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로마서

제4강 로마서 1:8-13 신령한 은사

불편한 진리 2019. 4. 28. 23:52

❖ 로마서 네 번째 강론


로마서 1:8-13
신령한 은사


많은 교인들이 신앙생활을 누적되는 것으로 오해한다. 오랫동안 말씀을 배우고 그 위에 계속 다져서 높다란 첨탑을 쌓는 것으로 여긴다. 어제가 있기 때문에 오늘의 신앙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십자가를 오해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한 번 지신 것으로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이룬 것이며 하나님께 만족된 것이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죽어야 한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10:12에서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복음을 듣는 것을 식상해 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은 끊임 없이 새로운 것을 찾는 죄의 본성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8절에 보면 바울 사도가 “먼저 내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너희 모든 사람에 관하여 내 하나님께 감사함은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라고 하였다. “먼저”라는 말을 이전 개역한글판에서는 “첫째는”이라고 번역했었는데 사실 헬라어 성경에도 “첫째”라는 말인데 그 다음 ‘두번 째’라는 말이 나오지 않기 때문에 이 말이 오해가 될 수 있으니까 개정성경에서나 다른 번역본들에게서 대개 다 “먼저”라고 번역을 하였다. 1-7절까지 한 문장으로 복음의 핵심적인 선언을 한 후 이제 본격적으로 복음에 대해 이야기하겠다는 뜻이다.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복음에 대해 말함에 있어서 바울은 로마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었기에 가장 먼저 감사로 시작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바울은 “내 하나님”이라고 쓰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복음에 소유된 자로서 나의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로마 교회의 성도들이 예수를 믿어주니 바울의 입장에서 단순히 참 고맙게 생각한다는 말이 아니라 “너희 믿음”이 너희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기에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뜻이다.


또한 “너희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이로다”라는 표현은 실제로 로마 교회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다 드러났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 당시 세계의 중심은 로마였기 때문에 로마에 주님의 교회가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온 세상에 다 드러났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여기서 말하는 세상이란 복음이 드러나야 할 대상으로써의 세상이다. 세상에 복음이 드러나야 하는 이유는 그 세상이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죽인 장본인이고 죽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의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바울 서신의 대부분은 서두에 이렇게 감사를 표현하고 있는데(고전 1:4, 고후 1:3, 엡 1:3, 빌 1:3, 골 1:3, 살전 1:2, 살후 1:3, 딤후 1:3, 몬 1:4), 바울의 감사는 단순한 감사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는 감사였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 덕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의미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기에 약속의 아들로 확정되심의 결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믿음이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로마 교회 성도들에 대하여 하나님께 감사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바울은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9-10절)라고 하였다. 여기 “섬기는”(헬, 라트류오)이라는 말은 ‘섬기다’, ‘봉사하다’, ‘예배하다’라는 뜻이다. 이 말은 종교적으로 제사 용어이다. “내 심령으로”라는 말은 ‘나의 영으로’라는 말이다. 그러면 이 말씀을 쉽게 풀어서 표현하자면 ‘나의 영으로 예배하는 하나님이 곧 그의 아들의 복음으로 예배하는 것’이라고 나타내고 있다. 즉 나의 영으로 예배하는 하나님, 곧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예배하는 그 하나님이 자신의 증인이 되신다는 것이다.


바울이 왜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일까? 이 말씀은 바울이 그냥 단순하게 쓰는 말이 아니라 구약의 제사적 용어를 차용하여 나타내고 있는 말이다. 시편 50:23에 보면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의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여기서 감사의 제사란 레위기 3:1-17에 나오는 화목제를 말한다(참고 레 7:11-21). 하나님과 이웃과의 관계에서 죄 문제가 해결되기를 기원하는 제사로 감사와 찬양을 하며 제물을 드린 자가 제물을 먹음으로 하나님과의 식사 자리에 참여하여 화목하여 평강이 이루짐을 나타내는 제사이다.


바울은 구약의 제사 용어를 가져와서 로마 교회 성도들과 함께 감사의 제사에 참여되었음을 암시하는 말이 바로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라는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바울 자신이 감사의 제사를 드리는 일에 로마 교회 성도들을 제물로 가지고 하나님께 제사를 하겠다는 것을 나의 영으로 예배한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들의 복음 안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결국 바울이 나의 영으로 하는 예배는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예배하는 것인데 그것은 곧 자신이 로마 교회에 가고자 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로마 교회 성도들의 믿음으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며 끊임없이 하나님께 간구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뜻 안에서 로마에 가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그것을 13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


또 15:22에서도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막혔다’는 말을 수동태로 쓰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막으셨다는 뜻이다. 그러나 후에 바울 사도는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간다(행 25-28장). 바울은 이방인의 사도로서 로마뿐만 아니라 당시 땅끝으로 여겼던 서바나(스페인)까지 갈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으나(참고 롬 15:23) 그것은 바울의 생각에 의해서 되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의해서 되는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구한다고 하였다.


요한복음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사랑의 관계를 맺으시며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신 대목이 나온다.


18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젊어서는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19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요 21:18-19)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내가 내 의지를 가지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팔을 벌린 상태에서 남, 즉 예수 그리스도께서 띠를 띠우고 내가 원하는 곳이 아닌 주께서 원하시는 곳으로 이끌고 가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베드로뿐만 아니라 바울 역시 마찬가지이며 오늘날 바울과 함께 하나님의 복음에 사로잡힌 자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께서 끌고 가시는 데로 갈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성도라는 존재는 이제 더 이상 나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입은 자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요 하나님과 같이 거룩하게 된 자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바울 사도는 왜 그토록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만나고 싶어하는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내가 너희 보기를 간절히 원하는 것은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11절).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기 위하여 로마에 있는 성도들을 그토록 만나려고 한다는 것이다. “신령한 은사”(헬, 프뉴마티코스 카리스마) 란 무엇이며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준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 신령한 은사라고 하니까 우리는 병 고치는 은사나 예언, 방언 등과 같은 신기한 이적을 나타내는 은사 쪽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본문에서 말씀하는 신령한 은사란 그런 것이 아니다.


우리는 로마서 처음부터 무엇에 초점을 맞추어 말씀하고 있는가를 이미 상고했다. 그것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복음’이다. 로마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복음을 말씀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여기서 신령한 은사를 우리 마음대로 이해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측면에서 생각해야 한다. 바울의 관점은 복음을 믿고 믿음을 가지게 된 로마 교회의 성도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허락하시고 그것을 믿게 하신 주체자 하나님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10절)라고 하였던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좀더 나아가 15절에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한 마디로 바울은 로마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가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다”(13절)라고 하였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기를 기도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씀하는 “신령한 은사”란 복음을 의미한다. 로마서 5장과 6장에서도 이렇게 선포한다.


15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5-17)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롬 6:23)


그러면 왜 복음을 신령한 은사로 표현하였나? 4절에서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이 주어지는 근거를 성령께 두고 있다고 밝혔다. 이런 점에서 복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물이기 때문에 신령한 은사라고 쓰고 있다.


“나누어 주어”(헬, 메타디도미)라는 말은 ‘넘겨 주다’라는 말이다. 바울 사도는 복음을 넘겨 주고 흘려 주기 원해서 로마에 가려고 한다. 로마 교회의 성도들을 만나서 안수를 한다든지 아니면 특별한 기도를 해서 그들에게 신기한 능력을 행하는 은사를 주는 것이 아니라 복음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견고하게”(헬, 스테리조)라는 말은 ‘히스테미’(세우다)에서 유래된 단어이다. 즉 진리로 굳게 세워지게 한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것이 막혔다면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때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뜻에 의해 복음이 전해질 것이다. 하나님의 복음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바울은 “이는 곧 내가 너희 가운데서 너희와 나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피차 안위함을 얻으려 함이라”(12절)라고 하였다. “피차 안위함”이란 헬라어로 ‘쉼파라칼레오’라는 말인데 신약에 딱 한 번 나오는 단어이다. 수동태로 ‘함께 위로하다’, ‘같이 안위를 얻다’, ‘함께 격려하다’라는 뜻이다. 바울이 로마 교회 성도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뿐만 아니라 바울 자신도 위로를 얻고 격려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곧 같은 믿음인 것을 확인하고 하나님의 복음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을 서로 확인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계속해서 복음이 필요하다면 역시 바울 자신에게도 복음은 계속 필요한 것이었다. 한 번 복음을 알았기 때문에 복음은 이제 더 이상 필요하지 않고 뭔가 새로운 것이 있어야 되겠다는 것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므로 바울 자신이 나누어 주는 신령한 은사가 아니었다. 복음을 알게 된 로마의 교인들이 대단하다는 것이 아니다. 또한 반드시 바울 자신이 로마에 가야만 복음이 전해진다는 것도 아니었다. 확고히 하나님의 복음이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서게 한다는 사실을 서로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교회란 바로 이유 때문에 멀어도 모이고 모이기 어려운 상황이 될지라도 함께 모여서 서로에게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나누고 피차 그 은혜를 확인하기 위한 모임이어야 한다.


구원받았다고 하면서 계속해서 성경을 통해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그 마음은 자기를 무한히 다른 사람에게 과시하고 구원받았다는 더 나은 자아를 표출하고 싶은 것이다. 그것은 결국 자기 자신(自身)을 자기 자신(自神)으로 믿는 결과로 만들어지는 자기 신앙, 즉 자기 종교 생활에 불과하다. 10년을 믿었다느니 20년을 믿었다느니 모태 신앙이라느니 하는 이런 것들이 자랑거리가 될 수 없다. 성도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실제는 묵시를 살고 있기 때문이다(http://cafe.daum.net/joosung 20190428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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