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복음

35.요한복음 15:1-27 참 포도나무

불편한 진리 2015. 1. 26. 17:29

35

참 포도나무


요한복음 15:1-27

 

 

흔히 기독교를 생각하면 어떤 틀이나 외적인 형식을 먼저 떠올리는 것 같습니다. 성전 같은 예배당의 지성소(?)에서 가운을 입은 목사가 설교를 하고 전통적으로 행해오던 예배 형식에 맞추어 엄숙하게 드려지는 예배, 거기에 장로가 있어야 하고 또 여러 직분자들이 있어서 조직적으로 운영되어지는 것, 그것이 곧 기독교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그렇다면 성경은 그러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 기록되었어야 하고, 그런 내용들을 오늘 우리에게 제시하면서 어떤 형식과 틀을 갖춘 것으로 기독교를 설명해야 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신앙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신앙의 자기 행위에 핵심을 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얼마만큼 좋은 교회를 이루었는가? 또는 얼마나 많이 전도했는가? 기도를 얼마나 열심히 또는 오랫동안 하는가? 이런 것에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인간이라면 이런 실적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 모임이 있으면 지금 당장 관심 가는 것이 몇 명이 모였는가 하는 것입니다. 혹은 헌금이 얼마나 나왔는가? 신경이 이런 것들에 쓰이게 되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은 다 이러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외적인 것에 모든 관심을 다 빼앗김으로 인해서 본질적인 것을 많이 놓치고 있다는 데에 있습니다. 교회에 관심을 빼앗기게 되면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물론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교회를 사랑한다는 것은 주님을 사랑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대체적으로 우리가 교회에 관심을 쏟는다는 이야기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조직, 직분, 예배당, 교인수 이런 것에 한정되어 있습니다. 거기에 관심이 쏠리게 되면 반드시 본질적인 것을 외면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독교 혹은 교회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단순히 종교라는 측면에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신앙이라는 면에서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종교생활이 아니라 신앙생활이어야 합니다. 종교적인 모든 형식을 갖추어 행하는 것에 관심을 쏟게 되면 자신도 모르게 종교생활에 젖어버리는 것입니다. 종교생활에 만족하면서 천국이 보장된 것처럼 사는 것은 스스로를 멸망에 빠뜨리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신앙이란, 십자가로 집약해서 말할 수 있습니다. 십자가란 하나님 편에서 다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내 쪽에서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주님이 다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생활이란 주님과 함께라면 죽어도 상관없고 세상에서 망해도 관계없다는 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죄인이기에 구원해 달라고 하는 말조차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아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결코 내 쪽에서 무엇을 얼마만큼 했는가 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가 얼마만큼 가지고 나왔습니다 라고 하는 식으로 생각한다면 그것은 종교생활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 길은 분명 망하는 길입니다. 성경은 단연코 그런 식으로 기독교에 대하여 또는 신앙에 대해서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설명하고 나타내는 것은 구약의 방식입니다.

구약시대에는 형식과 틀을 가지고 설명합니다. 예컨대 성전, 제사의식, 안식일이나 절기, 직임 등입니다. 그것으로 무엇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까? 이렇게 잘 지키고 행하면 하나님이 구원해 주신다?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약에서 주어지는 모든 형식과 틀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비추어 이해해야 합니다. 물론 이 말이 모든 형식과 틀, 외적인 것들을 모두 부정하자는 말이 아닙니다. 형식과 틀, 조직과 제도 이러한 것들은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지고 폐기될 뿐입니다. 필요하지도 않는데 만들어서 그것에 얽매이고 실족함으로 그리스도를 가리게 할 것까지는 없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면서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자기 백성들의 처소를 마련하는 것이고, 그 처소는 곧 성령을 보내 주신다는 것이 14장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런데 15장에 와서 왜 예수님이 갑자기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1)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라고 하실 때에는 가짜가 있음을 전제하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구약성경에 보면 이스라엘을 포도나무로 말씀하신 적이 많습니다. 그런데 그 포도나무가 포도나무의 역할, 즉 열매를 맺는 일을 제대로 했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5:2, 2:21, 80:8). 그래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극복하러 오신 분이 예수님이요 그분이 참 이스라엘로 참 포도나무로 오셨다는 것입니다. 결국 농부되신 하나님께서는 참 포도나무가 아니면 다 저주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참 포도나무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기준에 맞지 않으면 심판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있는 길을 마련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인가 하면 참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는 것입니다. 그 관계를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는 것”(5)으로 말씀하시고, 그것은 곧 사랑의 관계라고 설명하셨습니다(10-12). 그 사랑의 관계는 구체적으로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13). 그러므로 예수님을 사랑하는 자가 곧 참 포도나무의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주님을 자발적으로 사랑할 수 없다는 데 구원의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입니다. 결코 인간이 할 수 없습니다. 구약에서 이스라엘의 실패를 통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예수님의 그 다음 말씀들을 통해 만세를 부르지 않을 수 없고 감사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26절에 보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 즉 구약의 이스라엘을 통해 보여주신 것은, 인간은 늘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주님을 섬길 수 없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인간에게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 나무로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참 포도나무로 오셔서 그 참 포도나무에 우리를 붙이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누가 하느냐 하면 성령께서 하신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이 친히 친구의 입장에서 인간이 할 수 없는 그것을 다 이루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한 일에 대하여 진정으로 고마워하면서 주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고난이 임할 수밖에 없는데 그래도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친구가 되신 주님을 사랑하는 것조차도 할 수 없는 인간이기에 성령님을 보내셔서 반드시 고난이 와도 주님을 사랑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14장에서 처소에 관한 이야기가 등장했어야 하고 그것이 또 왜 중요한지 여기서 확연히 드러나는 것입니다. 처소, 사랑에 관한 이야기는 결국 예수님의 편이 되지 않고는 이 세상에서 존재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기 힘으로 주님 계신 곳으로 갈 수 있다고, 심지어 자기의 목숨을 내어 놓고서라도 기어이 가겠다고 한 것은 주님과 하등의 상관이 없는 터무니없는 소리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무가 바뀌지 않으면 주님이 원하시는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열매를 맺게 하시고 그 열매를 가지가 된 우리에게 붙여주시는 것일 뿐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얼마나 외적인 일에 관심을 빼앗기고 있는지 모릅니다. 자신이 선한 열매를 만들어 낼 수 있고 또한 그것은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열매인 것으로 착각합니다. 성경 한 장이라도 읽은 날은 천국 가는 것 같고, 한 사람에게라도 전도지를 나누어 주었다면 천국이 자기 것으로 여겨지는 그런 종교생활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자기 힘으로 자기의 노력으로 주님 계신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천국에 대하여 알지 못하고 있는 소치입니까? 도리어 그것이 주님의 십자가를 모독하는 행위라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죄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끊임없는 고집입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어설픈 열매로 자기를 가장해서 결국 자신을 자랑하는 일로 만들고자 합니다.

주님이 요구하시는 것은 외적인 어떤 모양을 제대로 갖춘 성도를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전도를 많이 하는 성도인가? 기도를 오래할 수 있는 성도인가? 예배를 엄숙하고 경건하게 드리는 성도인가? 십일조를 떼어먹지 않는 성도인가? 주일을 얼마나 잘 지키는 성도인가? 빈틈없이 봉사하는 성도인가? 하는 이런 것들을 분석해서 제대로 된 성도인가로 물으시지 않습니다. 물론 이 말이 신앙생활을 아무렇게나 해도 괜찮다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형식과 틀에 자신을 밀어 넣고 그 형식에 맞추어지면 신앙생활 잘하는 것으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신자는, 실패의 연속선상에서도 자신이 늘 부족한 죄인인줄 알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예수님만 필요하다고 고백하는 자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이해하고 그 하나님의 행위를 믿고 그것을 고귀하게 여길 줄 아는 자가 참 포도나무에 붙은 자이며 또한 성령 받은 자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하는 일들을 편하게 만들고 우리 가족 어려운 일 당하지 않게 하는 일에 성령이 동원되도록 기도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도리어 십자가에 나를 못박아 죽임으로 주님의 행위만 드러나는 일에 성령이 동원되도록 날마다 기도하시기 바랍니다<1997316/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