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복음

38.요한복음 18:1-27 대제사장, 가짜와 진짜

불편한 진리 2015. 1. 27. 14:25

38

대제사장, 가짜와 진짜

요한복음 18:1-27

 

 

말씀을 가르치면서 많이 받는 질문 중의 하나가 왜 우리가 죄인이라고 자꾸 강조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의 의도는 아마 이런 것이라 생각됩니다. 우리는 예수 믿은 이후에는 의인이 되었는데 자꾸 죄인이라는 사실을 강조할 필요가 없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 있는 자들에게는 천국의 소망과 영광에 대해서 많이 강조해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주일에 예배당을 찾아오는 교인들에게 가능하면 희망이 있고 힘이 되며 평안이 되고 위로가 되는 말씀을 전해주기를 설교자에게 요구합니다. 사람들의 아픈 곳을 찌르는 죄에 대한 구체적인 열거는 서로의 마음을 상하게 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자제해 달라는 것이 오늘날 교인들의 주문입니다.

이는 교회에 대하여 대단히 잘못된 생각입니다. 그 이유는, 한 마디로 인간의 모임인 조직 교회를 주님의 몸과 일치하는 것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교회를 어떻게 말하고 있는지를 생각하기보다 교회라는 간판을 걸었으니 성경에서 말하는 교회로 받아들이자는 것입니다.

결국 교회에 도움을 주러 온 사람들의 마음을 상하게 하면 교회에 유익될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얘기입니다. 어떻게 하든 예배당에 나온 사람들이니까 마음을 즐겁게 해주고 잘 구슬리면 헌금을 듬뿍하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재정이 튼튼해져서 큰 교회가 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가 될 것이라는 심사입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주님의 몸된 교회는 인간의 조직체가 아닙니다. 주님의 몸은 십자가에서 고난 받으신 그 자체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도 머리되신 주님의 말씀 체제 안에 있고 그 말씀 때문에 세상과는 다른 삶을 살기에 받는 고난과 죽음에 던져진 모습으로서의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기에 교회라는 모임을 통해서 우리 자신이 죄 덩어리임을 말씀에 비추어 지적받고 날마다 꾸짖음을 받지 않으면 안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이유로 인해 교회는 말씀에 비추어 인간의 죄가 어떤 것인지 들추어내고 또한 상대적으로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시시때때로 선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죄를 말하면 교회 밖에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죄를 교회 밖의 전유물로 치부합니다. 성도 된 우리보다 불신자인 세상 사람들에게서 죄를 찾으려고 합니다. 요즘 우리가 한보사건 청문회를 보고 있습니다마는 실제적으로는 날마다 우리 속에서 다른 사람에 대한 청문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향해 항상 죄를 끄집어내고 싶고 문책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우리 속에 어떤 죄들이 꿈틀거리고 있는지 말씀 속에서 찾으라는 것입니다. 이것을 거부한다면 성도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요한복음 18장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18장의 전반부는 예수님이 잡히셔서 대제사장들에게 심문을 받으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고 후반부는 총독 빌라도에게 심문을 받으시는 내용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에 베드로가 부인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에 보면 대제사장은 본래 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안나스와 가야바입니다. 가야바는 안나스의 사위라고 되어 있습니다(13). 이것은 대제사장이 권력화되어 있다는 증거입니다. 대제사장의 권력으로 예수님을 붙잡아 옵니다. 그런데 주의해서 보면 예수님이 그들에게 잡혀 가시는 것이 결코 힘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대제사장 측에서는 군대와 그의 하속들을 보냈습니다. “등과 홰와 병기”(3)를 가지고 왔다고 했습니다. 병기를 가진 힘으로 예수님을 잡으려고 온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당할 일을 아시고 자신이 나사렛 예수라고 당당히 밝히십니다(5). 그 때 그들은 다 땅에 엎드러졌습니다(6). 즉 이 상황은 군대와 대제사장의 하속들이 예수님을 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스스로 잡혀주시는 상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으로서 자신의 잡힘을 허락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왜 이렇게 허락하셨습니까?

하나님이 연약하신 분이기 때문에 인간들로부터 수모를 당하시고 죽임을 당하셨다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방법이 아니고서는 죄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아니면 해결되지 않는 문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분이 힘없고 연약한 분이라거나 인간의 힘이 대단하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죄 때문에 연약해지셨습니다.

검을 들고 설치는 베드로의 방법으로는 영생이라는 것이 주어질 수 없습니다. 영생은 십자가를 통해서 우리에게 주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 때문에 이 요한복음에서는 인간과 예수님을 선명하게 대조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기의 죄로 인하여 철저히 깨어질 수밖에 없고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안나스와 가야바라는 대제사장은 자신들의 권력으로 예수님을 심문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향한 충성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심문하고 정죄하는 것이 될줄 몰랐습니다. 가짜 대제사장이 진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을 심문하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 되고 말았습니다.

구약의 대제사장이라는 직분은 지금 자기들 앞에 계시는 예수님을 보여주기 위하여 주어진 것이었으나 그것을 알지 못하고 정죄하면서 십자가에 죽이려고 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더구나 무식한 대제사장 밑에서 아부하면서 예수님을 때리는 이런 모습이(22) 바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가는 죄인의 모습입니다(53:6).

대제사장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제자인 베드로도 자신이 불리한 상황으로 몰리게 되자 부인할 수밖에 없는 별 수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여기서 덧붙여 지적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 때문에 베드로의 회개를 요한복음에서는 기록하고 있지 않습니다. 대제사장이나 베드로나 다 주님을 배반하고 거부하는 일에 대해서는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이 나쁜 놈들이었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인간의 죄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입니다.

죄라는 것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우리 안에 얼마나 더러운 것이 뿌리내리고 있는가? 우리에게서 나오는 것이 얼마나 추잡하고 하나님과 동떨어진 것인가? 아니 그것이 모든 면에서 철저히 하나님을 증오하고 있고 하나님을 향해서 반항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놀라야 하는 것은 당시 유대교에 정통한 자였고, 누구보다 하나님에 대한 충성심이 강한 자고, 어떤 사람들보다도 종교적으로 고상한 경건을 가졌으며, 율법 준수에 빈틈없는 자라고 할지라도 결국 예수님 앞에서 인간의 사악함이 어떠한가 하는 것이 드러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결국 온전한 대제사장이신 예수님 앞에서 낱낱이 증명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기에 구약에 있었던 제사장들은 자기를 위해 속죄제를 드려야 하는 죄인이었다고 히브리서 5:1-3에서 지적하고 있습니다. 반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 온전한 대제사장이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5:6-10).

예수님이 빛이십니다. 당시의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이 빛을 없애려고 했습니다. 그래야 자기들이 빛을 발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자기들의 잘남을 내세우고 욕심을 이루기 위하여 참 빛을 없애야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자기들이 눈을 감고 있는 소경이었다는 것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진리이십니다. 인간 대제사장은 이 진리를 없애버리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자기들만이 진리라고 하는 사실을 드러내고자 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을 진리로 드러내게 되니까 대제사장들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들이 비진리라고 하는 실상이 완전히 폭로된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요한복음 처음에 했던 표현으로 하자면 어두움이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 우리의 양심, 도덕, 윤리, 우리가 가지는 종교적 열심, 심지어 율법의 모든 행위로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것마저도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서 쓰기 때문입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편을 든답시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한다고 하는 것은 결국 예수님을 다시 십자가에 못박는 일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자기의 종교적 열심과 치장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날마다 죽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죄성입니다. 신앙에서 제일 무서운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신앙이란 착한 사람이 되자는 것이 아닙니다. 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의롭게 되자는 얘기도 아닙니다. 봉사하자는 얘기도 아니고 사랑하자는 얘기도 아닙니다. 근본적으로 말하자면 신앙이란 주여 이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신앙입니다.

내 자신의 모든 일에 대하여 내가 해결할 능력도 없고 하나님이 나를 불쌍히 여기시며 긍휼히 여기시는 것밖에는 방법이 없음을 아는 것이 회개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을 받으시는 분이 십자가에 자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신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외치게 했던 대로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1:6)라고 지금 가짜 대제사장들을 향해 책망하시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그 음성을 들읍시다. 그 음성을 듣고 내가 주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던 죄인이라고 고백하는 자가 진정한 성도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긍휼을 보여주면서 살아가는 모습이어야 할 것입니다<1997420/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