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복음

40.요한복음 19:1-22 하나님 아들의 고난

불편한 진리 2015. 1. 27. 14:31

40

하나님 아들의 고난

요한복음 19:1-22

 

 

한국교회를 보면 너무나 다른 방향으로 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개인적인 편견에 의해서 이런 판단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인 시각에서 볼 때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기독교가 이상하게 과장되어 있고, 성경에서 말씀하는 것과는 다른 것으로 포장되어 있습니다.

열성과 웅성거리는 것으로 세를 과시하고 있는 듯합니다. 뭔가 짜릿하고 화끈한 것으로 기독교를 말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열심도 없이 밍숭맹숭 한 것은 잘못된 교회이고 잘못된 신앙이라는 쪽으로 몰고 가는 것 같습니다.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도 기독교는 상식이 되었고 유행하는 종교가 되었습니다. 취미 생활하기에 적당한 종교로 전락한 것으로 보입니다. 남들이 가지고 있는 종교 중에서 하나로 취급되는 액세서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기독교를 너무 쉽게 상식으로 판단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세상의 원리와 관점에서 교회를 이야기하기가 일쑤입니다. 그래서 교회가 숫적으로 부흥하고 왕성한 것으로 인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쉽게 단정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 원인을 한국교회가 면면히 이어 온 새벽기도라는 힘에 있었다고 말합니다. 맞습니까? 어떻게 그런 엉터리같은 말을 막 할 수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건 기독교가 아니고 인간교입니다. 인간의 기도에 의해 이루어진 교회라면 주님과 상관없는 것입니다.

인간들의 공로가 뭉쳐서 이루어진 기독교라면 창세기 11장에 나오는 바벨탑의 재현에 불과합니다. 왜 예수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땀이 핏방울이 되는 듯 한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 때문이었다고 인정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왜 우리의 기도를 접고 주님의 기도 덕분이라고 승복하지 못합니까? 왜 주님께서 홀로 지신 십자가에 의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일에 죄인들의 공로나 힘을 슬쩍 집어넣고 싶어 하는 것입니까? 그것이 교만이고 그것이 주님을 모독하는 일이 아닙니까?

요한복음 18장 이후부터 예수님의 고난을 아주 상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왜 이렇게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열거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로 하여금 그것을 감상적으로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 드라마틱하게 기록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신파극을 우리에게 보여 주면서 눈물을 짜도록 요구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고난을 아주 자세하게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는 이유는, 예수님 자신의 권세에 의해 자기 백성들을 구속하시기 위하여 친히 십자가를 지신 사건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싶은 것입니다. 거기에 인간의 힘이 얼마나 엉뚱한 방향으로 동원되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들이 하나님을 위해서 동원한 힘은 하나님을 거부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향해 반항하는 것이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창세기의 처음 본문으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이 애초부터 계시하고자 하신 의도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시작부터 하나님이 어떻게 존재하시게 되었고 그 가족 관계는 어떠하며 그 이름이 어떠하다는 식으로 하나님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창세기 1:1에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기록해 놓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은 이미 존재하시는 것으로 출발하면서 천지 창조가 이루어졌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해 계신다는 선언을 하면서 성경은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천지 창조를 통해 하나님을 증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아주 중요한 힌트가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에 의해 지음 받은 인간이 처음 에덴의 상태 그대로 유지되게 한 것이 아니라 모든 피조 세계를 망쳐 놓았기 때문입니다. 즉 처음 창조가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에 의해 된 일이라면 망가진 피조물들을 폐기 처분하고 다시 창조하시는 일 역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 그분에 의해 되어질 일임은 너무도 자명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의 권세에 매이게 된 인간들이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이루는 일에 있어서 배제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인간들은 오히려 구원의 대상이 될 뿐이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 세계는 도무지 하나님과 교제할 수 없는 상태로 망가지게 되었습니다. 그 즉시로 에덴에서 쫓겨나면서 인간들은 여러 가지 위협과 고난으로 말미암아 저주 아래에 있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다시 살리는 약속을 주셨습니다(3:15).

인간이 고난당하는 가운데에서도 생명을 잉태하여 출산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셨습니다. 그것은 최종적인 약속의 실체가 오셔서 고난과 죽음 가운데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진정한 약속의 완성자는 고난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생명을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라고 이 요한복음 19장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분이 이 땅에 남기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요한복음 18:36에 의하면 내가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은 자신을 진리의 왕으로 나타내셨습니다(18:37).

지금 그 진리의 왕이 인간들의 거짓된 정치에 의해 그리고 유대인들의 거짓된 종교에 의해 고난과 죽임을 당할 자리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철저히 예수님을 조롱하는 측면에서 왕이라고 하는 상황으로 몰고 갑니다(2,5).

그러나 그것은 인간들에게 어쩔 수 없이 당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왕으로서 당하시는 고난은 스스로 자초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죄 가운데 있는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세워진 나라를 골로새서 1:13에서 아들의 나라라고 말씀합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니 이것은 예수님이 고난과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통해 세우신 완전히 새로운 나라입니다.

예수님을 놓아 주려고 하는 빌라도의 말에 대하여 12절에 보면 유대인들이 이렇게 소리지릅니다. “이 사람을 놓으면 가이사의 충신이 아니니이다 무릇 자기를 왕이라 하는 자는 가이사를 반역하는 것이니이다.” 15절에도 보면 심지어 대제사장들이 빌라도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가이사 외에는 우리에게 왕이 없나이다.” 이 말은 유대인들이 이미 하나님을 떠났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말입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 외에는 왕으로 인정할 수 없는 신앙관임에도 불구하고 가이사만을 왕으로 외치고 있다는 것은 하나님을 포기했다는 말입니다.

결국 요한복음에서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은 대제사장과 그를 따르는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정치적 문제의 손익을 계산한 로마의 정치 지도자들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간의 죄악이라는 것입니다. 총체적인 인간의 사악함이 예수님을 죽음의 자리에 두게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의 구원 사역에 있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에 있어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을 제거하고 하나님이 주고자 하셨던 구원을 발로 차버리는 짓을 한 것이 죄인들이라고 고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더럽고 찌끼 같은 존재(고전 4:13)가 새로운 아들의 나라에 백성이 된 것입니다. 오직 십자가로 말미암아서입니다. 또한 바울 사도는 자신을 죄인 중에 괴수로 표현 했습니다(딤전 1:15).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였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러하다면 우리 역시 마찬가지 존재 아닙니까? 하루에도 몇 천 번, 몇 만 번 주님을 거부하고 있고 죽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십자가의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신 것입니다. 고난과 죽음이라는 십자가로 말미암아 주어진 생명, 그것만이 우리의 살 길입니다.

우리는 자주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자고 말합니다. 그런 건방진 말이 어디 있습니까?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있습니까? 있다면 얼마만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죽었다 깨어나도 주님의 고난에 동참할 수 없고 깨달을 수 없습니다. 다만 성령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어느 정도 이해하고 믿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것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이제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것으로 표현되어야 합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상한 심령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이 자신의 죄를 발견하게 되고 회개하면서 가졌던 그 상한 심령말입니다. 모태에서 잉태하면서부터 죄덩어리였다는 깊은 자각입니다.

예수님 때문에 상한 심령이 되고 있습니까? 애매히 나의 실수 나의 무식함으로 인해 어려움을 당하면서 예수님과 같은 고난이라고 착각하지는 않습니까? 그런 고난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사고방식으로, 예수님이 지셨던 그 십자가의 정신으로 살기 때문에 받는 고난이 우리에게 있어야 합니다.

더 이상 기독교를 아름다음과 축복, 또는 열정 이런 것들로 포장하지 말고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으로 보여주어야 하겠습니다. 숫적인 부흥으로 이야기 하는 자들에게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과 죽음으로 그들을 부끄럽게 만들어 줍시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란을 겪어야 할 것이라”(14:22)고 선포하였던 바울 사도의 심령이 바로 우리가 가져야 할 상한 심령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이란, 내가 왜 이 십자가의 길에 부름을 받았고, 내가 왜 이 길을 가야 하는지를 알아가는 과정입니다. 그 뚜렷한 이유를 알면서도 기쁨으로 그 길을 가는 자가 성도입니다<199754/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