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복음

42.요한복음 20:1-31 부활과 그 증거

불편한 진리 2015. 1. 27. 14:39

42

부활과 그 증거

요한복음 20:1-31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데도 실제적으로 대화를 해보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많이 있습니다. 너무도 성경의 원리에서 어긋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중의 한 가지가 죄가 무엇인지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죄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는지를 전혀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대체적으로 교인들은 일반적인 관점에서 죄를 이해하고 있습니다. 법과 어긋난 우리의 행위로 인해 죄가 발생한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어서 회개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일주일 동안 성경을 읽고, 기도를 하며, 예배를 드리는 경건생활을 어느 정도 유지했다 싶으면 별로 죄의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죄인이라고 생각하더라도 교회에 나와서 그저 형식적으로 죄인입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라고 하는 정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고 기도하지 않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게 생각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 잘난 행위가 있었다고 할지라도 자신이 죄인임을 알고 주님 앞에 늘 죄송한 마음을 가지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우리의 죄로 인해 죽었던 자였습니다. 과거에 얼마나 살면서 무엇을 얼마만큼 했는가 하는 것은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죽은 이 땅의 상태에서 자기를 위해 살았으면 무엇을 얼마나 했겠습니까? 그것은 허무한 것일 뿐입니다. 심지어 우리가 이제까지 한 기도, 십일조(헌금), 전도, 예배, 교회를 위한 열심 그러한 것들조차도 무의미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들이 우리를 천국에 들어가게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로 말미암아 주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에게 새 생명이 주어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구약의 성도들에게 주신 약속의 성취였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친히 홀로 다 이루신 것이었습니다.

십자가를 지신 것이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다 이루었다고 하신 선언은 농담이 아니었습니다. 실로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없습니다. 완벽하게 이루셨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철두철미하게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은 약속의 성취였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구약의 말씀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은 유대인들의 행위가 아니라 예수님의 행위가 옳았다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은 구약의 말씀에 근거한 것이었습니다. 즉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을 죽인 것입니다. 자기들이 말씀을 보는 관점에서 생각해 보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을까? 무엇을 통해서 하나님께 충성할 수 있을까를 노심초사 하였습니다.

결국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기로 결의하고 세상 권력을 가진 빌라도의 손을 빌어 예수님을 죽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았던 성경관은 잘못이었습니다. 자기를 중심으로 보았습니다. 나라와 민족을 살리자는 관점에서 보았습니다. 또한 그런 메시야를 기대했던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유대인들은 자기 나라와 민족을 살려주는 그런 메시야가 와야만 환영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이 예수님을 인정하셨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유대인들의 편을 든 것이 아니라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편을 든 것입니다. 그 아들이 승리했다는 것입니다. 대제사장을 비롯하여 예수님을 죽이는데 가담한 모든 유대인들이 틀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자신의 부활을 보여주시면서 증거 하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한 십자가만이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이 구원 얻는 길, 새 생명을 얻는 길은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아니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성경을 보고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가는 길은 멸망의 길이고 하나님이 인정하시지 않는 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을 찾아왔던 마리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도마가 없었던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는 사실입니다. 도마는 자기가 직접 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다시 도마가 있는 자리에 나타나셔서 자신의 부활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도마가 확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고 부활을 확인시켜주기 위한 뜻도 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도마가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겠다는 것을 통해 계시해 주실 뜻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도마가 있는 제자들의 자리에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셨다는 것은 도마를 비롯한 제자들, 그리고 모든 인간들이 어떤 존재인가를 보이시고 꾸짖는 차원에서 나타나신 것입니다. 본 장에서 가장 많이 등장되는 낱말이 무엇인가 하면, “본다는 말입니다. 1, 5, 6, 8, 11, 18, 20, 25, 27 29절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 중에서 8절에 보면, 무덤에 온 제자 베드로와 요한이 들어가 보고 믿더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0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자신의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고 했습니다.

성경이 지금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제자들이라 할지라도 이 정도 수준이며, 이와 같은 존재들이라는 것입니다. 즉 보고 믿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그렇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도마에게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29)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우리는 무조건 예수님을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는 의미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뜻이 아니라 이제는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눈으로 보고 믿는 방식으로 구원을 이루시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무엇으로 하신다는 것입니까?

말씀으로 증거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오셔서 말씀을 성취하신 일이기에 말씀으로 자기 백성들을 만들어 가시겠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증거 하시되 누구를 증거 한다는 것입니까? 31절에 보니까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를 증거 한다고 했습니다. 그 이유는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더 이상 예수님께서 지상에 나타나셔서 부활을 보여주시는 방식으로 예수님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으로 예수님을 증거 해서 믿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책입니다(5:39).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죽었다가 살아난 그런 차원의 소생이나 환생의 차원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가져오신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것은 다시 반복될 수 있는 차원이 아닙니다. 그 새로운 세계에 자기 백성들을 불러 모으시는 방법은 자신의 부활을 계속해서 보여주시는 방식이 아니라 기록된 말씀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방식입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 4:18)고 하면서 우리의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다른 영원의 세계가 분명히 존재한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성경말씀으로 우리에게 주어졌다는 것은 인간은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고 믿으려고 하는 보이는 세계에 집착하는 존재임을 먼저 고발하고 있는 셈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떠합니까? 우리 역시 눈에 보이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집착하는 죄성을 가진 존재라고 하는 사실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성경은 끊임없이 우리의 죄를 들추어내고 고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인간의 죄악을 아는 자는 말씀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하여 말씀을 좇아 믿는 자는 17절에서 말씀한 것과 같이 예수님의 아버지가 곧 나의 아버지가 되고 예수님의 하나님이 곧 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요,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12-13에 의하면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보이지 않는 주님을 말씀만으로 믿게 하신 은혜에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주님을 위해 살아갑시다.

바울 사도는 이러므로 우리가 항상 담대하여 몸에 거할 때에는 주와 따로 거하는 줄을 아노니 이는 우리가 믿음으로 행하고 보는 것으로 하지 아니 함이로라 우리가 담대하여 원하는 바는 차라리 몸을 떠나 주와 함께 거하는 그것이라 그런즉 우리는 거하든지 떠나든지 주를 기쁘시게 하는 자 되기를 힘쓰노라”(고후 5:6-9)고 했습니다<1997525/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