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복음

41.요한복음 19:23-42 다 이루었다

불편한 진리 2015. 1. 27. 14:36

41

다 이루었다

요한복음 19:23-42

 

 

끊임없이 성도들을 괴롭히는 마귀의 유혹이 무엇인가 하면 의인이 되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물론 결과론적으로 따지면 의인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릴 수 있는 것이지 죄인이 천국에서 영생을 누리며 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천국이란 결코 죄인을 죄인 그대로 용납되는 나라가 아닙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죄인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의인이 되어서 천국에 가려고 하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오늘날 한국교회 교인들의 생각은 이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의로워지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오늘날 교인들은 착한 일, 선한 일 하기에 혈안이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라도 안 되면 하루에 성경 한 장이라도 읽어서 천국을 자기의 것으로 확보해 놓고자 하는 것입니다. 5분의 기도라도 해서 하나님 앞에 자신의 의로움이 비쳐져야 안심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착하고 선한 일을 하는 사람에게 물질적으로 후원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슬쩍 자기를 의인의 대열에 끼워 넣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선교와 구제에 주력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로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선교사로 못가는 용기 없는 교인들에게 헌금을 강요함으로 선교에 동참한다는 대리만족을 가지게 하는 것입니다. 자기 소유에 축나지 않을 정도의 적당한 선에서 구제를 하게 함으로 가난한 자들과 늘 함께 하고 있다는 동정심 내지는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의를 드러내게 하는 것입니다.

교인들에게는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고 엄포를 놓으면서 주보 전면에는 대문짝하게 우리가 돕는 선교지와 기관이라는 제목으로 숱한 교회와 선교사들의 이름을 열거하면서 자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선교와 구제의 모습입니다.

예수님 당시에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가진 철저한 원리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의인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죄인들과 식사하면서 함께하는 것에 대하여 매우 못 마땅히 여긴 것입니다.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면 자기를 죄에서 정결케 하는 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이런 생각들 때문에 대제사장을 비롯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철저히 율법으로 말미암는 자신의 의를 드러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죄인이라야 구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자신을 죄인으로 아는 자에게 하나님의 의가 주어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18:9-14). 자신이 지혜 있고 슬기 있는 자들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은 그런 자들을 물리치신다고 말씀합니다(11:25).

건강한 자에게 의원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환자에게 의원이 필요하듯이 예수님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셨습니다(9:13). 그렇다면 예수님은 우리를 고쳐서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에서 잘 살도록 하시기 위하여 오신 분이 아니라 우리를 예수님과 같은 존재로 바꾸기 위하여 오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인간은 죄로 말미암아 완전히 죽음의 상태에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스스로 잘 할 수 있다거나 가능성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생명과는 단절되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러기에 외부의 구원자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구원자가 하늘에서 나타났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희소식이 바로 이것입니다.

요한복음 1장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처음 창조하실 때에 하나님은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불순종하였을 때에 하나님과의 교제는 끊어졌고 인간은 죽음의 지배 아래에 놓이게 되었다고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러니 말씀으로가 아니면 이 죽음의 세계가 새로운 하나님의 창조의 세계로 바뀔 수 없다는 뜻으로 요한복음에서는 말씀이 육신으로 오셨다고 선언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이 바로 구원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의하면 그분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말씀이 성취된다고 묘사하고 있습니다. “성경에···한 것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24,36)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범죄 이후로 계속해서 자기 백성들을 통해 주신 말씀,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성취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육신으로 오셔서 해야 될 일이 다 완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선언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알기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의 생애는 33년의 생애로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 생애동안 무엇을 다 이루었다는 것입니까? 육신으로 오셔서 해야 될 일이 무엇이었습니까? 마태복음 3장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허락하라고 말씀하시면서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3:15)고 하셨습니다. 즉 예수님은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을 통해서 자신이 십자가를 지는 일을 시작하시는 것으로 밝히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모든 의를 이룬다는 것은 바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대속하고 의롭게 만드는 것은 십자가 사건밖에 없다는 것을 분명히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라고 하신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구원하시는 약속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말씀으로 말미암아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말씀으로 오신 예수님에 의해서만이 말씀이 성취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말하고 있는 영광이란 십자가였습니다. 그러므로 결국 말씀이 성취되는 십자가에 예수님께서 자신을 맡기신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었습니다. 실로 그것은 예수님 홀로 다 이루신 것임에 분명합니다. 히브리서에서 이것을 약속으로 말미암아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주어진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습니다(1:1-2). 여기서 말씀하고 있는 약속의 아들이 다 이루신 것입니다.

더 이상 우리에게서 추가할 것이 전혀 없는 완벽한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로 추가할 수 없고, 우리의 전도로 더 잘되게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홀로 다 이루신 것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입니다. 성령으로 믿는 자에게 덧입혀 주시는 것이 주님의 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내가 십자가에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고, 그 예수님의 의가 내 것으로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의 속담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다 된 밥에 코 빠뜨린다.” 아마 그 뜻은 다 이루어 놓은 일을 다른 사람이 망친다는 말인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의 신앙생활이 이런 모습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 놓으신 일을 우리가 나서서 다 망가뜨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설치면 설칠수록 주님께서 다 이루신 일을 더렵혀 놓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하나님께서 기존의 나를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나를 날마다 새롭게 창조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즉 내 안에서 무엇인가 발생된 것으로 힘을 삼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서 주어지는 힘에 자신을 맡기고 그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교회는 신앙을 외부적으로 자꾸 뭔가 일하는 것으로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예배당 짓기, 큰 행사로 교회 자랑하기, 선교와 구제로 교인들의 입 막기, 각종 기도회 열어 주기, 환경보호 캠페인하기, 이것이 오늘날 교회가 하고 있는 종교 놀이입니다.

그러나 신자라면 주님께서 이루신 십자가를 바라보고 그것에 한없는 감사의 마음을 가지는 자입니다. 십자가는 통과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없어지고 사라지는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1997518/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