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사도행전

39.사도행전 25:1-12 삶과 죽음

불편한 진리 2014. 9. 30. 17:18

39

삶과 죽음

사도행전 25:1-12


세상을 산다는 것에 많은 사람들이 지겨워하고 있습니다. 요즘 같이 IMF로 인한 어려움이 가중될 때에는 그런 마음이 더욱 심하게 표출되는 것 같습니다. 지금 대부분의 사람들에게서 관심은 어떻게 사는가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을 만나기만 하면 실직에 관한 문제를 이야기합니다. 직장의 어려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물가가 안정되어야 한다는 걱정입니다. 보너스는 고사하고 월급이 제대로 나오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안부를 묻습니다. 그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어쩌면 하루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혼미한 상태요 예측불가 한 상태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때에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은 미래에 대한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더욱 알고 싶은 것은 국가의 미래가 아니고, 가정의 미래가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미래입니다. 물론 국가나 직장, 가정에 대한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나 자신과 관계되어 있다는 점에서만 관심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속해 있는 국가이기 때문에, 나의 직장, 나의 가정이기 때문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실로 큰 관심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사주팔자를 보거나 인간의 운명을 점치는 사업이 성행하고 있습니다. TV에서도 풍수지리설에 대한 문제를 다루는 시사 프로도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지금 교회들은 교인 수가 증가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교회가 부흥한다는 것으로 좋아할 문제가 결코 아닙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찾는 이유는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은 맥락에서 교회를 찾고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 운명에 대한 불확실성 이런 것들이 인간들로 하여금 교회를 찾거나 절간을 찾는 요소가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이렇게 항상 자기 개인적인 위기와 관련되어질 때에만 신을 찾는 종교심을 발휘합니다. 나의 미래에 대한 생명 보장을 예수 보험으로 대비해 놓자는 심보입니다.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천국이나, 생명은 자신을 편하게 만들어 주고 미래를 보장해 주는 것으로서의 천국이고 생명일 때에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를 믿더라도 결코 나의 삶의 전부를 예수님께 맡기려고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을 자신의 삶의 전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의 일부분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를 따르는 것을 나의 모든 육체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그분과 함께 죽는 것으로 믿지 않는 것입니다. 이 어려운 때에 어떻게 하면 예수의 힘을 빌려서라도 극복해 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예배당을 찾는 유일한 이유입니다. 이런 우리의 죄 된 심성을 성경은 심하게 꾸짖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과 관계된 일로 인하여 유대교가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것과, 또한 베스도가 처신하는 것과 관련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유대 총독이었던 벨릭스는 유대인들의 환심을 얻기 위해 바울에 대한 문제를 곧장 처리하지 못하고 정치적으로 이용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바울을 2년이나 감옥에 가두어 두었습니다. 그리고는 벨릭스의 후임으로 베스도가 부임합니다. 그가 유대 총독으로 오자 유대인들이 벨릭스 당시에 해결하지 못했던 바울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베스도에게 여러 가지로 간청도 하고 압력도 넣어서 어찌하든지 바울을 죽이려고 합니다.

베스도가 부임하지 3일밖에 되지 않은 상황에서 유대인 종교 지도자들이 바울의 재판에 관한 문제를 다시 제기 했습니다. 그러면서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오기를 간청했습니다. “베스도의 호의로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이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그를 죽이고자 함이러라”(3).

그런데 유대인들의 마음에는 다른 계획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것입니다. 바울을 가이사랴에서 예루살렘으로 옮겨갈 때에 그 노정에서 죽이려고 베스도에게 이러한 간청을 하게 된 것입니다.

며칠 후에 가이사랴에 내려간 베스도는 재판 자리에서 바울에게 묻습니다. “네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하여 내 앞에서 심문을 받으려느냐?”(9). 그러자 바울이 대답하기를 내가 가이사의 재판 자리 앞에 섰으니 마땅히 거기서 심문을 받을 것이라”(10)고 합니다.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은 자신이 로마의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무슨 특권을 누리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도행전 26:32에 의하면, 아그립바가 베스도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사람(바울)이 만일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아니하였더면 놓을 수 있을뻔 하였다.”

만약 바울이 눈치가 있어서 정치적인 문제를 빨리 간파하였다면 가이사에게 호소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아그립바 왕에 의해 놓임을 받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이사에게 호소한 것 때문에 그는 로마가 압송되어 가야 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바울의 생애가 왜 이렇게 되어가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이 왜 로마로 가야 하는지를 주님 편에서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이 하고자 하시는 일 때문입니다. 즉 로마에까지 복음이 증거되어야 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일로 인하여 로마에까지 가야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개인적인 억울함 때문에 로마의 시민권을 이용해서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고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주신 사명 때문에 로마에까지 끌려가는 운명이 된 것입니다.

사도행전 23:11에 의하면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해야 하는 그 중대한 사명으로 인해 바울이 로마로 가도록 되어 있는 것입니다.

바울 개인의 삶이 어떤 결과로 맺어질 것인가 하는 것은 성경의 관심사가 아닙니다. 그의 생애 마무리가 비참하게 되든 영광스럽게 되든 그것은 우리가 알아보아야 할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경은 사도들의 생애 마감에 대한 문제를 그토록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 않는지도 모릅니다.

바울 사도도 이렇게 말합니다. “만일 내가 불의를 행하여 무슨 사죄를 범하였으면 죽기를 사양치 아니할 것이나 만일 이 사람들이 나를 송사하는 것이 다 사실이 아니면 누구든지 나를 그들에게 내어 줄 수 없삽나이다”(11). 바울 사도는 죽는다는 것이 두려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그러기에 바울이 복음을 전했던 교회의 신자들이나 바울을 아는 많은 사람들이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을 만류하였을 때에 전혀 개의치 아니하고 예루살렘으로 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0:24). 이것이 바울 사도의 심정이었습니다. 바울은 수많은 고난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러나 외부적인 그런 모든 것들이 바울을 괴롭게 하는 문제가 될 수 없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8 이하에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형제들아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알지 못하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힘에 지나도록 심한 고생을 받아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 마음에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 하심이라”(고후 1:8,9).

주님의 일에 바울이 없으면 큰일 날 뻔 했다든지 아니면 바울이라는 사람이 없었다면 주님의 복음이 로마에까지 증거 될 수 없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서를 읽어보면 바울이 가기 전에 이미 로마에는 주님의 복음이 증거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바울을 고생시켜가며 로마에까지 보내야 하는 이유는 오직 주님 자신을 위해서입니다. 그렇게 해서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누구든지 주님께 붙잡힌 자는 주님의 일에 이렇게 쓰임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주님의 뜻을 드러내는 도구로 쓰임 받았을 뿐입니다.

그것 때문에 아무리 유대인들이 베스도에게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압송하기를 간청하여 예루살렘에서 재판하도록 요구하며, 압송될 때에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계획이 있었더라도 그 일이 성사될 수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고자 하는 계획, 그것은 한낱 인간의 계획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수고가 주님이 바울을 통해 일하시고자 하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결국 성경이 우리에게 증거 해 주는 것은, 바울의 죽음에 대한 권한을 누가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직 주님만이 가지고 계신 고유 권한이라는 것입니다. 누구도 바울을 죽이는 문제에 대하여 주님의 계획, 권한을 침범할 수 없습니다. 주님이 복음을 증거 하고자 하시는 일을 인간이 거부하거나 방해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그러니 결국 바울을 로마로 보내는 것은 누구입니까? 베스도나 아그립바 왕입니까? 아니면 가이사 앞에서 재판을 받겠다고 주장하는 바울의 주장이 있었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현실적으로는 정치적 문제와 유대인들의 종교적인 문제에 얽히고설켜서 바울이 로마로 가는 것처럼 보이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실제적으로는 주님이 바울을 로마로 보내십니다.

우리가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하는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과연 나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혹은 나의 가정, 직장의 문제는 앞으로 어떻게 나에게 유익되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인가 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누가 나의 일들을 주관하시는가? 과연 어떤 분이 역사의 모든 일들을 이끌어 가지는가?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자는 여호와시니라”(16:9)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계획을 감안해서 적절한 길로 인도하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계획을 무시하고 자신의 뜻대로 우리의 발걸음을 인도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분이 기뻐하시는 길로 그의 아들을 십자가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들이야 말할 것도 없는 것입니다. 그분이 성령으로 주장하시는 길은 내가 사는 길이냐 편한 길이냐가 아니라 주님이 가셨던 십자가의 죽음으로 몰아가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으로 걱정하지 말고 나의 운명 전체가, 나의 살고 죽는 문제가 몽땅 주님의 손에 있음을 그대로 인정하며 사시기 바랍니다. 그렇게 사는 자를 예수 믿는 자라고 합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