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사도행전

38.사도행전 24:1-27 두 권세

불편한 진리 2014. 9. 30. 17:17

38

두 권세

사도행전 24:1-27


복음을 전하시는 분은 언제나 주님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항상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합니다. 말은 살아 계신다고 하지만 죽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렇게 외치면서 전도하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은 과거에 우리를 위해서 죽으셨대나 봐요. 그분을 한 번 믿어보세요! 잘은 모르지만 마음의 평화가 올 것입니다. 가정에 우환이 없어질 것입니다. 항상 기쁨이 있을 것입니다. 남편의 사업이 성공하며 자녀들이 잘 될 것입니다. 그러니 한 번 믿어봐 주세요! 혹시 압니까? 죽어서 천국가게 될지

이런 거짓 꼬임에 빠진 여인네들이 교회로 몰려왔습니다. 얼마간의 교회 생활을 통해 별로 달라진 것이 없음을 느끼고 항의를 합니다. ‘예수 믿으면 복이 온다고 해 놓고서는 왜 복이 안 오는 겁니까? 자녀들이 잘 되고 남편의 사업이 성공한다고 했잖습니까?’

이쯤 되면 으레 수학공식처럼 동원되는 말이 있다. ‘자매님! 주일 성수 했습니까? 십일조 떼먹지 않고 꼬박꼬박 했습니까? 새벽기도회에 참여했습니까? 성경은 얼마나 읽습니까? 전도는 몇 사람이나 하셨습니까? 이제까지 그렇게 안 하셨잖습니까? 자매님의 믿음이 부족해서 복이 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말이 나오면 교인들은 기가 죽고 더 이상 할 말이 없어집니다.

이것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한 단면입니다. 신앙을 전부 내 쪽에서 어떤 틀에 집어넣으면 되는 것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교회에서 요구하는 대로 좀 더 적극적으로 기도하고, 성경 읽고, 열심히 예배에 참여하고, 헌금하는 것을 말씀대로 사는 것으로 간주하고 또한 그것이 믿음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애초부터 믿음이 없는데 기도하고, 성경 읽고, 예배나 교회의 모임에 열심히 참석한다고 해서 믿음이 생기는 것입니까? 종교적 행위를 함으로 내 안에서 만들어지는 것을 가지고 결코 믿음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믿음이란 성령께서 주셔야 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2:8에서는 선물이라고 표현한 것입니다.

믿음은 주시는 분의 권세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쪽에서의 어떤 근거도 말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내가 믿었다는 말조차도 하나님 앞에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믿어졌다면 그저 감사할 뿐입니다.

그러기에 로마서 1:19-24에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가 되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는 오직 믿음으로 산다고 했습니다(1:17). 따라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의를 은혜로 베푸신 분을 위해서 살도록 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21:12 이하에 보면, 예수님께서 성전에서 소란을 일으키신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대제사장과 백성의 장로들이 이렇게 예수님께 시비를 겁니다. “네가 무슨 권세로 이런 일을 하느뇨 또 누가 이 권세를 주었느뇨?”

예수님은 유대교의 지도자들이 얼마나 완악한지를 아셨습니다. 그래서 직접적으로 답변하시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모든 권세는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권세로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는 것은 내가 다시 목숨을 얻기 위하여 목숨을 버림이라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10:17,18).

예수님은 결코 인간들보다 연약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대속의 죽음을 죽으시기 위하여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그 권세로 예수님은 나를 따르라!”고 제자들을 향해 말씀하셨고 오늘 우리들을 향해서도 동일하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에 바울이라는 한 인물도 바로 그러한 주님의 권세에 굴복된 자였습니다. 예수님을 향해 대항하고 예수 믿는 자들을 모조리 잡아서 죽이려고 했던 자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 앞에 꼼짝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때문에 바울은 일생을 주님께 붙잡힌 자로 살아가야 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상황도 우리가 쉽게 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바울을 합법적으로 죽이기 위하여 당시 로마 총독인 벨릭스에게 바울을 재판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유대인들이 한 말을 보면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보니 이 사람은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5). 전에 같이 유대교를 믿던 자였지만 지금 예수 그리스도를 전한다는 것 때문에 하루아침에 원수가 되어 바울을 두고 염병이라고 하며 이단의 괴수라고까지 말하는 것입니다.

동족이 문제가 아니고 전에 얼마나 알았느냐 그것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인간관계, 혈통의 관계는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 있습니다. 학연, 지연 등이 자신에게 유익되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인간입니다.

유대교에 방해거리가 되는 것이 있다면 언제든지 제거하는 일에 필사의 각오를 가지고 덤벼들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을 죽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먹지 않겠다고 맹세한 자들이 40여명이나 될 정도였습니다(23:12,13). 이것이 하나님을 빼버린 인간 종교의 모습입니다. 우리의 조직에 방해거리가 된다면 언제든지 하나님의 이름으로 처단할 각오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런 모습은 비단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유대교뿐만 아니라 벨릭스에게서도 동일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벨릭스가 바울을 대하는 태도가 어떠했습니까? “바울에게서 돈을 받을까 바라는 고로 더 자주 불러 같이 이야기하더라”(26)고 했고,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하여 바울을 2년 동안이나 감옥에 가두어 놓는 그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27).

빌릭스는 오직 돈과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는 일에만 신경 써고 있습니다. 어떻게 하면 바울에게서 뇌물을 받을 수 있을까? 혹은 유대인들의 환심을 싸서 총독의 권력을 계속 누릴 수 있을까? 하는 것이 벨릭스의 관심사였습니다. 여기에 바울이 죽느냐 사느냐 하는 것은 사실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바울이 무엇을 전하는가 하는 것 역시 자신이 신경쓸바는 아니라고 생각되었던 것 같습니다.

바로 이것이 세상의 모습입니다. 세상은 항상 만들어 놓은 조직체와 그에 따른 권력을 누리는 것에만 관심이 있게 마련입니다. 그것은 무엇으로 된다고 믿고 있는가 하면 돈으로 된다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는 돈이 힘입니다.

로마서 13:1에 의하면 모든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온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오지 않는 권세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그 권세를 어떻게 사용해야 합니까? 권세를 주신 분을 위해 산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그 권세가 누구로부터 왔는지에 대해서는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을 위해 권세를 쓰는 것으로 만족할 뿐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은 이런 곳에 세우신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을 향해, 유대교라는 종교적 권세 앞에서 그리고 로마라고 하는 엄청난 정치적 권세 앞에서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고 있습니다.

24절에 보니까 바울 사도는 예수 믿는 도에 대해 말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25절에는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바울 자신의 형편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세상의 권세에 의해 재판 결과가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세상의 종교적, 정치적 이 두 권세는 두 가지가 아닌 하나로 보았습니다. 곧 세상이라는 권세로 본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그 권세 앞에서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울이 본 것은 세상의 없어질 권세가 아니라 영원한 주님의 권세였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십자가를 지신 실질적인 주님의 권세가 지금 바울 사도를 붙잡고 있기에 바울은 그 권세에 붙잡혀서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할 뿐입니다.

자신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은 바울에게 있어서도 관심 밖의 일이었습니다. 바울 자신이 고통당하거나 죽는 그런 과정을 통해 계속 복음은 주님께서 증거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잘되어야 복음이 복음 되게 증거 된다는 그런 공식은 하나님의 생명책에 없습니다.

내가 성공해야 주님의 복음이 잘 증거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것은 우리 생각입니다. 우리가 만들어 놓은 종교적 형식을 행하는 것이 주님이 요구하시는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모든 신앙의 행위들을 버려야 하는 것입니다.

요즘 IMF로 인해 각 회사들마다 인력을 감축하느라고 무더기로 해고를 합니다. 웬만한 중소기업들은 하루아침에 부도가 나서 망하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이런 살벌한 상황에서 나 자신에 대하여 걱정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실직 당하지 않고 될 수 있으면 회사에 그대로 눌러 있고 싶은 것입니다. 날이면 날마다 이 걱정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의 권세에 붙잡혀 산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다시 한 번 생각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이 어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어떻게 하셔야 된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예수 믿는 것 아니겠습니까? 세상의 힘에 의해 밀려나느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걱정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그 세상의 권세가 아무 것도 아닌 것으로 보이고 세상보다 큰 권세자이신 주님이 보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하나님의 아버지께서 주신 권세로 스스로 목숨을 버리셨습니다. 종교적 정치적 권세로 예수님을 죽이고자 했을 때에 세상의 권세에 대항하여 승리하신 방법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권세에서 빠져 나가신 구멍이 십자가였다면 오늘 우리들 역시 세상과 타협하고 세상의 권세에 아부하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날마다 주님과 함께 죽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정자들을 전도하고 이 나라와 민족을 하나님께 맡긴다는 허울 좋은 슬로건 아래 한국 교회가 국가조찬기도회를 열어주는 것은 명백하게 권력에 아부하는 행위입니다. 국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중요합니다. 세상이 나의 삶에 대해서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의 생명에 대한 문제를 거머쥐고 계신 실질적인 권세자이십니다. 그분만 존귀히 여기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분만 증거하는 삶이 되시기 바랍니다. 종교적 형식에 자신을 밀어 넣는 것이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늘의 권세자로 십자가를 지신 주님의 권세에 굴복된 자가 성도요 교회입니다. 우리 교회는 이런 모습이 있습니까?(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