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비유 강론(20180506)
누가복음 19:11-27
열 므나 비유
므나 비유는 달란트 비유와 비슷하다고 하여 많은 사람들이 다음과 같이 해석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달란트 비유에서 달란트는 탤런트로 이해하고 주인이 다섯, 둘, 한 달란트를 주었다는 것은 각기 다른 재능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보고 그 재능을 썩히지 말고 잘 활용하여 선한 영향력을 끼쳐야 한다는 교훈을 주는 것이고, 므나 비유는 열 명의 종에게 한 므나씩 주었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복음을 주셨기에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잘 감당해야 한다는 교훈을 주신 것이라고 이해한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해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모든 비유는 천국 비유라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 나라가 어떤 것인가를 보여 주신 비유들이지 우리가 신앙 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또는 교회를 어떻게 섬기고 봉사 헌신 할 것인가에 대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열 므나 비유를 말씀하신 시점은 갈릴리를 떠나 여리고를 통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기 직전이었다. 맹인을 고치신 후 삭개오를 만나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9-10절)라고 말씀하신 이후에 열 므나 비유를 말씀하셨다. 이 비유를 말씀하신 동기가 본문에 분명하게 나타난다.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있을 때에 비유를 더하여 말씀하시니 이는 자기가 예루살렘에 가까이 오셨고 그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함이더라”(11절).
예수님을 따르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활동이 갈릴리 지역에서 예루살렘 쪽으로 옮겨짐에 따라 곧 하나님의 나라가 완성될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러한 기대는 제자들에게서도 마찬가지로 보여진다. 18:31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이 가시는 목적을 분명히 밝히셨다. 예루살렘에 가면 이방인들에게 잡혀서 고난과 죽음을 당할 것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의 성취라고 하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눅 18:34).
예수님께서 이제 본격적으로 이스라엘의 수도인 예루살렘으로 가시니까 자기들이 원하는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였다. 이런 점에서 11절의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예수님의 비유는 하나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로 말씀하셨다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 나라가 이미 임하여 있다는 사실을 강조하심으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예수님께서 드러내시는 하나님 나라가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사실 누가는 삭개오 사건을 통해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에서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눅 19:5)는 말씀과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눅 19:9)라는 말씀에서 ‘오늘’이라는 의미를 강조하였다. 때문에 사람들은 삭개오에게 줄 하나님 나라, 구원이 지금 당장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게 되면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에 대한 본질을 다시 한번 말씀하고자 하시는 것이다.
“이르시되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니라 그런데 그 백성이 그를 미워하여 사자를 뒤로 보내어 이르되 우리는 이 사람이 우리의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나이다 하였더라”(12-14절). 예수님이 태어나셨을 때 이스라엘을 다스리던 헤롯 대왕은 에돔 사람이었고 그 아내는 사마리아 사람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헤롯의 다스림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가 죽을 때에 자기 아들들에게 이스라엘을 분할하여 다스리도록 물려주었다. 당시 이스라엘은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로마 황제의 허락이 있어야 되었다. 실제 아켈라오는 로마의 허락을 받기 위해 로마에 갔을 때에 유대인들은 아켈라오의 왕됨을 원치 않았기에 사절단을 로마에 보내어 탄원서를 올린 적이 있었다. 이 비유는 누구나 알고 있었던 이러한 일을 배경으로 주어진 비유였다. 당시의 한 므나는 100드라크마인데 약 세 달치의 품삯에 해당된다.
귀인이 열 명의 종들에게 한 므나씩 주면서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고 한 후 돌아와 어떻게 장사하였는지 묻는다. “귀인이 왕위를 받아가지고 돌아와서 은화를 준 종들이 각각 어떻게 장사하였는지를 알고자 하여 그들을 부르니 그 첫째가 나아와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잘하였다 착한 종이여 네가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하였으니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 하고 그 둘째가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당신의 한 므나로 다섯 므나를 만들었나이다 주인이 그에게도 이르되 너도 다섯 고을을 차지하라”(15-19절). 그런데 여기서 열 명의 종들이 다 등장하는 것은 아니다. 장사를 하여 열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열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하였고 다섯 므나를 남긴 종에게는 다섯 고을 권세를 차지하라고 하였다. 왕의 칭찬은 동일한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실제 종들에게 한 므나씩을 주면서 얼마를 남기라고 하신 적은 없다. 그러므로 열 므나를 남겼든지 다섯 므나를 남겼든지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물론 열 므나를 남긴 자에게는 열 고을 권세가 주어지고, 다섯 므나를 남긴 자에게 다섯 고을의 권세가 주어진다는 점을 들면서 차이를 강조할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본문에서 말씀하는 것은 종들을 다 열거하면서 나머지 종들에게도 그 보상이 어떻게 배당되었는가 하는 것을 더 이상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비유에서 말씀하고자 하는 것은 남긴 것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두 부류의 존재로 나누고 있다는 것이다. 즉 장사를 하여 남긴 종과 그렇지 못한 종이다. 왜 이렇게 보아야 하느냐 하면 여기서 “첫째”란 말은 헬라어로 ‘프로토스’이고 “둘째”란 ‘듀테로스’이다. 즉 듀테로스란 첫째의 짝으로서 둘째이기 때문이다. 첫째에 의해 둘째가 될 수 있었던 존재이다.
그러면 또 다른 한 종은 어떠하였는가? “또 한 사람이 와서 이르되 주인이여 보소서 당신의 한 므나가 여기 있나이다 내가 수건으로 싸 두었었나이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20-21절). “또 한 사람이”라고 하였는데 헬라어로 ‘헤테로스’이다. 즉 앞의 첫째. 떠힌 그와 같은 둘째와는 ‘다른 한 종’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다. 이 종은 장사하라는 주인의 명령을 무시하고 수건에 싸 두었었다. 여기서 수건이 무엇을 의미하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다만 이 종은 자신이 주인에 대해 생각한대로 행하였다는 점이다. 이 종은 주인을 전통적인 절차와 율법에 모순되는 착취적인 사업 관행을 저지르는 자로 묘사한다. 심지 않는 곳에서 거두는 악한 주인이라는 말이다. 이 종의 말을 통해 주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가 분명히 드러난다. 이런 생각 때문에 그는 장사를 하지 않고 한 므나를 그대로 가져왔다. 이 종은 주인이 왕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원수였음이 드러났다.
“주인이 이르되 악한 종아 내가 네 말로 너를 심판하노니 너는 내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는 엄한 사람인 줄로 알았느냐 그러면 어찌하여 내 돈을 은행에 맡기지 아니하였느냐 그리하였으면 내가 와서 그 이자와 함께 그 돈을 찾았으리라 하고 곁에 섰는 자들에게 이르되 그 한 므나를 빼앗아 열 므나 있는 자에게 주라 하니 그들이 이르되 주여 그에게 이미 열 므나가 있나이다 주인이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릇 있는 자는 받겠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22-27절).
주인의 책망은 한 므나를 뺏는 것으로 나타난다. 결국 주인의 왕 됨을 인정하고 그 주인의 명령을 좇아 산 자는 주인에게서 보상을 받는다. 물론 여기서 주인의 명령을 좇아 산 자란 자기 행위로 명령에 순종하였다기보다 첫째에 의해 둘째가 된 상태이기에 차등이 있는 보상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각각 종들에게 맞는 권세를 맡기는 것은 주인 곧 왕의 뜻이다. 또한 열 고을 혹은 다섯 고을을 다스리는 권세를 주셨다는 것을 장사한 것에 대한 보상의 의미로 생각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열 고을, 다섯 고을을 차지하는 권세란 의미를 성경에서는 이렇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4또 내가 보좌들을 보니 거기에 앉은 자들이 있어 심판하는 권세를 받았더라 또 내가 보니 예수를 증언함과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목 베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과 또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지 아니하고 그들의 이마와 손에 그의 표를 받지 아니한 자들이 살아서 그리스도와 더불어 천 년 동안 왕 노릇 하니 5(그 나머지 죽은 자들은 그 천 년이 차기까지 살지 못하더라) 이는 첫째 부활이라 6이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 년 동안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 하리라(계 20:4-6)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한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된 상태이기에 십자가 고난과 죽음에 동참되어진 자로서 더불어 왕 노릇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언하였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롬 5:17)
예수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고 있지만 그 메시아상은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적인 메시아였고 삭개오에게 오늘 구원이 이르렀다고 하니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에 나타날 줄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천국이 당장 임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임하여 있다고 선언하셨다. 즉 주인이 왕위를 받기 위하여 멀리 떠났다고 하더라도 종들은 주인의 명령을 무시하지 않고 그 주인의 명령을 좇아 살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주인이 멀리 있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주인과 더불어 산다는 생각이었고 곧 주인의 명령 안에 그대로 살았다. 이런 점에서 장사를 하여 므나를 남긴 종들의 삶은 먼 미래의 구원이나 심판을 기다리면서 살았던 것이 아니라 지금 예수님을 왕으로 인정하고 그 나라에 살고 있는 것이었다.
예수님을 하나님 나라로 알고 인정하는 자들은 곧 주님의 말씀에 의해 살아지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구약을 통해 언약의 말씀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메시아에 대한 이해를 자기 편한 쪽으로 이해하였다. 이런 구도로 볼 때에 있는 자는 더 받고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긴다는 것은 천국의 비밀을 깨닫는 은혜가 주어진 자는 날마다 더 풍성히 깨달아 지지만 있다고 여기는 자는 그 있는 것조차도 자기 지식에 갇혀 알지 못하는 것이 이 땅에 임한 천국이다. 비록 말씀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천국으로 오신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는 상태가 바로 하나님의 원수된 상태이다. 그러나 말씀을 통해 지금 임한 하나님 나라를 인정하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믿어진다면 그분에 의한 십자가 은혜를 받아 누리게 될 것이다. 실로 이것은 은혜로 주어진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에 이 사실을 분명히 선언하신 것이 열 므나 비유이다(http://cafe.daum.net/joosung 강론/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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