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비유 강론 18
누가복음 15:1-7
잃은 양을 찾는 비유
신약성경은 사복음서부터 나온다. 왜 복음서가 네 개가 되어야 할까? 혹자는 이 사복음서를 동서남북 사방을 나타내는 것으로 보고 요한계시록의 네 생물과 관련지어 설명하려고 하기도 한다. 물론 사복음서가 성령의 감동에 의해 기록되어졌고 사복음서로 한정하여 신약성경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것 역시 철저한 하나님의 일하심이고 성령의 주도하에 이루어진 일임을 분명하다. 그러나 그것이 네 방위에 맞춘 것이라든지 사복음서가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네 생물과 연결지어야 할 성경적 근거가 그 어디에도 없는 억지 주장에 불과하다. 단지 네 개라는 것 외에는 공통점이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반복하여 여러 면으로 묘사하여 제시되고 있다는 것은 우리가 진리의 말씀을 그만큼 못 알아 먹는 존재라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복음서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다양하게 여러 면으로 계시하셨다는 것은 십자가에 의한 언약의 성취가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한 말씀이라는 의미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복음서 전체를 통해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신 뜻을 확인하고 또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비유나 이적, 말씀들이 비슷한 내용으로 나온다고 해서 무조건 같은 본문으로 생각하고 병행구절로 해석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서의 기록자들은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들을 단순히 시간적인 순서대로만 기록하려고 하지 않고 1차 독자를 각기 다 다르게 생각하고 그에 따른 본문을 적절히 배치하여 소개하면서 복음을 나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각 복음서들은 그 문맥 속에서 하나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신 의도를 생각하고 복음을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이다.
누가복음 15장에는 잃은 것에 대한 세 비유가 나온다. 이른 바 잃은 양을 찾는 비유,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 잃은 아들을 얻는 비유가 그것이다. 이는 단순히 같은 내용의 반복이 아니라 각 비유의 기본적인 가르침은 같다고 할 수 있지만 비유의 강조점은 차이가 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나눌 이 비유의 말씀은 마태복음 18장에도 기록되어 있는데 그 내용이 짧고 두 본문 사이에 몇 가지 차이점은 있지만 기본 내용은 별 차이가 없다. 마태복음에 나오는 비유를 보면 이렇게 되어 있다.
12너희 생각에는 어떠하냐 만일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가 길을 잃었으면 그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고 가서 길 잃은 양을 찾지 않겠느냐 13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찾으면 길을 잃지 아니한 아흔아홉 마리보다 이것을 더 기뻐하리라 14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2-14)
두 비유의 내용이 같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같은 관점으로 읽고 같은 교훈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비유를 해석할 때나 누가복음의 비유를 해석할 때나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죄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을 기뻐하시기 때문에 우리도 죄인들이 하나님께 돌아오도록 열심히 잃은 양을 찾는 전도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이해한다. 어떤 식으로든지 본문을 통해 자기 나름대로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은혜만 되면 그만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실 두 비유는 몇 가지 차이점이 있고 비유의 결론적인 가르침이 다르다.
본문에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동기를 보면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1-2절)라고 하였다. 마태복음에서의 비유는 제자들 사이에서 천국에서 누가 큰가라는 문제로 예수님께 물었을 때 답변하시기를 한 어린 아이를 불러 세우고 어린 아이들과 같이 되지 않으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고 하시며 어린 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것이 곧 나를 영접한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이 작은 자 중에 하나도 업신여기지 말라”(마 18:10)라고 하시며 잃은 양을 찾는 비유를 말씀하셨던 것이다. 즉 마태복음에서는 제자들을 대상으로 비유를 말씀하셨고 누가복음의 비유에서는 예수님이 죄인들을 영접하고 그들과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으로 시비를 거는 대적자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셨다는 점이다.
비유의 내용인즉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4-6절)라는 것이다. 양 백 마리에서 한 마리를 잃었다는 것이 마태복음의 비유와 같은 내용이지만 잃었다는 것을 표현하는 단어가 헬라어로 마태복음에서는 단지 길을 잃은 것을 의미하는 ‘플라나오’이지만 누가복음 본문에서는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를 의미하는 ‘아폴뤼미’로 쓰고 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마태는 아흔아홉 마리를 산에 두었다고 표현하였지만 누가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라고 하였는데 산에 둔다는 말은 다른 목자에게 맡겼다는 의미로 이해하여야 한다고 마태복음 강론을 할 때 말씀드렸다. 그런데 누가의 비유에서 “들에 두고”라는 표현은 단순히 들판에 둔다는 뜻이 아니라 헬라어로 ‘에레모스’라고 쓰고 있는데 이 말은 ‘광야에 완전히 버려진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은 아흔아홉 마리를 완전히 버려진 상태에 있는 그대로 두고 한 마리를 찾는 목자에게 초점을 가지고 말씀하셨다. 더구나 한 마리를 찾은 목자는 한 마리를 찾았을 때 아흔아홉 마리가 있는 양들에게 갔다고 하지 않고 집에서 와서 벗을 불러 잔치를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비유의 결론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절). 우리는 흔히 이 비유를 해석하면서 우리가 회개해야 하는 것으로 말하고 하나님께서는 죄인 한 사람이 돌아오는 것을 가장 기뻐하시는 분이라고 하면서 우리도 잃은 양을 찾아서 열심히 전도하자고 이해하는데 그렇게 된다면 실제 양이 양을 찾는 결론이 된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에게 잃은 양을 찾아 회개시켜서 하나님을 기뻐시게 하라는 명령을 주신 적이 없다. 오히려 이 비유를 통해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회개란 우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가는 것이라고 밝히셨다. 우리는 죄를 지었을 때 눈물 콧물 흘리며 손에 땀을 빼면서 통곡하는 기도를 하는 것을 회개로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는 회개는 그것이 아니라 잃은 양에게 목자가 찾아가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찾아오심이다. 다시 말해서 잃었던 양이 목자에게 찾아짐을 당하는 것을 회개라고 한다. 본문에서 “이와 같이”라고 표현한 의미는 바로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비유에서 잃은 양은 결코 자신이 잃어버린 줄로 모르고 있는 상태였다. 잃은 양이 스스로 길을 찾아서 목자를 향하거나 양의 우리를 향해 가고 있었다고 비유는 말하지 않고 있다. 그저 무리를 벗어나 따로 떨어져 있었을 뿐이다. 그러기에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가서 찾았고 찾은 이후에는 어깨에 메고 돌아왔다. 즉 목자가 찾는 행위만 있었고 찾아진 다음에는 그저 목자의 어깨에 메워져 돌아왔을 뿐이고 그것이 주인의 즐거움이 되었다. 누가는 바로 이것을 회개라고 하며 하나님의 기쁨이라고 표현하였다.
마태복음의 비유에서는 제자 공동체 안에서 잃어질 위험에 처한 작은 자에 대한 관심을 강조한 비유였다. “이와 같이 이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는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마 18:14)라고 한 것과 같이 이것이 하나님의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작은 자 중의 하나라도 잃어버리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인 이유는 그 작은 자 안에 진짜 작은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심어놓으셨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이러한 하나님의 관심, 아버지의 뜻에 함께 동참된 자이기에 어린 아이이며 작은 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천국을 보여 주는 것에만 온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의미로 잃은 양을 찾는 비유를 마태는 전하였지만 누가는 이방인들을 1차 독자로 삼고 있었기에 잃은 양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것으로 표현하여 하나님께서 직접 찾아오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것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천국이라는 뜻이다. 천국은 우리가 찾아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온 것이다.
예수님 당시의 세리와 죄인들이 그렇게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자들이라는 말씀이다. 세리와 죄인들이 누구에 의해 그렇게 버려졌는가? 현실적으로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며 유대교의 종교지도자들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마귀의 권세에 사로잡혀 있는 모든 죄인들의 상태를 나타내고 있다. 이 땅에 모든 죄인들은 양들과 같이 들, 즉 광야에 그렇게 버려진 상태에 있는 것과 같은 모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이 광야에 버려진 상태로 있다는 것을 자각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는 결코 광야에 버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가지고 잘 지켜서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자들은 결코 잃은 양이 아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목자가 되셔서 잃은 양을 찾으시듯이 아흔아홉을 광야에 그대로 두고 자기 백성들을 찾으시는 분이다. 광야란 시험이 주어지는 장소로 상징되고(신 8:2), 그 광야에서 예수님은 마귀의 시험을 받으셨다(눅 4:1-13). 그러므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은 그 광야에서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 있으면서도 자기가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줄도 모르는 자기 백성을 찾아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 19:10)
31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32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찾아오심의 절정을 보여 주는 것이 십자가이다. 결국 우리가 주님의 찾으심을 당하였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성취하신 그 십자가 안에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우리 자신이 잃은 양이라는 것을 아는 자가 되었고 목자의 계속적인 찾아오심의 은혜만 절실히 필요함을 고백하는 자가 되었다. 이런 점에서 시편 기록자가 고백하며 찬송한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고백이고 찬송이어야 한다.
174여호와여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사오며 주의 율법을 즐거워하나이다 175내 영혼을 살게 하소서 그리하시면 주를 찬송하리이다 주의 규례들이 나를 돕게 하소서 176잃은 양 같이 내가 방황하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 내가 주의 계명들을 잊지 아니함이니이다(시 119:174-176)
(20181216 강론/김영대).✞
비유18. 눅 1501-07 잃은 양을 찾는 비유.pdf
'●──── 주제 강론 > 예수님의 비유'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15:11-32 잃은 아들을 얻는 비유 (0) | 2019.01.14 |
---|---|
누가복음 15:8-10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 (0) | 2018.12.24 |
누가복음 13:6-9 포도원의 무화과나무 비유 (0) | 2018.12.03 |
마가복음 4:26-29 씨가 뿌려진 땅의 비유 (0) | 2018.11.25 |
누가복음 10:25-37 사마리아 사람 비유 (0) | 2018.11.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