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복음

37.요한복음 17:1-26 세상에 보내진 자

불편한 진리 2015. 1. 27. 14:20

37

세상에 보내진 자

요한복음 17:1-26

 

 

우리는 모든 행동이나 말에 대하여 이유가 있습니다. 하다못해 변명이라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는 말이나 행동 모든 것에는 어떤 동기나 이유가 반드시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동기나 이유를 무시하면서 살고자 합니다. 그게 속 편한 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냥 물 흘러가듯이 그렇게 사는 것에 익숙해 있습니다. 잘못된 것이 있더라도 그냥 적당하게 얼버무리면서 사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합니다. 굳이 바꾸지 않더라도 그냥 지낼 수 있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바꾸자면 골치 아픈 일들이 너스레하게 더 우리 자신을 괴롭히는 것이 싫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라면 삶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항상 있어야 합니다. 물론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해서 동기를 찾고 이유를 알아서 잘못된 것은 무조건 개혁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적어도 성도라면 무슨 동기가 있는가? 혹은 무슨 이유로 해야 하는 일인가? 그 목적은 무엇인가? 하는 이런 물음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은 맹목적인 신앙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왜 교회에 나오셨습니까? 주일이니까 주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차원에서 나오셨습니까? 계속 해왔던 일이니까 습관적으로 나오신 것입니까? 아니면 교회 나오는 일 외에는 별로 다른 특별한 일이 없기 때문이라고 답변하시겠습니까? 그렇고 그런 일들이 다 골치 아픈 일들이니까 아무 생각 없이 그냥 나온 것입니까?

우리가 지금 매 주일 모여서 하는 이야기는 그냥 시간이 남으니까 시간 때우기 위하여 잡담하는 그런 내용의 것이 아닙니다. 영생에 관한 것입니다. 여기 3절에 보니까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말씀합니다.

영생이란 하나님과 또한 그분이 보내신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영생에 대한 지식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우리가 영생을 가졌다는 것은 과연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만 알면 되지 왜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야 합니까?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하신 기도입니다. 9, 15, 20절에서 동일하게 내가···비옵나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즉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를 하나님 아버지와의 깊은 교제 속에서 전달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기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무엇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골고다로 가기 직전에 하신 이 기도에서 우리는 그분의 가장 깊은 관심사가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사실상 그분은 오직 한 가지에만 관심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오직 아버지의 영광이었습니다(1, 12:28).

요한복음 초두에서 이렇게 이미 선언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1:14).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나타내고자 하셨던 것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었습니다. 그 영광으로 인해 자기 백성들에게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렇게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나타내셔야 했습니까? 그것은 인간이 범죄 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을 가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이름, 영광을 나타내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늘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 천하에 공표되는 것이었습니다(4-5). 그런데 문제는 죄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어떤 인간도 하나님의 영광을 본질적으로 드러낼 수 있는 자가 아무도 없기 때문에 아들을 통해 이 일을 이루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영광을 받도록 하는 방법은 예수님 자신이 영광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높이 들리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써 하나님 아버지께서 최고로 영광을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에게 하라고 주신 일입니다(4).

따라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은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드러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 자신이 가장 원하는 바가 십자가였고, 곧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고 원하셨던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실 때부터 오직 십자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1절에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이란, 폭 넓게 말하자면 13-16장까지 말씀하시고 보여주신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을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16:33에서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을 이겼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승리는 십자가로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즉 예수님은 이제 십자가를 앞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이 성취되었다는 차원으로 승리를 미리 내다 보면서 이 기도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제자들과(9-19) 또한 모든 자기 백성들을(20-26) 위해서 기도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도하시는 이유는, 예수님 자신이 십자가를 통해 영생을 우리에게 주셨기 때문에 그 길을 가는 자는 예수님이 당하셨던 것과 같이 환난을 당하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길은 진리로 합류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진리로 거룩하게 될 때에만 가능한 것입니다(17). 하나님 아버지께서 나타내신 말씀 그것만 진리입니다. 그 진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14:6). 대문에 그리스도 안에서만 영광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 그분이 십자가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셨다면 우리 역시 그분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가는 것으로 영광을 드러낼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길이 바로 영생입니다. 이런 점에서 영생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3).

십자가는 자기 자신에게 영광을 돌리는 외로운 연극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동시에 영광이 되는 일이 바로 죄인들에게 생명을 가져다주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들이 다시는 각기 이웃과 형제를 가리켜 이르기를 너는 여호와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나를 앎이니라”(31:34). 이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로 완전히 성취된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은 내게 주신 영광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니”(22) 라고 하셨습니다. 즉 십자가의 그 영광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께서 나를 세상에 보내신 것 같이 나도 저희를 세상에 보내었고”(18)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영생을 가진 자로, 오직 십자가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보냄을 받았습니다. 우리가 일상적인 모든 삶을 주님이 주신대로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왜 살아갑니까? 주님이 살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살려고 발버둥치는 것은 죄악인줄 알아야 합니다. 여기 이 자리에 왜 오셨습니까? 주님이 보내서 오셨습니까? 그렇다면 그분에 대해서만 알기로 작정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직업관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늘 이렇게 말합니다. “직장이 우리의 선교지라고··· 직장이 우리의 선교지라면 가정은 선교지가 아닙니까? 이 사회는 아닙니까? 왜 그렇게 구분합니까? 직장만 구분해서 말할 것이 아니라 이 세상 속에서 우리는 주님의 십자가 영광을 드러내면서 살아가야 하는 증인입니다. 우리가 증인 노릇을 해야 하는 이유는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셔서 세상으로 보내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닙니다(14).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는 세상에 의미를 두지 않습니다. 세상이 우리를 살려줄 것으로 여기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세상에 대해서는 포기된 자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을 포기함으로 우리가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오직 십자가의 영광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23).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5:8).

우리가 교회로 왜 이렇게 모였습니까? 주님의 십자가를 드러내기 위한 이유 외에는 다른 이유가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것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포기하는 모습이어야 하고 힘으로는 이기는 것이 아니라 지는 모습이어야 합니다. 십자가를 지신 주님께서 우리를 이 자리에 보내셨고 그분의 일을 하도록 요구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매주일 모여서 말씀으로 확인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모든 일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결혼에 대한 문제도 배우자 중심이 아니라 그리스도 중심이어야 합니다. 직장을 얻더라도 많은 보수를 주는 것을 찾아 내가 편하게 잘 살 수 있는 쪽으로 초점이 맞추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드러내는 것에 중심이 잡혀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을 영생의 초점인 십자가에 철저히 조율된 자의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1997413/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