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비유

누가복음 13:6-9 포도원의 무화과나무 비유

불편한 진리 2018. 12. 3. 14:02


 ❊ 예수님의 비유 강론


누가복음 13:6-9
포도원의 무화과나무 비유


흔히 이런 말을 교인들이 많이 한다. “회개하고 예수 믿으라” 또는 “회개해야 천국 간다”라고 말이다. 회개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믿어지는가? 또 회개하면 천국 갈 수 있는 것인가? 만약 이것이 논리적인 것이라면 회개가 천국가는 조건이 된다. 회개란 우리가 예수님을 믿겠다고 울면서 죄를 자복하는 것을 회개라고 하지 않고 하나님의 찾아오심을 회개라고 한다. 좀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하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로 죽었던 자기 백성을 찾아오신 사건이 회개이다(눅 15:7,10,32). 결국 성경에서 말씀하는 회개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찾아짐, 살려짐을 받게 된 것을 의미한다.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심의 결과로 내게서 죄가 보이고 그 죄로 인해 애통해 하며 날마다 진리의 말씀을 추구하는 자로 살아지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러한 오해는 오늘날만 그런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도 오해하였다.



오늘 우리가 나누고자 하는 ‘포도원의 무화과나무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기록된 비유인데 그 문맥을 보면 1절에 “그 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그들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께 아뢰니”라고 하였다. 우리가 보는 개역개정성경만 보면 무슨 뜻인지 알기가 어려운데 새번역성경에는 “바로 그 때에 몇몇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해서 그 피를 그들이 바치려던 희생제물에 섞었다는 사실을 예수께 일러드렸다”라고 번역하였고 쉬운성경을 보면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을 죽여 그 피가 저희의 드릴 희생 제물과 뒤범벅이 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라고 번역하고 있어서 그 의미를 잘 알 수 있다.
그러면 그들이 이 사건을 예수님께 알린 의도가 무엇일까?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그 의도를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의도를 이미 간파하고 답변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대답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으므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2절)라는 것이었다. 즉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생각은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 총독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 당한 것은 그들이 죄가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다시 말해서 빌라도에 의해 죽은 자들은 죄가 많아서 지금 그렇게 죽었고 자신들은 죄가 없어서 지금 죽지 않고 있다는 논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른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라고 물으신 것이다. 지금 죽지 않고 있다는 것은 결코 죄가 없기 때문에 죽지 않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어서 예수님께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3절). 여기서 ‘망한다’는 표현은 단순히 스스로 망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외부적인 힘에 의해 멸망을 당한다는 의미이다. 또한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는 말씀은 회개가 살아날 수 있는 조건이 된다는 말씀이 아니다. 회개를 잘하면 살아 남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지금 회개의 기회가 주어져 있다는 뜻이다.
갈릴리 사람들이 성전 제사에 참여하였다가 빌라도에 의해 죽임을 당한 것은 죄가 많아서 죽임을 당한 것이 아니며 또한 회개하지 않아서 멸망당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더 분명히 하시기 위해 예수님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한 사건을 실례를 들어서 말씀하신다. “또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열여덟 사람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4절). 이제 예수님은 더욱 확대하여 예루살렘 사람이 죽은 것에 대하여 언급함으로 성전 제사에 참여하였다가 죽은 갈릴리 사람들뿐만 아니라 모든 갈릴리 사람 그리고 예루살렘 사람 또한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이 다 동일한 죄인임을 드러내신다. 이런 점에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5절)라는 말씀을 다시 한 번 더 강조하신다.


그러므로 죽게 되는 것이 인간 편의 어떤 행동에 따른 조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죄를 심판하신다는 차원이라는 것이다. 결국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종말론적 심판이 갈릴리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 사람들에게 그리고 더욱 폭 넓게는 이 땅의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다는 것을 강조하신다. 갈릴리 사람이나 예루살렘 사람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이 땅의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망하게 되고 죽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예수님의 이 말씀을 들은 무리들 중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성전 제사에서 죽은 갈릴리 사람들,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예루살렘 사람들은 왜 죽었고 자신들은 왜 지금 당장 죽지 않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다. 왜 지금 당장 이 무리들에게도 심판이 임하지 않는가 하는 의문에 대한 답변으로 예수님께서는 포도원의 무화과나무 비유를 말씀하신다.
“이에 비유로 말씀하시되 한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6-7절).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고 하였다. 유대땅에 많은 나무가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감람(올리브)나무이기에 성경에서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것으로 표현된다(왕상 4:25, 미 4:4, 슥 3:10, 렘 11:16, 합 3:17). 이 나무들 중에서 유대인들에게 무화과나무는 포도나무보다 훨씬 가치가 떨어지는 흔한 나무이기에 따로 과수원에 두고 관리하지 않아도 잘 성장하는 나무였다. 그러기에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는 바보같은 주인은 없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포도원의 한 쪽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는 의미로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율법에 “네 포도원에 두 종자를 섞어 뿌리지 말라 그리하면 네가 뿌린 씨의 열매와 포도원의 소산을 다 빼앗길까 하노라”(신 22:9)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었다는 말씀은 포도나무가 실패하였다는 것을 전제한 것이었다. 이는 이미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땅을 파서 돌을 제하고 극상품 포도나무를 심었도다 그 중에 망대를 세웠고 또 그 안에 술틀을 팠도다 좋은 포도 맺기를 바랐더니 들포도를 맺었도다”(사 5:2)라고 선언하였었다. 그래서 바벨론에 포로가 될 것을 포도원이 황폐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사 5:3-7). 이스라엘의 실상을 이 비유로 폭로하고 계신다. 그런데 무화과나무를 심어 삼 년을 열매를 얻지 못했다고 하였는데 이는 레위기 19장을 배경으로 하신 말씀이다.

23너희가 그 땅에 들어가 각종 과목을 심거든 그 열매는 아직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기되 곧 삼 년 동안 너희는 그것을 할례 받지 못한 것으로 여겨 먹지 말 것이요 24넷째 해에는 그 모든 과실이 거룩하니 여호와께 드려 찬송할 것이며 25다섯째 해에는 그 열매를 먹을지니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 소산이 풍성하리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 19:23-25)


출애굽한 이스라엘이 언약의 땅에 들어가 과목을 심으면 삼 년 동안은 할례 받지 못한 것이기에 먹을 수 없는 것이었다. 할례란 본래 남자 생식기의 포피를 잘라내어 인간의 혈통이 잘려진 거기에 하나님의 언약을 담아 언약의 후손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신명기 30:5에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과 네 자손의 마음에 할례를 베푸사 너로 마음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게 하사 너로 생명을 얻게 하실 것이며”라고 하여 본래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율법적 행위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할례를 말씀하신 의도는 마음의 할례를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으로 이루실 것을 말씀하신 것이었다. 그러므로 비유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무화과나무의 상태는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한 상태가 아니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스라엘은 마음의 할례가 아니라 율법적인 행위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하였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철두철미한 율법지키기로 자기 의를 쌓고 있었다. 오늘날도 우리는 이 비유를 통해 전도의 열매, 삶의 열매 등으로 생각하고 열매를 맺기 위해 열심을 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본 비유에서 주인이 요구한 열매가 아니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시면서 이 비유를 통해 무화과나무로 상징되는 이스라엘이 주인이 요구하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존재라고 고발하신다. 그렇다면 주인이 원하는 열매는 무엇인가? 우선 본문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내용을 찬찬히 살펴보자.


예수님께서 비유의 결론을 포도원지기의 대답으로 이렇게 말씀하신다. “대답하여 이르되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 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하였다 하시니라”(8-9절). “금년에도”라고 하였는데 금년이 마지막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 다음해도 또 열매가 없으면 포도원지기는 계속 그렇게 요구할 것이지만 언젠가 그 기한이 다하면 나무를 찍어버리는 때가 올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대로 두소서”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피에미’라는 말인데 ‘그대로 두다’, ‘용서하다’라는 뜻인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에 똑같이 드러난다.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사하여 주옵소서”라는 말씀이 바로 ‘아피에미’이다. 즉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는 열매를 맺을 수 없는 죄인들을 대신하여 예수님께서 자신의 십자가로 온전한 열매로 드려 죄인들을 심판하지 말고 그대로 두시며 용서를 구하신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포도원지기”가 누구인가? 포도원지기는 헬라어로 ‘암펠룰고스’라는 말인데 ‘포도원’이라는 ‘암펠로스’와 ‘행위’, ‘일’ 또는 ‘수고’라는 말의 ‘에르곤’의 합성어이다. 즉 포도원을 위해 수고하는 자, 포도원의 일을 하는 자를 말한다. 그렇다면 포도원이라는 자기 언약 백성들을 위해 일하는 자는 십자가에서 그대로 두소서, 사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하셨던 예수 그리스도를 나타내고 있다. 이사야 선지자도 이렇게 나타낸 적이 있다.


나 여호와는 포도원지기가 됨이여 때때로 물을 주며 밤낮으로 간수하여 아무든지 이를 해치지 못하게 하리로다(사 27:3)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셔서 본 비유를 통해 자신을 포도원지기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을 나타내고 계신다. 하나님이신 그분이 오셨기에 포도원지기는 주인이 어떤 열매를 원하는지 분명히 알았다. 결국 하나님이 원하셨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열매이고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예수 그리스도라는 열매만 인정하고 받으시는 것이 하나님 나라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여기 “일하시니”라는 말이 바로 ‘일’, ‘수고’라는 ‘에르곤’을 동사로 표현한 말이 “에르가조마이”라는 말이다. 하나님 아버지의 일하심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속 십자가로 나타내고 계시는 것이 주님의 일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율법적 행위에 의한 열매를 원하시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신 그 일하심의 열매로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오늘도 우리가 죄의 권세에 매여 죄만 행하고 있는 우리들에게 죄에 대한 심판이 당장 떨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순전히 십자가 은혜로 인한 것이다(http://cafe.daum.net/joosung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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