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복음

43.요한복음 21:1-25 나를 따르라

불편한 진리 2015. 1. 27. 14:42

43

나를 따르라

요한복음 21:1-25

 

 

교인들 중에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에 대해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일상적인 삶과 신앙생활이 이원화된 것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회자에게 하는 질문이 이런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습니까?” 신앙생활에 대한 특별한 삶이나 아니면 특별한 방도가 따로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교회에 나와서 기도하고, 예배하며 또 나가서 전도하는 이런 것들을 신앙생활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교회에 나오면 천사 같고 하나님 같으면서도 직장에서나 가정에서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신자의 삶이란 일상적인 삶이 있고 그 외에 따로 신앙생활이라는 것이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한 가지로 생각하십시오. 그냥 삶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 말이 예수 믿는 삶이나 믿지 않는 삶이나 똑같다는 뜻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말하자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믿는 것이고 그것이 곧 삶 그 자체라는 의미입니다.

20장에 의하면 제자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자신들이 주님을 위해서 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생활로 돌아갔습니다. 베드로를 비롯한 몇 제자들이 전에 하던 일 그대로 갈릴리 어부의 생업으로 돌아간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부활의 주님께서 다시 나타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모든 소품들을 옛날의 상태로 만드셨습니다. 그물을 던지게 해서 많은 물고기를 잡게 하는 것이라든지, 또는 베드로를 예전의 이름, 시몬으로 부르시는 것이며,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했던 상황 등으로 다시 되돌려 놓으셨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대표해서 베드로에게 묻습니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기서 이 사람들이라고 되어 있는데 본문 밑의 주석에 보면 혹 이것들보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두 가지를 다 가리킬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보다또는 이것들보다라는 뜻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 사람들보다라는 말은 베드로가 이전에 다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언제든지 버리지 않겠나이다”(26:33)라고 장담했던 것에 비추어 볼 수 있습니다. 즉 다른 제자, 다른 사람들보다도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또 한 가지는 이것들즉 지금 잡아온 많은 물고기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는 물음입니다. 즉 네가 가진 이 직업으로 인해 생길 수 있는 물질적인 것 이런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는가 하는 물음이었습니다.

이것은 베드로가 주님에 대해 얼마만큼의 사랑을 가지고 있는가 하는 척도를 재고자 하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베드로더러 너 자신에 대하여 제대로 알고 있느냐 하는 물음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 너는 나를 제대로 사랑할 수 없다. 처음에 내가 너를 택하여 부를 때에 정말로 나를 사랑해서 나를 따랐느냐? 또 네가 나를 사랑한다고 호언장담했던 것을 기억하느냐 그러나 금방 넘어지고 말았지 않으냐? 그러니 지금 이전의 상황을 다시 생각해 보라 또 큰소리치면서 나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느냐? 너는 결코 나를 진정한 사랑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뜻의 확인 작업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하여 믿을 수 없다는 사실에 대해 베드로가 스스로 인정하게 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베드로는 꼼짝 못하고 말았습니다. 부활하신 주님 앞에서 자신을 제대로 보게 된 것입니다. 베드로는 이렇게 답변하고 있습니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15,16,17). 즉 내가 나에 대해서 아는 것보다도 주님께서 나에 대해서 더 잘 아신다는 것입니다. 자기도 자신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못난 인간이라는 뜻입니다. 비로소 이러한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악 가운데서 보이는 주님이라야 제대로 본 예수님입니다.

이제 베드로는 자기 인생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있는 삶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 이 말씀은 베드로가 앞으로 어떤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인지를 나타내신 것이었습니다(19).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음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셨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제자들의 삶도 이렇게 예수님과 같은 운명으로 한정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요한복음에는 예수님의 승천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즉 예수님의 영광에 대하여 승천해서 하늘나라에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는 것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 그 자체가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결코 자신의 뜻에 의해 움직여지는 자가 아닙니다. 복음이 전해져야 하는 그 자리에 주님이 요구하시는 대로 있어야 합니다. 내 형편, 내 주장을 펴거나 관철시킬 수 있는 자리가 아닙니다. 오직 주님의 요구대로 순종만 있을 뿐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나를 따르라!”고 하셨습니다. 이제 베드로 자신의 생각대로 살아갈 수 있는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주님이 베드로를 움직이게 하실 것이라는 말이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을 위해 거창한 프로젝트를 세워서 큰일을 하는 것에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빈틈없는 일로 인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이루어 내려고 하는 모든 노력, 공로를 깡그리 무시하고 죽이는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입니다. 곧 주님과 함께 주님을 위해 죽음에 던져진 삶입니다. 내게는 조금도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더더구나 다른 사람이 어떻게 되느냐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주님을 따르는 제자의 관심사라고 할 수 없습니다. 베드로는 이 순간에도 주님 외에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빼앗기고 있습니다. 요한은 어떻게 되겠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사랑하시니 뭔가 특별한 일을 맡기시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이었던 것 같습니다.

인간은 본성적으로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는 자입니다. 타인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은 자기와 비교해서 자기를 돋보이게 하는 것과 관련된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다른 사람이 자기와 상대적으로 안 되기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관심을 가진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가진 관심은 사실 이런 것에 불과합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순간순간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못박지 않으면 자기를 드러내고자 하는 병이 재발되는 것입니다.

베드로의 물음에 대해 예수님의 답변은 전혀 방향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22) 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따르는 것은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하여 간섭하라는 말이 아니라 자신이 주님께 철저히 간섭을 받아야 합니다. 즉 다른 사람의 삶에 대하여 간섭하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오직 지금 주님께 붙잡힌바 된 자로 살아가는 것이 성도의 모습입니다. 그것이 능력이라면 능력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에서는 영생, 구원을 현재적인 것으로 설명하는 것입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5:23).

예수님은 인간의 실패를 낱낱이 공개하십니다. 인간이 본성적으로 주님을 거부했던 이전의 상황을 일일이 말씀으로 보여주시면서 철저히 주님 앞에 자신의 죄인 됨을 고백하게 하시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못박는 십자가에서 주님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은 인간의 실패에 반대해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 자신은 늘 실패할 수밖에 없구나 라고 하는 것을 알고 주님만 바라보면서 따르는 삶이기를 주님은 요구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20:22-23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사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제 주님을 따르는 자는 주님이 하시던 일을 위임받은 것입니다. 천국과 지옥을 보여줄 수 있는 자가 신자입니다. 영생과 심판을 말할 수 있는 자가 주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그것을 보여줄 자는 오직 이 땅에 십자가의 길을 가는 성도입니다.

우리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따르게 하셨고 맡겨주신 이 중대한 증거의 말씀들을 바르게 증거 할 수 있도록 지금도 살아계신 주님의 지배를 받는 삶이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상적인 삶 따로 신앙생활 따로 그렇게 둘로 나누어서 생각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이 중대하고 거대한 주님의 뜻에 우리의 직장, 가정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삶이 다스림을 받는 것이어야 하겠습니다. 지금도 주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를 따르라!"<199761/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