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비유

누가복음 10:25-37 사마리아 사람 비유

불편한 진리 2018. 11. 19. 15:39

❊ 예수님의 비유 강론

누가복음 10:25-37
사마리아 사람 비유


본문은 소위 말하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로 알려진 누가복음만의 비유이다. ‘선한’이라는 의미는 사람들이 붙인 것이고 본문에서는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라고만 나온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시게 된 동기가 25절에 나와 있는데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물었기 때문에 말씀하시게 된 비유이다. 율법교사는 영생을 얻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이렇게 모든 인간은 구원을 얻기 위해 신에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로 고민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시험하기까지 하는 죄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모든 비유는 천국 비유로써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감추고 또한 드러내신다. 예수님께서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언약 백성들에게는 천국을 더욱 분명히 깨닫도록 하시기 위해서이고 동시에 언약 백성이 아닌 자들에게는 천국의 비밀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이 두 가지가 모순되는 것 같지만 결코 모순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에는 구원과 심판이 동시에 드러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비유를 통해 언약 백성과 비언약 백성을 구분해 내신다는 의미이다.
흔히 말하듯이 이 비유는 이웃에게 자비를 베풀어 전도하라는 가르침으로 생각할 수 있는 비유가 아니다. 이 비유에 대한 설교를 인터넷에 찾아 보면 이웃에게, 원수에게 자비를 베풀자는 설교가 많은데 사실은 우리가 자비를 베푸는 이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전제한 말씀한다. 따라서 이 비유 역시 하나님 나라의 비유라는 관점에서 보자면 우리가 무엇을 행하여야 하는 교훈 정도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천국의 비밀을 나타내고 말씀한 비유라는 것을 먼저 기억해야 한다.
율법교사의 물음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오히려 질문으로 이어진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26절). 이에 율법교사는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27절)라는 것이라고 답변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28절)라고 말씀하셨다. 율법교사는 애초부터 예수님을 시험하려는 목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의 말씀과는 어긋난 것이라는 꼬투리를 잡으려는 마음으로 질문한 것이기에 자기 자신을 드러내는 질문을 의도적으로 하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29절).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교사의 물음에 대한 대답으로 비유를 말씀하신다. 즉 이 비유는 영생에 대한 것과 이웃에 대해 말씀하신 비유이다. 내용인즉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 거의 죽은 상태가 되었다. 그때에 제사장, 레위인이 그 길을 지나면서 상황을 보고 피하여 갔으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를 불쌍히 여겨 우선 응급 치료를 하고는 주막에 데리고 가서 돌보다가 다음날이 되어서야 주막 주인에게 돈을 주며 강도 만난 자를 보호해 줄 것을 요청하며 자기 길을 떠났다는 것이다.’ 비유를 말씀하신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절)라고 물으셨다.
예수님의 물음은 율법교사의 죄성을 지적하시며 주신 말씀이다. 왜냐하면 율법교사는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한 목적으로 질문하였을 뿐만 아니라 자기를 의롭게 보이기 위하여 질문하였기 때문이다. 율법교사의 죄성은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25절)라는 물음과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29절)라는 물음 속에 잘 드러나 있다. 율법교사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하나님을 섬기고 있었다. 자신이 무엇을 행하여 영생을 쟁취하려고 하였다. 그러기 때문에 율법교사는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이웃을 생각하고 있으나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 사람을 이웃으로 말씀하신다. 그래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물으셨을 때 율법사는 사마리아인이라고 말하지 못하고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37절)라고만 대답하였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사마리아 사람은 개와 같은 이방인이었기에 사마리아 사람을 이웃으로 표현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36절)라고 물으심으로 자신을 중심에 두고 누가 내 이웃인가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 아니라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는가 하는 관심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강도 만난 자는 죽은 상태에서 제사장, 율법교사, 레위인들을 비롯한 모든 유대인들이 이방인으로 취급하는 사마리아 사람에 의해 살아난다. 사마리아 사람만 강도 만나 죽은 상태가 된 자를 불쌍히 여긴 자이다. 따라서 이웃이란 강도 만난 자를 무시하는 자가 아니라 자비를 베푼 자이다.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통해 말씀하고자 하신 것은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존재가 바로 지금 율법교사 앞에 서 계신 예수님 자신이라는 뜻이다.
죄인을 불쌍히 여겨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자는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다시 말해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는 물음에 사마리아 사람의 이웃이 될 수 있다고 답변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기에 종교기득권자나 유대인들에 의해 이방인과 같이 취급당하는 예수님 자신이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존재로 자비를 베풀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이웃은 언제나 복수가 아니라 단수로 표현되는데 그 한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사람들은 율법교사와 같이 이 땅에서 자기 행위로 무엇을 이루어 영생을 얻으려고 하나님을 섬기는 존재이다. 그것을 제사장과 레위인이 지나가지만 강도 만난 자를 살리지 못하는 것을 통해 그들이 행하는 율법으로는 죽은 자를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암시하셨다. 그러기에 철저히 자기 자신을 중심으로 이웃을 생각하는 이기적인 율법적인 죄인들은 강도를 만나 죽은 자가 같은 존재이며, 그 죽은 자를 살리시기 위하여 진짜 이웃이 되시려고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 이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들에게 자비를 베풀며 섬기셨다. 그러므로 강도 만난 자의 상태와 같은 비참한 상태, 곧 죽은 자와 같은 죄인들의 이웃이 될 수 있어 자비를 베풀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밖에 없다. 예수님 외에 이 땅에 어떤 자도 심지어 율법으로도 스스로 죄 문제를 해결하고 이웃이 되어 섬길 수 있는 자는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폭로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비유를 들었을 때에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37절)라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내가 무엇을 행하려고 한다면 이 비유를 잘못 이해한 것이다. 오히려 이 비유를 통해 자비를 베푼 자가 예수님으로 보이고 그분만이 자비를 베푸실 수 있는 분으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결국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는 말씀은 우리에게 율법의 말씀을 지켜서 선한 행위를 하여 영생을 쟁취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너도 이와 같이 해 보라 참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라는 물음으로 받아들여져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자비를 베풀고 자기 백성들을 섬길 수 있는 유일한 분으로 믿느냐 하는 말씀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영생’이라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으로 나타내신 영생은 우리의 종교적인 행위로 하나님을 찾아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자비를 베푸시는 분이 찾아 오셔서 살려 주셔야 되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범사에 종교성이 많은 아덴 사람들을 향해 바울 사도가 외친 것이 바로 이런 말씀이었다.

24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행 17:24-25)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사람의 손에 의해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다. 친히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주시는 분이다. 어떻게 주셨는가? 그것을 마가복음에서 분명하게 이렇게 말씀한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 10:45)


예수님은 죄 가운데서 죄의 지배를 받고 있는 자기 백성들을 섬기기 위해 오셨다. 그분이 무엇으로 어떻게 죄인들을 섬기셨나? 십자가에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주심으로 섬기셨다. 그러므로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심의 절정은 십자가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내가 바로 강도 만나 죽은 자라는 것이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가 교회를 위해서 또 다른 사람들을 위해 어설픈 봉사를 하면서 그것을 섬긴다고 말하기도 하고 또 어떤 교회에 보면 주보에 목사, 부교역자, 장로, 권사, 성가대장을 비롯한 지휘자, 반주자 이름을 올려 놓은 곳에 “교회를 위해 섬기는 자”라는 제목을 붙인 것을 본다. 이런 것을 우리는 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이런 것들은 가짜 섬김이다. 그런 것으로 예수님께서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놓으신 섬김 앞에 들이대지 말라! 진짜 섬김은 자기 목숨을 대속물로 내어 놓는 것이다. 우리 중에 누가 이런 섬김을 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 외에 이 땅에 어떤 자도 이런 섬김을 이룰 수 있는 자는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비유에 이어진 38-42절의 말씀을 보면 예수니께서 마르다의 집에 초대받아 가셨는데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분주하였지만 동생 마리아는 예수님의 발 아래 앉아 말씀을 듣고 있었다. 마르다는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마리아로 인해 불평을 하자 예수님께서 “마르다야 마르다야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하나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41-42절)라고 말씀하셨다. 일반적으로 이 말씀을 오해하여 봉사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으로 해석하고 목사의 설교를 잘 들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누가가 사마리아 사람 비유와 연결하여 마르다의 집에 유하신 것을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마르다의 죄성을 지적하며 동시에 예수님 자신이 자비를 베풀고 십자가로 섬기러 오셨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마르다가 “준비하는 일”이라고 하였는데 헬라어로 보자면 ‘봉사하는 일’이라는 뜻이다. 즉 마르다는 예수님께 봉사하며 섬기고자 분주하게 움직였다. 마르다는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가를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그것은 곧 율법교사의 생각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마리아에게 말씀으로 자비를 베풀고 계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하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는 말씀은 마리아가 좋은 편을 택하였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택하셨기에 좋은 편에서 주님의 섬김을 받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결코 빼앗길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게 되는 것은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을 선택한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계시를 주신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2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것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아는 자가 없나이다 하시고(눅 10:22)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드러내시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고 그것은 오직 죽은 자를 살리는 자비와 긍휼을 베푸시는 것이라는 의미이다(http://cafe.daum.net/joosung 강론/김영대).✞



비유. 눅 1025-37 사마리아 사람 비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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