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비유 강론 20
누가복음 15:11-32
잃은 아들을 얻는 비유
누가복음 15장의 세 비유를 통해 본문에서 회개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앞의 두 비유를 통해 살펴 보았다. 그래서 3절의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 비유로 이르시되”라는 말씀에서 비유를 단수로 쓰고 있다는 것은 본문의 세 비유의 핵심적인 의미는 하나라는 뜻에서 하나의 비유라고 표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두 비유의 결론을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7절),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0절)라는 것으로 회개를 말씀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찾아 오심이라는 의미로 이해하였다면 이 세 번째 비유에서는 어떻게 이해되어야 하느냐 하는 문제이다.
왜냐하면 앞의 두 비유에서는 분명 목자나 여자가 찾아내는 것인데 반해 세 번째 비유에서는 아들이 자기 발로 돌아왔다는 것 때문에 회개에 대한 의미를 달리 받아들여야 한다는 문제가 제기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세 번째 비유에서 회개에 대한 의미를 달리 이해하여야 한다면 결국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원리가 달라지는 문제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결코 이 세 비유를 통해 다른 의미로 말씀하셨다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다.
사실 본 비유에 대한 해석들이 다양하다보니 비유의 초점이 아버지 혹은 작은 아들 아니면 큰 아들에게 있느냐 그렇지 않다면 아버지와 두 아들에게 다 초점을 가져야 하느냐로 역사적으로 많은 해석들이 있어 왔다. 그렇다면 잃은 아들을 얻는 비유를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모든 비유는 천국 비유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의도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 본문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본문을 차근차근 살펴보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일 것이다.
비유의 내용인즉 어떤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에게 재산 분배를 요청하였다. 율법에 의하면 재산 상속시 장자에게 삼분의 이를, 차자에게는 삼분의 일을 주는데(신 21:15-17) 주로 아버지가 죽은 후에 이루어지나 본문에서는 아들들에게 각각 나누어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다시 말해서 아버지는 어떤 의도가 있어서 재산을 나누어 주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런데 둘째 아들은 자신의 재산을 가지고 가서 비참하게 몰락하고 말았다. 유대인들에게는 부정한 동물로 분류되기 때문에 주로 이방인들이 사육하는 돼지를 치는 자리에까지 이르렀다고 언급한다.
돼지들이 먹는 쥐엄 열매를 먹고자 하였으나 그것조차도 주는 이가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더구나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14절)라는 말씀은 둘째 아들은 완전히 부정하며 더럽고 비참한 자리에까지 이르렀다는 의미이다.
또한 그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18,21절)라고 표현한 것을 볼 때 유대 종교적 관점에서도 방탕한 생활을 하였다는 것이다. 둘째 아들은 아버지와 유대 동족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해 아버지와 유대 동족으로부터 떠났으나 그 결과 자유가 주어지기는커녕 오히려 수치스러운 이방인과 죄의 종이 되는 모습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한 가지 확인해야 하는 것은 이 둘째 아들이 집으로 돌아가고자 결정한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작은 아들이 돌아온 동기가 아버지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였으며 그 아버지의 사랑을 자신이 외면하였다든지 하는 내용은 본문에서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아들은 아버지의 사랑이 그리워 집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것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17절에 보면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17절)라고 한 것을 보면 마침내 굶어 죽는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 아버지의 집으로 가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사랑을 알고 돌아가기로 한 것이 아니었다.
심지어 이 아들은 아버지의 집으로 갔을 때 할 말을 연습까지 하였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18-19절).
그러나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을 때에 아버지는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20-22절)라고 하였는데 아들이 말을 다 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아들이 더 이상 말 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그리고는 “제일 좋은 옷”을 입혔다고 하였는데 이는 아버지의 옷을 입혔다는 말이다. 즉 종의 신분이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신분의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아버지는 잔치를 벌이면서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라고 선언한다. 그리고 “그들이 즐거워하더라”(23-24절)라고 하였다. 이런 점에서 둘째 아들은 자기 발로 집에 돌아온 것이 아니라 잃었던 상태였고 그것은 곧 죽은 상태에 있는 것이었다.
이제 비유의 후반부는 밭에서 돌아온 큰 아들에게 초점이 맞추어지고 있다. 밭에서 돌아온 큰 아들은 시끌벅적한 집의 분위기를 종을 통해서 듣고 집에 들어가기를 거절한다. 이 부분은 허랑방탕하였던 둘째 아들과 첨예하게 대조되어 나타나고 있다.
밭에서 돌아온 큰 아들의 모습은 둘째 아들이 이방 땅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는 동안 가문의 기업인 밭에서 땀 흘려 일했다는 인상을 풍기고 있다. 큰 아들이 집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것은 아버지의 잔치 배설 그 자체를 부정하는 행위요 동시에 집에 돌아온 자기 동생을 거부하는 행위이며, 나아가서 잔치에 참석한 모든 사람들을 거부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아버지와 함께, 돌아온 아들과 함께, 그리고 동네 사람들과 함께 잔치 식탁을 같이할 수 없다고 거부하는 것은, 마치 일찍이 둘째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생활할 수 없다고 간주하면서 재산을 가지고 먼 이방인의 땅으로 떠난 것과 전혀 다를 바가 없는 행위였다. 아버지의 권위에 대한 도전행위이고 동시에 잔치에 참여한 자들 앞에 아버지에게 엄청난 수치와 모욕을 안겨주는 행위였다.
어쩌면 아버지가 재산을 상속하여 주었을 때 큰 아들이 받은 모든 재산은 지금 아버지와 함께 공유하고 있었다는 측면에서 보자면 큰 아들이 화가난 이유는 자기 재산으로 작은 아들에게 베풀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자신은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29절)라고 하였는데 “섬겨”(헬, 듈류오)라는 말은 종으로 섬겼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었다. 이 큰 아들은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아버지께는 자기 것이 없는 종의 상태였다고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모습이고 또한 모든 죄인들의 실상이다.
뿐만 아니라 큰 아들은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30절)라고 하였는데 이 말씀을 직역하면 ‘당신의 삶을 창녀들과 함께 소진하였다’라는 말이다.
큰 아들이 아버지를 향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둘째 아들이 나간 것으로 인해 아버지의 삶이 다 망가지지 않았느냐’, 즉 ‘나간 아들이 당신의 삶을 다 망쳐 놓았음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살진 송아지를 잡았느냐?’라는 뜻으로 둘째와 아버지에 대한 원망을 다 쏟아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자신의 체면에 개의치 않고 앞서 돌아온 둘째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갔던 것과 같이 이제 아버지는 다시 큰 아들을 맞이하기 위해 집 밖으로 나갔다.
아버지가 동네 사람들이 모여있는 잔치 자리를 떠나 큰 아들을 달래기 위해 친히 집 밖으로 나왔다는 것은 당시의 유대적 상황으로 보았을 때에 상상하기 힘든 예외적인 행동이었다. 이렇게 함으로 아버지는 큰 아들이나 둘째 아들이나 그들을 대하는 방식에 있어서 결코 차이가 없다는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예수님은 더 이상 이 비유의 내용을 진전시키지 않으시고 비유의 결론을 내리는 말씀을 하셨다. 더 이상의 다른 결론이나 예수님의 가르침이 없다. 오히려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해야 하지 않겠느냐?’라는 물음으로 끝맺고 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31-32절).
그렇다면 과연 큰 아들이 잔치에 참여하게 되었을까? 그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님께서 15장에서 세 가지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동기를 다시 살펴볼 필요성이 있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하더라”(1-2절).
본 비유에서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은 큰 아들과 작은 아들의 태도이다. 작은 아들은 집을 떠날 때에 아버지의 마음을 극도로 상하게 하였으나 돌아올 때에는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다’는 죄의 인식을 가지고 집으로 들어왔다. 반면에 큰 아들은 밭에서 집 가까이 오면 올수록 아버지에 대한 분노와 원망을 강하게 가지고 있었고, 자신을 위해서는 염소 새끼 한 마리도 주지 않은 인색한 아버지로 단정짓고 있었다.
이러한 유대인들의 모습은 두 아들이 동일하게 아버지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 도전하는 죄인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 준다고 하겠다. 비유에 등장하는 아버지는 분명 지상의 아버지임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이고 예외적인 행동을 통하여 두 아들에 대한 사랑을 표현한 지상의 아버지 그 이상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단순히 이 비유가 아버지에 대한 사랑을 보여 준다고만 생각할 것이 아니라 그러한 아버지의 모습을 누가 보여 주고 있는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야 된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사역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에서 언약으로 말씀하셨던 여호와 그분이 아버지시며 그 아버지를 보여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이었다.
그러나 여호와여, 이제 주는 우리 아버지시니이다 우리는 진흙이요 주는 토기장이시니 우리는 다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이니이다(사 64:8)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또 알게 하리니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요 17:26)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세리와 죄인들뿐만 아니라 자신을 비난하고 시기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도 동일하게 아버지가 누구이시며 어떤 분이신가를 보여주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기존에 유대인들이 알고 있는 아버지에 대한 관념을 깨뜨리심과 동시에 이방인들에게는 아버지가 어떤 분이신가를 알려주시는 것이 예수님의 사역이었다. 즉 하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잃은 아들, 죽은 자에게 찾아오신 것이 천국이다. 이것이 이 비유의 핵심이다.
예수님께서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라고 말씀하신 것은 내 아버지와 너의 아버지를 구분하신 것이었다. 이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고 그 아버지의 사랑 안에 거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이다(http://cafe.daum.net/joosung 20190113, 강론/김영대).✞
비유20. 눅 1511-32 잃은 아들을 얻는 비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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