이 없다’라고 선언한다. 이스라엘이 스스로 이스라엘을 거부한 것처럼 지금도 역시 과거 이스라엘이 가졌던 것처럼 거부한 것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살해한 것이다. 이처럼 죄인들은 항상 하나님의 선택에 불만을 품고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바로 이렇게 십자가로 성취하심으로 생명의 때를 온전히 드러내셨다. 따라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 아니 믿어진 자 곧 하나님의 선택으로 말미암아 드러난 주님의 몸 된 교회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선택하셨다는 것은 주님의 몸으로서의 교회이고 그 몸의 구원이지 우리 개개인을 선택하여 구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오직 하나님의 뜻으로만 성취된 것이라면 교회란 하나님의 사랑 안에 부름을 받은 자들이다.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 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요일 4:9-10)
그러므로 죄인이 선택한 교회는 주님의 몸 된 교회라고 할 수 없고 인간이 성장시킨 좋은 교회, 건강한 교회란 십자가와 관계가 없고 죄인들의 욕심에 의해 생겨난 이스마엘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에 부름을 받은 자는 자신의 선택이 무엇이든 그것은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는 것일 뿐이라는 고백을 할 수밖에 없는 자이다.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선택 때문에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20201004_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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