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제 강론/예수님의 비유

마태복음 13:10-17,34-35 하나님 나라의 비밀

불편한 진리 2018. 6. 16. 15:41

예수님의 비유 강론 01

 

마태복음 13:10-17, 34-35

하나님 나라의 비밀

 

예수님은 이 땅에 계시면서 많은 비유로 가르치셨다. 아니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다 비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왜 비유로 말씀하셨는가? 이러한 물음은 오늘 우리만의 질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들도 이렇게 말했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이르되 어찌하여 그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10).

비유란 히브리어로 마샬”(mashal), 헬라어로는 파라볼레”(parabole)인데 원래 어떤 것을 곁에 놓아서 비교한다는 뜻을 지닌 단어인데 우리 말로 격언, 속담, 비교, 잠언, 지혜의 말, 유사, 수수께끼 등으로 광범위하게 표현되는 말이다. 이런 점에서 사실 유대인들에게 비유란 그리 특별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친숙한 것이었다. 시편 78:2에 의하면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할 때에 비유를 사용한다고 하였다. 이처럼 평범하게 보이는 것 속에 감춰진 깊은 내용과 뜻을 드러내어 표현한 것들이 널리 알려져서 모든 사람의 입에 회자되면 잠언이나 격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 제자들의 입장에서는 매우 특이하게 느껴진 것이었다. 특별히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시고 마지막에 귀 있는 자는 들으라”(9)라고 하신 말씀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가르치시는 의도가 단순히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누구나 다 깨달아 알게 하기 위한 것만 아니라 그 이상의 의도가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씀으로 받아 들여졌던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홀로 계실 때(4:10) 왜 비유로 가르치시는가를 묻게 된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 무릇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11-12)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비유는 누구나 다 귀로 들을 수 있지만 그 비유 속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아 아는 것은 누구에게나 허락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이런 점에서 여기서 말씀하신 천국의 비밀이란 드러난 비밀, 공개된 비밀이란 의미가 담겨 있다.

그래서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그들에게는 아니되었나니라고 하여 너희그들을 구분하셨다. 즉 예수님께 나아와 그 진리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너희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달아 아는 은혜가 주어졌다는 것이다. 너희가 특별히 지혜롭다거나 너희가 남보다 더 의롭고 경건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은혜를 너희에게는 허락하셨기에 성령께서 너희 마음을 열어 깨닫게 하시므로 너희는 내게 나아와 내 말을 듣고 믿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기 때문에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지만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게 되어 있다. 즉 은혜를 입은 자는 점점 더 풍성한 은혜를 받아 넘치게 되지만 반면 이 은혜를 입지 못한 자는 가진 것까지 빼앗기게 될 것이다.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는 은혜가 주어진 너희는 그 은혜로 인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게 되며 천국의 은혜를 더 깊이 풍성하게 누리게 될 것이지만 깨닫는 은혜를 입지 못한 저들은 그저 육적 이스라엘로 그치고 마는 것에 불과하며 그 가진 것까지 빼앗기게 될 것이다. 그나마 주어진 육적 차원의 은혜도 손으로 행한 할례로 언약 백성임을 증거하게 하였던 특권까지도 빼앗기게 될 것이고 이로써 육적 이스라엘은 무너질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13-15)라고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선택과 부르심을 명백하게 나타내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셨다.

 

8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9여호와께서 이르시되 가서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하여 10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며 그들의 귀가 막히고 그들의 눈이 감기게 하라 염려하건대 그들이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고 다시 돌아와 고침을 받을까 하노라 하시기로 11내가 이르되 주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하였더니 주께서 대답하시되 성읍들은 황폐하여 주민이 없으며 가옥들에는 사람이 없고 이 토지는 황폐하게 되며 12여호와께서 사람들을 멀리 옮기셔서 이 땅 가운데에 황폐한 곳이 많을 때까지니라 13그 중에 십분의 일이 아직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황폐하게 될 것이나 밤나무와 상수리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 그루터기는 남아 있는 것 같이 거룩한 씨가 이 땅의 그루터기니라 하시더라(6:8-13)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그 웃시야 왕의 사촌이었던 이사야가 슬픔에 잠겨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성전에 가득한 영광을 이사야에게 보여 주시자 이사야는 망하게 되었다고 고백하였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의 입술을 깨끗하게 하시고 나를 위하여 백성들에게 가라고 이사야를 보내신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것은 선지자가 백성들에게 가서 그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하나님의 비밀을 알아듣지 못하게 하라고 말씀하신다. 언약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 언약 백성이 되려고 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예수님께서 인용하면서 이사야의 예언이 이루어졌다고 선포하신다.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다고 말씀한다. 마음이 완악하다는 것을 어떤 사람은 심하게 악하여 괴퍅한 상태라고 이해하면서 적어도 자신은 악해도 완악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성경에서 완악하여져서라는 말은 헬라어로 파퀴노’(pakhouno)인데 이 말은 두껍다’, ‘살찌다는 뜻이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표현은 타파쉬’(tafash)라는 말인데 시편 119편에 이렇게 나타난다.

 

69교만한 자들이 거짓을 지어 나를 치려 하였사오나 나는 전심으로 주의 법도들을 지키리이다 70그들의 마음은 살져서 기름덩이 같으나 나는 주의 법을 즐거워하나이다(119:69-70)

 

그들의 마음은 살져서라는 말이 바로 타파쉬이다. 교만한 자들은 마음이 살져서 기름덩이 같다는 것은 살이 쪄서 기름덩이와 같은 상태가 되어 둔하다는 것이다. 자기가 원하는 것만 취하고 자기가 먹고 싶은 것만 먹기 때문에 살이 쪄서 민감하지 못하고 둔한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즉 살이 쪄서 둔한 상태가 된 것이 마음이 완악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완악한 자는 교만한 자이다. 교만하다는 것은 사전적인 뜻으로는 잘난 체하여 겸손함이 없이 건방지다는 뜻이지만 성경에서는 그런 의미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고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많은 음식들이 있어도 자기 먹고 싶은 것, 입에 맞는 것만 먹겠다고 고집하는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언약의 말씀이 주어져도 자기가 먹고 싶은 것만 먹고 자기가 취하고 싶은 말씀만 취하겠다고 고집하는 상태가 바로 완악하고 교만한 자이다. 그러니 하나님의 말씀이 언약으로 주어져도 언약의 말씀으로 받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과 말씀의 의도대로 따라가려고 하지 않고 자기가 좋은대로 해석하고 적용하여 언약의 말씀을 율법으로 받아들여 행하여야 할 계명으로 만들어버린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의보다 자기 의가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10:3).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는 단순히 백성들의 귀와 눈을 닫아 황폐하게 될지라도 완전히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베임을 당하여도 그루터기가 남는 것같이 거룩한 씨”(6:13)를 주실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거룩한 씨로 이 땅에 오셨기에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통해 선언하셨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심으로 이사야 선지자의 일을 온전히 성취하는 선지자로 이 땅에 오셨다는 것이다. 선지자는 비유로 말하는 자이다.

 

1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여 이르시되 2인자야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수수께끼와 비유를 말하라(17:1-2)

 

내가 이르되 아하 주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그는 비유로 말하는 자가 아니냐 하나이다 하니라(20:49)

 

내가 여러 선지자에게 말하였고 이상을 많이 보였으며 선지자들을 통하여 비유를 베풀었노라(12:10)

 

결국 12절에서 말씀하신 있는 자, 없는 자란 무엇이 있고 무엇이 없다는 것인가? 그것이 바로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드러내 주고 있는 ”, 말씀이다(8:11).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있는 자와 예수 그리스도를 없는 자를 구분해 내시는 구원과 심판의 일을 하신 것이다. 즉 십자가라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깨닫도록 허락된 자는 진리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십자가 정신으로 살지만 하나님 나라의 비밀이 허락되지 않은 자는 예수님의 십자가 표적도 바알세불의 일로 돌리며 사탄의 사고방식으로 살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많은 선지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들을 보고자 하여도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들을 듣고자 하여도 듣지 못하였느니라”(16-17). 그러므로 지금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볼 수 있고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것이 실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복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하나님 나라의 복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고 창세부터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리라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34-35). 마가복음 4:13에서 너희가 이 비유(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알지 못할진대 어떻게 모든 비유를 알겠느냐?”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알려 주신 동시에 감추시는 비유이다. 그래서 이미 시편 기록자는 이렇게 선언하였었다.

 

1[아삽의 마스길] 내 백성이여, 내 율법을 들으며 내 입의 말에 귀를 기울일지어다 2내가 입을 열어 비유로 말하며 예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을 드러내려 하니 3이는 우리가 들어서 아는 바요 우리의 조상들이 우리에게 전한 바라(78:1-3)

 

여기서 예로부터라는 말씀을 마태는 창세부터라고 하였다. 즉 창세 전의 비밀을 역사 속에 드러내시는 것이 비유이다. 예수님은 비유를 말씀하심으로 창세 전의 비밀, 즉 천국의 비밀을 이 역사 속에 나타내고 계신 것이었다. 이렇게 하시는 이유는 언약에 속한 자와 언약 밖에 있는 자를 구분하시기 위함이다. 비유, 즉 언약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그 말씀을 알아 듣는 언약 백성과 그 말씀을 알아 듣지 못하는 비 언약 백성들을 구분해 내시기 위함이다.

예수님은 표적과 비유를 통해 자기에게 속한 자와 마귀에게 속한 자를 갈라내는 일을 하신다. 말씀이 던져지면 예수 그리스도께 속한 자와 마귀에게 속한 자가 갈라지게 되어 있다. 말씀이 그 역사를 이룬다. 이런 점에서 성경의 모든 계시가 비유이다. 허락된 자에게는 은혜로운 언약의 말씀이지만 허락되지 않은 자에겐 여전히 짐이 되고 어려운 계명이요 율법이 되며 숨겨진 비유이다

마태는 예수님께서 이렇게 비유로 말씀하심이 창세부터 감추인 하나님 왕국의 비밀을 드러내는 예언을 성취하신 것이라고 밝힌다. 이 천국의 비밀을 하나님께서 친히 은혜 베풀 자에게만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또한 하나님 왕국의 비밀이다(9:18). 추수 때까지 이 일은 그렇게 드러날 것이다(20180506,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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