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사도행전

40.사도행전 26:19-29 부활 신앙

불편한 진리 2014. 9. 30. 17:20

40

부활 신앙

사도행전 26:19-29


한국 교회는 해마다 춘분이 지난 후 만월(滿月) 그 다음 주일을 정하여 부활절이라는 절기로 지킵니다. 과연 일 년에 한 번씩 부활절을 지내면서 느끼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저 우리는 습관적으로 부활절을 지내면서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나셨으니 우리도 나중에 살아나기를 기대하는 믿음을 갖자는 다짐의 반복입니다. 메시지도 그 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교인들의 마음도 부활절 특별헌금을 한번하고 계란을 나누는 행사를 가지는 것으로 한정되어 있습니다.

이런 반복이 계속되어지는 한 부활절이라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으로 인식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참신하고 획기적인 부활절로 지낼 수 있을까 하는 것으로 목회자들은 고심합니다. 그 고민의 흔적들은 교회들마다 각양각색입니다. ‘총동원 전도혹은 온가족 출석이라는 상품(?)을 곁들이거나 아니면 참신하고 톡톡 튀는 새로운 아이디어로 변화를 주려고 합니다.

부활절이라는 절기가 식상한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 주일에 무엇인가 색다른 프로그램들을 도입해야 의미가 있는 모임이 된다면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인가 하는 것을 다시 돌아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도에게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란 일 년에 한 번 정도 의미가 있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주님의 부활이 일 년에 한 번 정도 밖에 생각할 수 없는 무가치한 것입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우리의 믿음이 모두 헛될 뿐만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이 된다고 했습니다(고전 15:14,17). 그러니 일 년에 한 번 부활절을 지키고 의미를 되새기는 정도가 아니라 항상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 속에서 사는 부활 신앙이 기초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 년에 한 차례로 한정해서 부활절을 지켜야 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도 진부함을 없애려고 해마다 새로운 프로그램들을 고안해서 부활절과 연결시켜야 의미 있는 부활절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기독교의 본질을 왜곡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모독하는 행위입니다.

지금도 부활절을 기념하고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아직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을 못믿고 싶은 것 아닙니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부활절을 일 년에 한 번으로 한정해서 지킨다는 것은 예수님이 죽었기 때문에 기념하는 것 아닙니까? 마치 제사 기일처럼 여기듯이 말입니다.

이쯤 말하면 사람들은 제게 이렇게 말을 합니다. ‘당신은 왜 모든 절기들을 부정하는가? 구약에도 절기를 하나님께서 주셨고 그것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성장하도록 했잖아!’

그러나 성경에서 우리에게 말씀해 주고 있는 것은, 지금 예수님과 더불어 살고 있다면 이미 부활 안에 사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제가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부활절을 부정한다는 차원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는 항상 매일매일이 부활절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결코 절기를 통해 신앙이 성장했다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절기라는 율법을 주어서 지키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항상 어기고 자기들 유익되는 쪽으로 변개시켜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구약 성경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절기라는 율법도 이스라엘이 완벽하게 지켜낼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분이 십자가로 모든 의를 이루셨습니다. 이제 그분을 믿는 자는 우리의 의가 되시는 그리스도의 부활 안에 있게 된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여기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이 어떻게 부름을 받았는가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단순히 자기 자랑을 위한 간증이 아니라 예수님은 죽지 않으셨고 지금도 살아 계신다는 것이었습니다. 전에 율법을 가지고 예수 믿는 자들을 죽이려 했고 교회를 없애려고 했는데 부활의 주님께서 바울 자신을 부르셨다는 것입니다.

22,23절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내가 오늘까지 서서 높고 낮은 사람 앞에서 증거 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모세가 반드시 되리라고 말한 것 밖에 없으니 곧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실 것과 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다시 살아나사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 빛을 선전하시리라 함이니이다 하니라.”

그러자 바울 사도의 선포를 들은 베스도는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고 했습니다(24). 실로 베스도는 예수님의 부활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25:19에 보면 이렇게 말합니다. “오직 자기들의 종교와 또는 예수라 하는 이의 죽은 것을 살았다고 바울이 주장하는 그 일에 관한 문제로 송사하는 것뿐이라고 아그립바 왕에게 보고합니다. 도무지 베스도 자신에게는 그것이 아무 유익될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싫어하였습니다. 관심이 없든지 싫어하든지 예수님의 부활을 안 믿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여기서 주의해서 보아야 하는 것은 유대인들이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도들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에 대한 것을 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도행전 처음부터 사도들은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전했습니다(2:23-32, 3:14-15, 4:10 ). 유대인들은 그것이 싫었습니다. “사도들이 백성에게 말할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맡은 자와 사두개인들이 이르러 백성을 가르침과 예수를 들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는 도 전함을 싫어”(4:1,2) 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는 자들이 전하는 부활이라는 것이 무조건 싫은 것입니다.

그들이 싫어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 4:7의 말씀을 보면, 공회에 사도들을 붙잡아 와서 유대교 지도자들이 너희가 무슨 권세와 뉘 이름으로 이 일을 행하였느냐라고 묻습니다. 즉 그들은 예수님은 죽고 없는데 무슨 권세와 누구 이름으로 이렇게 전하는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란, 단순히 예수님이 죽었다가 살아났다 하는 것으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말입니다. 계속 예수님의 권세와 이름으로 전한다는 것은 예수님이 살아 계시며 계속 일하신다는 것을 전제하고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유대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 자신들이 주도하여 예수님을 죽였는데 그 예수님이 살아 계신다고 하면서 계속 십자가의 도를 전하고 있으니 참으로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주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아그립바 왕 앞에서도 오직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전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결박된 채로 여기 이 자리에까지 있게 된 것도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전하게 하기 위함이라고 바울은 깨닫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여기 이 자리에서도 복음을 전할 수 있게 된 것이나 또는 전하게 하시는 분은 부활하셔서 살아 계신 주님이시라는 뜻입니다. 그분이 지금도 살아 계시기 때문에 자신은 전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의 어떤 세력이라도 부활하신 주님을 가로막고 주님의 복음을 좌절시킬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까지 바울은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과거에 율법을 가지고 예수님과 교회의 일을 무로 돌리려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께서 바울을 부르셨기 때문에 바울은 지금 결박된 채로 예수님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결박당한 것이 자신에게 있어서 조금도 부끄러운 것이나 불편한 것이나 더 나아가서 고난이라는 것으로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모습으로 재판받으셨고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연합된 힘에 의해 죽임을 당하셨다고 폭로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오늘 우리들에게는 예수님의 부활이 어떤 의미입니까? 바울과 같이 결박된 모습으로라도 복음을 드러내고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 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너무도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부활을 쉽게 감상적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냥 쉽게 아무렇게나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고난과 죽음이라는 현장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지금 나의 환경이 좋으니까 우리는 얼마든지 주님의 복음을 증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직 내 남편이 건강하고 자식들 별 문제가 없으니까 안일한 생각에 주님의 십자가를 증거할 수 있다고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수 있다고 넘겨짚지 마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바울도 부활하신 주님께서 붙잡고 계셨기 때문에 결박된 상황에서도 자신의 형편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주님의 능력입니다. 살아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붙잡고 계신 것이 능력입니다. 지금도 살아 계신 주님께서 우리를 온전히 장악하고 계실 때에 우리는 복음을 복음답게, 주님의 주님 되심을 증거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부활을 알지 못하는 베스도나 아그립바 왕이나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볼 때에는 바울을 미친 것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부활이 없는 저쪽 세상에 있는 사람이 볼 때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전한다는 것이 미친 것으로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금란교회 김홍도목사의 비리가 MBC를 통해 방영되었다고 금란교회 교인들이 방송국을 에워싸고 시위를 일으키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 문제로 인하여 PC통신에서도 굉장히 시끄럽습니다. 대부분의 의견을 보면 MBC방송국이 기독교를 왜곡보도하고 탄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김홍도 목사의 재산과 여자 문제에 대한 비리가 있다 없다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저 개인적인 입장으로서는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목사의 비리를 공개적으로 MBC가 다룬 것에 대해 주님께 감사합니다. 왜냐하면 그 일로 말미암아 금란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가 과연 누구를 믿고 있는가 하는 것이 백일하게 다 드러나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금란교회는 교인수를 8만 여명으로 성장시켜준 김홍도 목사를 믿고 있었고, 한국 교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담임목사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이번 사건을 통해 공개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세상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다시 십자가로 방향을 잡게 되는 것입니다.

부활의 세계 안에서, 주님 안에서 볼 때에는 부활의 주님이 우리를 붙잡고 계시기 때문에 날마다 십자가를 보며 그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 가능한 것임을 다시 보게 되고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대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주님의 은혜를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먼 미래에 나의 부활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가 아닙니다. 지금 이 순간 예수님의 부활 세계 안에 살고 있음을 말씀으로 확인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이란, 죽음이 있는 이 땅에 죽음이 없는 새 생명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과 같이 이런 결박된 모습이라 할지라도 매일 죽고 새롭게 살려짐을 당하는 것을 경험하는 신자라면 세상의 죽음이 두렵지 않은 존재로 살아지는 것입니다. 그것을 우리는 부활 신앙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부활 신앙이란 새롭게 부활절에 대한 특별한 프로그램들을 진행한다고 해서 새롭게 고취되거나 없었던 믿음을 새로 가질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부활 신앙이란 날마다 주님과 더불어 십자가에 죽고 하나님에 의해 새롭게 살려줌을 받아서 그냥 사는 것이어야 합니다.

넘어져도 실패해도 나의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나의 생애 전체가 살아 계신 주님의 것으로 인정하며 사는 자가 신자입니다. 그런 자는 복음을 전하는 것도 사람들이 듣든지 안듣든지 주님의 복음만을 전할뿐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