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요한복음

34.요한복음 14:1-31 약속된 처소

불편한 진리 2015. 1. 26. 17:27

34

약속된 처소

요한복음 14:1-31

 

 

구약에 보면 인간은 하나님을 만나 볼 수 없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야곱이 얍복 강가에서 하나님을 대면하여 보았으나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대면할 수 있었지만 모세는 하나님의 등만 보았다고 성경은 증거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죄로 가려져 하나님을 만나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죄인을 대면할 수 없습니다.

생명이신 하나님이 죄인과 맞부딪히면 인간은 진노의 죽음을 낳을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과 죽음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러한 죄인들을 다시 하나님 자기 처소로 이끌기를 원하십니다. 그 방법이 언약의 중보자를 세우는 것입니다. 구약에서 하나님께서 많은 언약의 중보자들을 세우셔서 그들과 만나고 약속의 말씀을 주신 것은 결국 언약의 참 중보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 줍니다.

예수님은 자기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신다고 했습니다(13:1).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베풀어지는 하나님의 사랑을 설명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사랑을 받은 자만 주님의 사랑을 나타낼 수 있고 또한 그렇게 주님의 사랑이 나타나는 자가 제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러한 사랑을 받았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랑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 사랑입니까? 그 사랑을 내가 어떻게 알 수 있는 것입니까?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하는 사랑이란 무엇인가 상대방이 원하는 것을 다 들어주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과연 주님의 사랑이 그런 것과 다른 것이라면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무엇을 베풀어 주시겠다는 것입니까?

이제 여기 14장에 와서 예수님은 갑자기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다고 하시면서 처소를 예비하러 간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너무 쉽게 예수님이 천국을 준비하신다는 차원으로 생각합니다. 천국에 아직 제자들을 맞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서 예수님께서 준비하러 가시는 것입니까? 이 말씀은 결코 그런 의미로 생각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처소를 마련해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는데 처소가 어디 있으며, 무엇이냐 하는 것을 알기 전에 왜 처소 이야기를 하셨는지 알아야 할 것입니다. 13:36-38에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을 보고 이제 와서 우리를 두고 어디로 가시느냐고 걱정스러워 합니다. 주님 가시는 곳이라면 나도 목숨을 던져서라도 갈 수 있다고 자신의 각오를 나타내었습니다. 여기서 어디로혹은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지금 예수님과 제자들 간의 의견 차이는 예수님이 어느 장소로 이동하시느냐 하는 것과 우리도 따라 가면 되지 않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하여 예수님은 지금은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아직까지는 너희가 있을 곳이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죄인들이 하나님과 함께 거할 수 있는 곳이란 아무데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미리 그곳에 그것도 홀로 가셔야 될 이유는 그 처소, 즉 제자들로 하여금 거할만한 곳을 만들어 주기 위하여 가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만이 갈 수 있는 것을 제자들도 들아갈 수 있게 하기 위하여 자기의 신분과 같이 그들을 변화시켜 준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으로 가능하냐 하면 십자가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십자가를 지는 것에는 제자들도 결코 동참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러나 예수님의 십자가 사역의 결과로 말미암아 주어지는 구원의 자리에는 동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처소가 무엇입니까? 처소란 예수님이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과 공동으로 함께 거할 수 있는 그런 형태를 가지고 말합니다. 빌립은 처소가 어떤 공간적인 특정한 장소인줄 착각하고 있습니다. 자꾸 여기 이 장소에서 다른 장소로 이동하는 것인 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길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6).

예수님이 아버지께로 간다는 말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아버지와 함께 있다는 뜻인데 그것도 알지 못하고 제자들은 자꾸 다른 장소에 아버지가 있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고 나 있는 곳에 너희가 오지 못한다고 한 것은, 너희들은 죽어도 나처럼 하나님과 함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죄인이 아무리 하나님을 위해 죽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것이 결코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의인의 죽음만이 가능하게 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이 나타내신 것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 죽고 안 죽고 하는 문제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본래 죄인은 하나님과 상관없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과 상관없는 인간들을 이제는 살아 있거나 혹은 죽더라도 상관없이 하나님과 관계있고 함께 처소를 같이 할 수 있는 자로 만들어 주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 사건에는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다만 죄인이 하나님과 함께 거하게 되는 은혜를 누리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의 결과를 믿는 것뿐입니다. 그 십자가 사건을 우리 인간은 못 믿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이 이루어진다면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실 것이고 길 되신 예수님을 따라 하나님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실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16절 이하에서 성령님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17절에 보면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20절 보면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고 하셨습니다.

23절을 보면 더 구체적으로 이제까지 예수님이 말씀하신 그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그러므로 처소를 예비한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성령님을 보내신다는 뜻임을 우리가 알 수 있습니다.

일차적으로 성령이 먼저 제자들을 찾아와서 제자들과 함께 거하게 되면 다음으로 예수님이 오셔서 마치 예수님이 아버지와 함께 있는 것처럼 제자들도 그 방식대로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있게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결국 하나님 아버지 집에 거한다는 것은 오늘 성령이 내주하시는 삶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때에 하나님 아버지 집이 보장된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과 관계없이 사는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하나님과 관계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사실을 믿는 것조차도 우리의 자발적인 의지나 힘으로 할 수 없는 인간의 죄성을 너무도 주님은 잘 아셨기 때문에 성령님을 보내셔서 우리로 하여금 주님을 믿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다른 보혜사”(16)란 예수님과 전혀 다른 어떤 또 다른 분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주님과 같은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그 주님의 십자가 사건이 내가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거할 수 있는 은혜로 우리에게 베풀어진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렇다면 성령님의 지배를 받는 자의 삶으로 살아가시기 바랍니다<1997216/김영대 http://blog.daum.net/revea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