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사도행전

41.사도행전 27:9-26 구원

불편한 진리 2014. 9. 30. 17:21

41

구원

사도행전 27:9-26


현대인들의 삶의 목표는 행복에 있습니다. 나의 행복과 가정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각오가 되어 있고 어떤 것이라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오늘날 이러한 현대인들의 마음을 가장 잘 이용하고 있는 것이 광고라고 생각됩니다.

그래서 TV광고에서도 보여 주고자 하는 핵심을 가만히 보면 모든 것들을 인간의 행복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광고하는 물건을 구입하기만 하면 행복해질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게 만듭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있어서 세상적인 또 하나의 유혹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러한 유혹들을 얼마나 적절히 잘 유용하며 사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오늘날 한국교회 속에서도 그대로 내재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교회대로 세상에서 하는 광고 방식을 그대로 흉내 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오면 불행 끝 행복 시작이라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에 발을 들여놓기만 하면 항상 편안한 교회라는 인식이 들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당의 실내 장식도 최대한 편안하고 아늑한 분위기가 되도록 꾸밉니다. 될 수 있으면 고난이나 십자가의 죽음에 대한 문제는 이야기하지 말자고 속으로 다짐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유혹에 매료되어 교회를 찾고 있습니다. 교인들은 교인들대로 자신이 추구하는 목표를 따로 가지고 교회를 찾습니다. 예배당에 나오면서 주님의 뜻은 안중에도 없습니다. 오직 자신이 원하는 목표와 일치 하는가 혹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채울 수 있는가를 따집니다. 그 목표는 이 땅에서의 행복이라는 것에 두고 있습니다.

교회에서 제공하는 여러 가지 것들을 얼마나 누리느냐에 따라서 삶의 질이 달라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를 찾으면서 그런 분위기에 자신을 맡기고 교회 안에서만큼은 편안함을 느끼고 행복감에 젖어보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는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을 이런 세상적인 차원으로 오해하도록 광고하고 있습니다. 구원이란, 달리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의 행복에 있는 것으로 만들고 싶은 것입니다. 오늘날 일부 교회들에서는 억지로 기쁨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일부러 즐거움을 가지고 살면 예수 믿는 것으로 오해하게 만듭니다. 그 일환으로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세미나를 열어 주는 것입니다. 가정에 즐거움이 있고 행복감에 젖어 살면 예수 잘 믿는 것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행복이란 그런 것에 있지 않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고난과 어려움이 제거된 상태가 천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고난과 어려움이 제거된 상태라고 할지라도 주님과 더불어 거하지 못하는 곳이라면 그곳은 지옥입니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구원이란 이런 점에서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이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을 누리는 주님과의 관계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평강, 기쁨을 누린다는 것은 고난과 어려움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들이 우리에게 고난과 어려움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바울 사도가 심한 어려움을 당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탔던 배가 로마로 가는 중에 유라굴로라는 광풍을 만나서 심하게 고생을 합니다. 왜 이런 고생을 바울이 당해야 합니까? 세상 모든 만물과 자연도 다스리시는 주님께서 바울에게 이런 어려움을 왜 당하게 하십니까? 조금 편하게 로마로 가게 하실 수도 있는데 이런 고생을 하게 하시는 주님의 의도가 과연 무엇입니까? 그것을 한 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에 대한 의미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이러한 사건을 전개하셨다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본문에 보면 바울 사도가 사람들을 권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이여 내가 보니 이번 행선이 하물과 배만 아니라 우리 생명에도 많은 타격과 손해가 있으리라”(10). 그러나 백부장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더 믿었습니다. 그래서 이 항해는 시작되었습니다.

사실 바울의 말을 배에 있는 사람들이 왜 들어야 합니까? 바울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바울이 비범하게 보인다든지 특별하게 보이는 구석이 아무 데도 없습니다. 더군다나 죄수의 몸으로 끌려가고 있는 상태인데 누가 바울의 말을 듣겠습니까?

남풍이 순하게 불매 저희가 득의한줄 알고 닻을 감아 그레데 해변을 가까이 하고 행선하더니”(13)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항해하기에 좋은 날씨였습니다. 자기들의 경험이 맞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얼마 못가서 광풍을 만난 것입니다. 그래서 짐을 바다에 다 던져 버립니다. 태풍을 만났을 때에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과거의 경험을 가지고 전에 태풍이 왔을 때에 했던 대로 배의 물건을 버려서 배를 가볍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도 통하지 않는 상황이었습니다. 20절에 보니까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하고 큰 풍랑이 그대로 있으매 구원의 여망이 다 없어졌더라.”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산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문턱에 서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그 때 바울 사도가 사람들 가운데 서서 말합니다.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이제는 안심하라 너희 중 생명에는 아무 손상이 없겠고 오직 배뿐이리라 나의 속한 바 곧 나의 섬기는 하나님의 사자가 어제 밤에 내 곁에 서서 말하되 바울아 두려워 말라 네가 가이사 앞에 서야 하겠고 또 하나님께서 너와 함께 행하는 것을 다 네게 주셨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여러분이여 안심하라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고 했습니다(22-25).

2년여 전에 주님은 바울에게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고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23:11). 그것을 반드시 이루어 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을 통해 로마에까지 복음을 전하고자 하시는 이러한 주님의 뜻 때문에 바울의 일행은 죽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과 함께 배에 타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목숨은 바울의 사명과 결탁되어 있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에 복음을 전하는 그 일이 수행되도록 하기 위해 주님은 바울을 호송하는 자들과 또한 그 일행들의 목숨을 보존하실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바울과 바울의 일행들의 목숨을 보호하심으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이루신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이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래 전에 아브라함에게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12:3)고 약속을 주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습니다. 그것은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축복하는가 저주하는가 하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으로 약속 안에 있는 자와 약속 밖에 있는 자로 구분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가 아닌가 하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에 어떤 길을 가셨는가 하는 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목숨을 대속물로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왔다고 하셨습니다(10:45).

이런 점에서 예수님의 생애는 십자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길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셨던 삶의 방식이었고 자기 백성들을 천국에 두시는 유일한 길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약속이란 반드시 고난과 죽음이라는 십자가를 통과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기록하면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연결해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35절 말씀을 보면, 떡을 가져다가 모든 사람 앞에서 하나님께 축사하고 떼어먹었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께서 떡을 가져 사례하시고 떼어 주셨던 최후의 만찬(22:19)을 생각나게 하는 장면입니다. 바울의 식탁이 예수님의 만찬을 기념했다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생각나게 해 준다는 것입니다.

또 여러 날 동안 해와 별이 보이지 아니했다고 본문 20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주님이 갈보리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해가 빛을 잃고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니라”(23:44,45)는 표현과 일맥상통한 것입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주님이 이루어 내십니다. 바울로 하여금 로마에까지 가게 하실 것입니다. 하지만 약속의 성취는 많은 환난을 통과하는 것으로 된다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예수님의 십자가로 이루신 완전한 구원을 바울의 생애 속에, 오늘 본문의 사건 속에 담아서 메시지화 하고 있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이 땅에 계시면서 당하셨던 그 고난을 지금 바울이 로마를 향해 가고 있는 사건 속에 그대로 담아서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해 십자의 의미, 즉 하나님께서 베푸신 구원의 의미를 바울의 생애 속에 담아내시는 것입니다.

때문에 바울의 일행이 배에서 살고 죽는 문제를 본문 20, 32, 34, 43, 44절에서 구원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주님의 약속의 성취입니다. 예수님의 피가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유대인들의 수많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그 약속을 십자가로 반드시 이루어 내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14:22).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분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라 가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향해 저주하지 아니하고 축복한다는 것은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과 환난을 마다하지 아니하고 주님이 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따라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나의 행복이 아닙니다. 고난과 죽음이라는 것을 통과한 새로운 생명이요 새로운 나라에서의 삶입니다. 이러한 구원의 의미를 보여주시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구원의 여망을 전혀 가지지 못할 때까지 주님께서는 바울의 배를 뒤흔들어 놓으셨던 것입니다.

위기에서 구해주는 하나님이 내가 믿는 하나님이라고 쉽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런 하나님은 세상 곳곳에 널려 있는 하나님입니다. 초인생활(베어드 T. 스폴딩/정신세계사)이라는 책에 보면 히말라야 산을 근처에 인도나 티벳 지역에 수많은 성자들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거기 나오는 성자들의 삶을 보면 그야말로 기적을 먹고 마시는 삶입니다. 물 위를 걷고, 병자를 치료하고, 먹는 양식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만들어 내는 것 등등 수없이 많은 기적들을 저자가 직접 목격하고 경험했다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성자들이 하는 말들도 이 책에 소개하고 있는데 그들은 전부 신의 능력을 자기 속에 내재화해서 신과 연합된 상태라면 얼마든지 기적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든지 그런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수도(修道)를 통해 신과 교통만 제대로 된다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귀의 속임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의 기독교는 이런 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빌려서 고난과 어려움을 제거해 보려는 심보가 우리의 종교성입니다. 그 종교적 본성을 억누르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일으키신 놀라운 이적들이 성경에만 있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성경 밖에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물론 그것들이 계시가 될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아닙니다. 약속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이 태풍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 살아난다는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생애, 그가 가는 길에 일어난 사건을 통해 십자가의 의미를 드러내고 그로 말미암아 베풀어진 구원의 의미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그것을 알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주님의 은혜에 날마다 무릎 꿇고 복종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 주님을 믿는다면 오늘 나의 행복에 연연하지 마시고 십자가의 구원에 자신을 맡기고 이웃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음에 감사하면서 사는 모습이 있기를 바랍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