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복음

39.요한복음 18:28-40 진리가 무엇이냐

불편한 진리 2015. 1. 27. 1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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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가 무엇이냐

요한복음 18:28-40

 

 

일반적으로 죄에 대하여 생각하면 무조건 무서운 것으로 생각합니다. 대부분의 교인들은 죄를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악마와 같은 모습으로 마음에 그립니다. 왜냐하면 교회에서 죄를 무서운 것으로 강조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고 하는 말만 들어도 도망가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피해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죄의 자리에서 도망해야 하고 피해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우리는 죄가 무서운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죄를 현상적인 것으로만 말합니다. 죄를 건드리면 꿈틀거리면서 튀어나오거나 무섭게 위협이 되지만 건드리지만 않으면 자신과는 아무 관계없는 것으로 착각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무슨 잘못된 행동을 해야 발생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현상화 되지 않았다고 죄가 없거나 죄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의 행동을 통해 현상적으로 나타날 뿐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죄란, 세력화 된 것으로 말씀합니다. 악마의 권세입니다. 그 권세로 우리에게서 왕노릇 하는 것입니다(5:14,17). 이런 점에서 죄가 현상적이기도 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내면화 된다는 데 있습니다. 양의 탈을 쓴 이리입니다. 자주 만난 사람같이 아주 친근감 있게 다가옵니다. 악마의 모습이 아닙니다. 현자, 도덕군자의 모습니다. 광명의 천사와 같은 모습으로 가장하여 나타납니다(고후 11:14-15).

이 때문에 예수님은 내면화 된 죄에 대하여 산상수훈에서 지적하셨던 것입니다. 살인이라는 것이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형제를 미워하는 것조차도 살인이라는 것으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사실 죄인 줄 모르고 행하는 것이 더 많습니다.

사탄의 권세에 매여 살면서도 애써 부정하려고 할 뿐입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죄를 안지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인간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성경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에 대하여 또한 죄의 권세에 매여 있는 인간의 실제적인 모습에 대하여 날마다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발견하는 죄악된 인간의 모습이 바로 자기 자신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사탄은 바리새인들 통해 노골화 되었습니다. 철저히 율법과 종교적인 경건으로 치장되어 있었습니다. 아마 천국 리스트라는 것이 있다면 1, 2, 3번은 대제사장을 비롯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평소에 가장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한다고 여겼습니다. 적어도 유대인들은 그들이 악마의 하수인이라고는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28절을 보면 그들은 철두철미하게 율법을 지켰습니다.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고 했습니다. 유월절 절기를 잘 지키기기 위하여 부정한 이방인의 관정에 발을 들여 놓는 것을 삼가하였습니다. 자기들은 율법에 대하여, 즉 진리에 대하여 완벽한 것을 추구하면서 잘 지킨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가는 그들이 진리를 수용하고 진리의 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진리를 거스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진리는 예수님이기 때문입니다(8:31-32, 14:6). 대제사장을 비롯한 유대종교의 기득권을 가진 자들은 자기들뿐만 아니라 빌라도까지 합세시켜서 진리를 거스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을 자세히 보면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38). 물론 그가 말하는 죄란 법정적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유대인들의 요구대로 십자가에 못 박도록 넘겨주는 이유는 자신의 명예와 자신의 삶의 유익과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진리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거리에서 열심히 전도하는 사람들이 외치는 문구 중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지옥가면 안됩니다!” 이 말을 들었을 때에 가슴이 뜨끔하였습니다. 지옥가면 안됩니까? 그러면 지옥 갈 사람은 아무도 없어야 합니까?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진리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옥 갈 사람은 지옥가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니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천국에 갈 사람은 아무도 없고 오히려 전부 지옥에 갈 사람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긍휼이 죄인들에게 베풀어졌습니다. 그 긍휼은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의 긍휼을 받은 자만 천국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누구도 자신은 지옥에 갈 수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실 모든 사람은 다 구원 받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천국을 다 좋아하고 지옥을 싫어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누구든지 천국과 지옥을 택하라고 한다면 지옥을 택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인간이 노력하고 힘을 쓴다고 해서 천국에 갈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선한 일을 함으로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가상 시뮬레이션에 빠져 있습니다. 그렇게 가정된 목표에 자신을 밀어 넣고서는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을 뿐입니다. 자신을 최면에 걸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천국에 갈 수 있을 것이라고··· 지금의 한국 기독교도 이와 다를 바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 증거가 무엇인가 하면 진리에 대하여 관심이 없다는 것입니다. 인간이 만들어 놓은 교회라는 조직체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그분으로 말미암아 천국을 누리는 삶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빌라도와 같이, 대제사장이나 바리새인들과 같이 예수를 이용해서 자기가 살고자 하는 일에는 열심입니다. 자기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예수님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 자신이 신이 되어 자신을 섬기고 있을 뿐입니다.

빌라도가 진리가 무엇이냐?”(38)라고 물었으나 실상은 진리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의 답변을 기대하지 않는 말로 진리가 무엇이냐?”라고 비꼬았을 뿐입니다. 비단 빌라도뿐만 아니라 유대종교 지도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그러합니다. 진리에 관심이 있는 인간이라고는 없습니다. 이미 예수님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고 하셨습니다(5:42).

그러나 진리에 속한 자는 예수님을 알고 섬기게 되어 있습니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37)고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새롭게 바뀌지 않고서는 안 됩니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을 이해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만드신 새로운 세계, 새로운 시대 안에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새 것으로 바뀌지 않고서는 불가능합니다.

요한복음 5:39에 의하면, 성경은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만 긍휼을 입은 자만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 하는 것으로 말씀을 보게 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진리에 대하여 관심이 있는 자란 성경 말씀에 관심을 가진 자입니다. 진리란, 우리가 생각하는 식으로 다수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좋은 환경 안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물질의 풍요함 속에 있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서로 교제를 나누면서 기뻐하며 즐거워하는 것 속에도 있지 않습니다. 진리는 십자가의 피흘림 속에 있습니다.

내가 빌라도와 같이 진리에 대하여 관심이 없었던 자였습니다. 내가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율법을 가지고 진리를 거스르는 그런 자였습니다. 바로 내가 고상한 경건과 온갖 종교적인 행태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던 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분의 십자가 긍휼이 나로 하여금 말씀을 보게 하셨습니다. 진리에 관심을 가지도록 바꾸어 놓으신 것입니다. 진리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나로 하여금 십자가의 피흘림을 통해 알려진 비밀의 경륜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가 관심 가져야 하는 것은 오직 진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강도질 하는 자가 예수 그리스도를 못박은 것이 아닙니다. 전과 몇 범이나 되는 사람이 예수님을 살해한 것이 아닙니다. 일주일에 두 번씩이나 금식을 하고, 아주 사소한 것까지도 십일조를 꼬박꼬박 하는 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하루살이는 걸러내었으나 그것보다 몇 천 배 큰 약대는 삼키고 말았습니다.

나의 찬양, 기도, 전도, 예배 이 모든 것들을 가지고 내가 주님을 해치고 공격하였던 자임을 고백합시다. 율법을 먼저 알아야 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알고 율법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죽이는 무기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알고 행하고 있다고 하는 율법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데 사용하지는 않습니까? 나는 진리에 대하여 관심이 있습니까?<1997427/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