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님의 비유 강론
누가복음 15:8-10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것은 나의 죽음을 의미한다. 십자가는 통과하는 관문이 아니라 내 삶의 종결의 자리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 전의 나는 죽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새롭게 사는 것을 생명이라고 한다. 바울 사도의 표현대로 하자면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에 의해 사는 것이다(갈 2:20).
따라서 십자가를 통과해서 무엇을 할 것인가 하는 물음은 있을 수 없다. 십자가에 죽으면 다시 살려 주실 것이기 때문에 그 다음에 내가 다시 살아서 주를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우리의 죄성에서 나오는 꼼수에 불과하다. 십자가 이후의 그런 나는 없다.
‘잃은 양을 찾는 비유’를 통해 우리가 잃은 양임을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찾으러 오실 것이라는 말씀으로 이해한다면 그것 역시 십자가를 내가 다시 사는 것에 이용하려는 것과 동일한 것이다. 앞의 비유에서도 보았듯이 우리는 영원히 잃은 양임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 자여야 한다.
자신이 잃은 양임을 아는 자가 주님의 찾아오심의 은혜를 입은 자이며,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늘 고백하는 자가 의인이며, 자신은 십자가에 철저히 죽은 자임 아는 자가 부활의 세계에 사는 자이다. 환언하자면 심령이 가난한 자로 항상 애통해 하며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로 사는 것이 천국을 누리는 자이다.
예수님은 잃은 양을 찾는 비유에 이어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를 말씀하신다. 비유의 내용인즉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또 찾아낸즉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8-9절)라는 것이었다.
예수님 당시의 “드라크마”는 헬라 화폐의 은전이었는데 성인 남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로마의 화폐 ‘데나리온’과 동일한 가치를 지니는 것이었지만 이를 단순히 경제적 가치만으로 평가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열 드라크마”는 보통 한 세트로 이루어져서 결혼을 약속함으로 남자가 주는 일종의 증표였기에 여자에게는 굉장히 소중한 것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여자는 찾을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찾는 것이었다.
본 비유를 해석함에 있어서도 우리는 비유에 언급된 여러 요소들 예컨대 여자, 열 드라크마, 집, 등불 등 많은 것들에 영적인 해석을 갖다 붙이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그러나 이런 것에 우리의 관심을 빼앗기다보면 정작 비유의 핵심을 놓치기 쉬우므로 특별히 성경적인 근거가 없다면 영적인 해석을 갖다 붙이기보다는 전체적인 흐름 속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고자 하신 비유의 결론에 관심을 갖고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 할 것이다.
여기에 등불이 등장하는 것도 유대 서민들의 집은 중동의 흙바람 때문에 창문이 없거나 환기를 위한 조그만 창문 정도가 전부이기 때문에 낮에도 물건을 찾으려면 등불을 이용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며 오히려 등불이 동원되었다는 것은 여자가 적극적으로 끝까지 부지런히 포기하지 않고 찾았다는 행위를 나타내는 것이다.
결국 여자가 한 드라크마를 찾았을 때 벗과 이웃을 불러 함께 즐기는 것으로 비유는 마무리된다. 그런데 여기 9절에 언급된 “벗과 이웃”은 앞의 비유 6절에서 표현된 “벗과 이웃”과는 다르다. 잃은 양을 찾는 비유에서 벗과 이웃들은 모두 남성 명사 복수로 사용되어 그들이 남자들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여기서 벗과 이웃은 모두 여성 명사 복수로 사용하여 이 잔치는 여자들만의 잔치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에 남자 중심의 사회 생활에서 여자들만의 잔치가 어떻게 가능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일차 독자를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기록한 누가는 이것이 현실적으로 합당한가 아닌가 하는 문제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유대 사회에서 소외된 여자들(과부, 어린 아이, 가난한 자들)을 언급함으로 바로 그들이 하나님 나라 언약 백성의 대상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누가는 많은 사건들 속에서 여자들을 의도적으로 많이 언급하는데 예컨대 1장에서 마리아와 사가랴의 아내 엘리사벳. 2장에서는 안나 선지자, 7장에서는 나인성 과부와 향유를 부은 여자, 8장에서는 혈루증 여자, 18장의 비유에서는 불의한 재판장에 대비된 과부, 21장에서는 두 렙돈의 과부,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의 현장에 목격자들도 여자들이라고 언급한다).
이런 점에서 본 비유에 나타난 여자들의 잔치는 하나님 나라를 잔치로 표현한 그 속성을 잘 드러내 준다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잔치들이 남성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을 감안한다면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소외되고 밀쳐냄을 당한 약자들을 대표적으로 암시하는 여자들의 잔치를 통해 하나님의 기쁨을 드러내고 있다. 즉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가난한 자, 병신들, 세리와 죄인들이 참여하는 잔치이다. 누가는 여인들만의 잔치를 통해서 세상의 잔치와 전혀 다른 하나님 나라의 특성을 나타내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비유의 결론을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10절). 비유의 결론이 앞에서 보았던 ‘잃은 양을 찾는 비유’에서 말씀하셨던 것과 거의 흡사하다. 아니 기본적인 내용은 동일하다.
목자가 양을 찾았을 때 잃은 양이 어떤 모습으로 있었는가 말씀하지 않았다. 다만 아흔아홉 마리와 같이 광야에 완전히 버려진 상태였지만 아흔아홉 마리의 양은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자들이지만 그 아흔아홉에서 떨어져 나가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한 마리의 양을 죄인으로 보시고 그가 바로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된 것을 보여 주시기 위하여 벗과 이웃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통해 주님의 찾아오심의 은혜, 곧 천국을 나타내신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제 그 잃은 상태를 양의 모습에서 무생물의 은전 드라크마로 옮겨 말씀하셨다. 잃은 한 드라크마는 결코 발견되기 좋은 자리에 있었다든지 아니면 여자가 찾기 쉬운 자리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저 잃어 버려져 완벽하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음을 나타낸다.
잃은 양을 찾는 비유에서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갔다고 하였지만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에서는 아홉 드라크마를 버려둔 상태의 의미는 없다. 그렇다고해서 열 드라크마에서 하나를 잃었기 때문에 그 하나의 가치가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열이라는 완전함을 잃은 것으로 채우는 것을 통해 잃은 것으로 채워지는 완전한 하나님 나라를 설명하신다.
예수님은 이 비유에서도 “이와 같이”라는 표현으로 잃은 은전에 대한 것을 자연스럽게 한 사람의 회개한 것으로 말씀하신다. 누가복음 5:27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 레위와 함께 먹고 마시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죄인들과 함께 한다고 비방을 하였다.
이에 예수님께서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 데 있나니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1-32)라고 하셨다. 그러자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말하기를 “요한의 제자는 자주 금식하며 기도하고 바리새인의 제자들도 또한 그리하되 당신의 제자들은 먹고 마시나이다”(눅 5:33)라고 하였다.
여기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예수님이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려 오셨다면 요한의 제자들과 같이 금식하며 기도하는 모습이 있어야 하지 않느냐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서 죄인들이 회개한다는 것은 금식과 애통하는 기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수님이 진정한 선지자라면 죄인들에게 이렇게 촉구해야 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
러나 예수님은 죄인들을 회개시키기 위해 자신을 구별하시기 보다는 오히려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신다고 비난하였다. 본문에서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똑같은 비난을 하고 있었다(눅 15:2).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는 비유를 통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가진 회개에 대한 개념을 공격하시면서 진정한 회개란 바로 목자가 잃은 양을 찾는 것과 같은 것이고, 여자가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금식하며 애통하는 기도가 있는 것을 회개로 보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우리도 외부적으로 드러나는 경건, 율법적인 행위를 통해 구원에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른 바 주일성수를 열심히 하며, 십일조 헌금을 한다든지 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이런 것이 아니라고 폭로하셨다. 예수님이 찾으시는 존재는 스스로 금식하고 애통하는 기도로 하나님께 돌아오는 자가 아니라 스스로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와 같은 존재임을 아는 자이다.
스스로 의인이라고 여기는 자가 아니라 자신의 죄인됨을 아는 자이다. 자신이 스스로 이렇게 알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찾아짐을 당한 자는 이런 고백이 늘 있는 자들이다.
결국 본문의 비유는 잃은 양 한 마리, 잃은 한 드라크마의 중요성을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잃은 것을 찾으시는 분이 누구신가를 가르쳐주고 있다. 다시 말해서 비유의 강조점은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잃은 양을 찾는 목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여자에게 강조점이 있다.
이는 곧 죄인인 자기 백성을 찾으러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가 잃어버린 자인지 알지도 못하고 있는 상태에 있는데 주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친히 십자가를 지셔서 자기 백성을 찾으신 은혜를 일방적으로 베푸신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게 되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은혜를 깨닫고 늘 주님의 십자가로 관심이 되돌려지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도는 바울 사도와 같은 이런 고백을 할 수밖에 없다.
8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9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 2:8-9)
26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27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28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29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너희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 31기록된 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라(고전 1:26-31)
찾아짐을 당한 우리에게 의가 있었나? 잃은 양이 목자의 눈에 잘 띄게 있었던 것도 아니고 한 드라크마가 잘 찾아지는 자리로 굴러가서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잃은 양을 찾아내기까지 다닌 목자, 잃은 한 드라크마를 찾아내기까지 찾은 여자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이고 십자가의 의에 의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애초에 천한 자들이었으며, 멸시 받는 자들이었으며, 없는 자들이었는데 십자가에서 이루신 의로 찾아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찾아짐에 의해 하나님의 기쁨과 즐거움에 참여된 자이다(20181223 강론/김영대).✞
비유19. 눅 1508-10 잃은 드라크마를 찾는 비유.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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