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복음

36.요한복음 16:1-33 진리의 성령

불편한 진리 2015. 1. 27. 14:19

36

진리의 성령

요한복음 16:1-33

 

 

우리는 자신을 늘 남과 비교하는 습관이 있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내 자리, 내 명예, 내 형편이 어떤가 하는 것에 관심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보다 내가 나은가 하는 것에 많은 신경을 쓰고 삽니다. 거기 안에는 무수한 세상적인 욕심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학력이 낮으니까 더 많이 공부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물질적인 풍요함을 누리지 못하니까 그것을 채우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자신의 나은 삶을 위해서 다른 사람을 힘으로 누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남의 것을 강탈하기도 하고 사기를 쳐서라도 자기의 것으로 채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교회와 비교해서 우리 교회가 얼마나 좋은가 하는 비교 의식이 있습니다. 다른 교회보다 많은 일거리가 있어야 하고, 다른 교회보다 재정이 더 튼튼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목회자나 교인들이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자존심과 직결되기 때문에 어찌하든지 교인 수를 늘리기 위하여 안간힘을 다 쓰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이웃 교회끼리 교인쟁탈전이 벌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목회자는 복음을 왜곡하여 성장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교인들에게 엄포를 놓기 일쑤입니다. 이런 현상들이 왜 생깁니까? 한마디로 말하자면 교회가 세상과의 결별을 하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그러합니다. 성령님의 지배를 온전히 받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것을 그대로 가지고 와서 성령을 이용하자는 심보밖에 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을 다 세상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성령님에 대한 가르침은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반대되는 쪽으로 강조되어 왔습니다. 은사를 주어서 인간의 명예를 높여주는 성령, 인간의 욕심을 부추기며, 가정을 지켜주고, 어려운 일을 막아주는 성령, 교회를 키워주는 성령으로 바뀌었습니다. 성령을 이용하여 자기 자신이 잘 되어 보자는 것에 불과합니다.

만약 그것이 목적이었다면 하나님께서 굳이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부활시키며, 그에 따른 결과로 성령님을 보내시는 이런 복잡한 절차를 밟으실 필요가 있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럴 필요가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처음부터 성령을 보내셔서 인간의 욕심을 채워주고 계속적으로 세상에서 잘 살도록 복을 주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의 아들을 십자가에 주시면서 먼저 세상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싶은 것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 3:16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셨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다른 것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아들을 주신 것은 단지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할 뿐입니다.

그런데 세상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인간들은 예수님을 세상에서 완전히 추방하고자 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심으로 세상이 하나님을 얼마나 싫어하고 하나님을 얼마나 반대하는가 하는 것이 여실히 증명되고 말았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을 죽이기까지 거부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세상을 악하다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7:7).

그 세상은 예수님만 죽인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자에 대해서도 똑같이 대우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사람들이 너희를 출회 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예라 하리라”(1-2). 유대인들이 예수님과 그를 따르는 자를 이런 식으로 대접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한마디로 하나님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3).

바울 사도가 예수를 그리스도로 알기 이전에 이러하였습니다. 당시의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도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섬기고 잘 믿는다고 큰소리치면서 교회에서 예수 믿는 자들을 쫓아내고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의 한국교회는 유대교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간판에는 대한예수교 장로회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실상은 대한유대교 장로회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알기는 알아도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 그리스도로 아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주는 예수로 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령님에 대한 오해도 마찬가지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이 계속 이 땅에 계셔서 자기 백성들을 돌보시는 것이 유익이 아니라 하늘로 떠나가는 것이 유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성령님을 보내실 것이기 때문입니다(7). 성령께서 오셔서 하시는 일이란 자기 백성들을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이 하신 일을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전에 성령께서 먼저 하실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세상을 책망하시는 일입니다(8). 세상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어떠한가를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즉 세상이 하나님을 싫어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살해하였다는 사실을 폭로하시는 것입니다. 세상이 예수님을 죽였고 또한 그 세상은 모든 사람들을 망하는 길로 이끌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증거 하시는 것입니다(14). 그러기에 고난과 핍박 그러한 것들을 우리에게서 제거하는 것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으십니다. 다만 그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분명히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입니다(33, 요일 5:4-5).

인간은 고난 속에서 주님을 버리고 떠날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성령님 그분은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결코 그리스도를 증거 하시는 일에는 실패가 있을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이런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 14:12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 믿는 자는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신 일보다도 큰일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큰일이란 무슨 일입니까? 이 말을, 예수님께서 행하신 놀라운 능력과 표적 그러한 것들보다 더 큰 것들을 행할 수 있다는 식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10절에 보면,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자기 안에 계셔서 그의 일을 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1절에서 예수님 자신이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믿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문맥에 비추어 볼 때에 나의 하는 일이란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일이며, 또한 이보다 큰일이란 십자가를 드러내고 증거 하는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예수님께서 지신 십자가로 말미암아 대속의 사역이 완전히 다 드러났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오늘 우리들은 그것을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일보다 큰일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예수님을 증거 하는 일이 하나님께 도움이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일은 성령께서 주도하시는 일이 되고 그분이 증거 하시는 십자가의 일이기 때문에 큰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성령님을 우리에게 왜 보내주셨습니까? 그것은 분명 하나님께서 자신의 법을 자기 백성들 속에 두며 그 마음에 기록하시겠다는 새 언약의 성취로 주신 것입니다(31:33-34). 그러므로 우리는 성령님 그분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되었고 그분이 아니었다면 우리는 세상을 좋아하면서 세상과 연합된 자로 늘 살아갈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성령님이 내게 오셨다는 것은, 아이고 이제 꼼짝 못하게 되었구나 하는 차원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것이 되었구나 하는 차원으로 받아들이는 자가 신자입니다. 이제 삶의 목적이 바뀐 자입니다. 자기를 위해서 사는 자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인도되어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자랑하면서 사는 자로 바뀐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6:14).

바울 사도는 이것을 가지고 예수의 흔적이라고 했습니다(6:17). 내게는 예수의 흔적이 있습니까? 내가 남보다 더 가지려고 하고, 내가 남보다 더 많이 하려고 하는 것에 눈이 멀어서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밀쳐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 안에 계신 진리의 성령께서 사사건건 간섭하시고 통제하실 때에 순종하시기 바랍니다<199746/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