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사도행전

37.사도행전 23:1-11 곁에 서신 주님

불편한 진리 2014. 9. 30. 17:15

37

곁에 서신 주님

사도행전 23:1-11


종교를 가지는 사람들의 고질병이 무엇인가 하면 신앙의 근거를 내 쪽에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 확인이 되지 않으면 안 믿겠다는 식입니다. 기독교 외에 다른 종교라면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기독교에서는 불가능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를 믿는다고 하고 교회에 다닌다고 하는 사람들에게서 이런 신앙의 형태가 드러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그러한 이적들을 많이 제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런 신앙을 요구하신다고 믿고 있습니다.

성경에 기록된 이적이나 신기한 일들을 가지고 주님이 왜 이렇게 하셨는가를 생각하지 않고 내 쪽에서 나의 신앙을 확인하는 근거로 삼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성경에 기록된 대로 자기에게도 그렇게 주님이 나타나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런 마음으로 기도원을 쫓아다니고 신유의 기적이 일어난다고 하는 집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입니다. 확인해야 확실히 주님을 믿겠다는 것입니다. 원인과 결과가 반드시 납득할 수 있는 근거로 제시될 뿐만 아니라 내가 분명히 눈으로 볼 수 있고 잡을 수 있는 신앙으로 될 때에 주를 위해 살겠다는 것입니다.

뚜렷한 증거를 나타내주지 않으면 하나님도 필요 없고 예수님도 안 믿겠다고 주님을 향해 협박하는 기도를 합니다. 환상이나 아니면 병 낫는 기적이라도 한 번 보여 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것을 두 번도 아니고 한 번만 보여 달라는데 그것도 못하는 하나님이라면 무능한 하나님 내지는 살아계신 하나님이 아니라고 간주하고 더 이상 하나님을 찾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흥정이고 거래입니다. 신앙의 근거를 주님 편에 두지 않는 이상은 항상 흥정이 있기 마련입니다. 어떤 문제가 닥치면 우리에게서 이런 흥정은 항상 튀어나옵니다. 집안의 어려움이 생겼을 때에나 아니면 자식에 대한 문제가 발생되면 이번만 문제를 해결해 주신다면 주님을 위해 살겠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인간은 간사합니다. 어떻게 하든 위기만 모면하겠다는 심보입니다. 인간이 모두가 죄인이라는 사실이 이런 점에서도 역시 유효합니다. 바로 그것이 죄입니다. 하나님을 나의 소유로 만들어서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죄의 본성 때문입니다.

아담이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선악과를 먹은 그 심성이 그대로 우리 속에 들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인간이 죄인이라는 뜻입니다. 지금도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모든 인간의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믿는 사람은, 내가 믿고 싶어서 믿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로 하여금 십자가가 믿어지게 하셨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으로 특징지어집니다. 도무지 내가 복음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상상조차도 할 수 없는 일인데 주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주인으로 모시게 되었다는 고백이 있는 자가 예수 믿는 자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성도란, 자기가 무슨 결정을 가지고 살 수 있는 자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나의 주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분께 붙잡혀서 사는 삶입니다. 바울의 삶이 그런 삶이었고 또한 성경에 나타난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런 모습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우리들의 삶이 바로 이런 삶일 수밖에 없다고 바울의 생애를 통해 본문에서 보여 주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전에 주님께서 성령을 통해 말씀하신 그대로 예루살렘에서 결박당했습니다. 로마의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왜 바울을 제거하려고 하는지 그 전모를 듣고 싶어서 유대인 공회를 모으게 하여 바울을 그 앞에 세웠습니다. 그 앞에서 바울은 내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다고 고백합니다(1). 그리고는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3)고 했습니다.

여기에 유대인들의 분노가 있었습니다. 그들의 분노는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표현이었다기보다는 기존에 가진 종교 기득권을 고수하고자 한 데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4)라고 바울을 공격한 말에서 그들이 무엇을 지키려고 하는지가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와 유대인들의 관점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이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바울 사도는 예수님을 통해서 보는 하나님의 관점으로 대제사장을 향해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대제사장의 편에서 율법을 통해 바울을 보고 말하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바로 그 관점으로 예수님을 보았기 때문에 예수님을 죽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은 동일한 시각으로 바울을 보고 있고 또한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는 대제사장이 문제가 아니라 그들이 열심히 지킨다고 하는 율법을 어기면서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이쯤 되면 우리는 바울의 원수들에 대하여 가만히 계시는 하나님은 하나님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모독하는 이 자리에 주님이 나타나셔서 대제사장에게 재앙을 내리는 역사만 일으켰더라도 아마 그들이 꼼작 못하고 다 예수를 믿지 않았겠는가 하는 것이 우리의 생각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유대인들에게 나타나셔서 재앙을 내리시거나 아니면 믿도록 하는 증거를 특별하게 보여주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바울 사도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바울에게 큰 이적을 베푸시거나 특별한 증거를 주신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 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11). 이것이 주님의 말씀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에게 담대하라고 하신 것은 단순히 힘을 내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마음을 강하게 해서 조금만 기다리면 뭔가 큰일을 하게 될 것이라는 그런 뜻도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 주신 담대하라는 말씀은, 눈에 보이는 대로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조건이나 상황, 또는 상대방을 보지 말고 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이 변하는 것과는 관계없이 살라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도 유대인들의 공격과 협박에도 굴하지 말고 로마에 이르게 될 때에도 결코 그들로 말미암아 마음이 흔들릴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주님께서 주장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것을 바울 곁에 서서 말씀으로 보여주신 것입니다.

이제까지 예수님과 예수님의 일을 증거 하였으니 앞으로도 예수님을 증거 하도록 하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 그래서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 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그렇게 증거 하게 될 것이라는 주님의 선언입니다. “증거 하여야 하리라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주님의 창조 때 하신 말씀처럼 말씀대로 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이루실 열심입니다. 주님 편에서 반드시 그렇게 하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어떤 방해와 반대가 있더라도 반드시 이루어 내시겠다는 주님의 의지입니다. 바울이 신경 써야 할 문제는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주님께서 친히 바울 곁에서 일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28:18-20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이 말씀은 십자가의 길을 가셨던 주님께서 부활하셔서 하신 말씀입니다. 에베소서 1:10의 표현대로 하자면 하늘과 땅을 하나로 통일되게 하신 분이 이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분이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하셨습니다.

내가 나의 일을 하고자 하는데 주님이 와서 도와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일에 우리를 불러서 사용하신다는 뜻입니다. 십자가의 길로 끌고 가셔서 주님의 일을 하시는 데에 있어서 자기 백성들을 놓지 않으신다는 무서운 선언입니다. 이렇게 주님께 붙잡힌바 된 자가 예수 믿는 자입니다.

내가 이렇게 붙잡혔다고 믿어집니까? 그것이 주님께서 내 곁에 계시고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입니다.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는 눈에 보이는 증거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를 세상에서 세상적인 것으로 확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 것으로 증거를 얻으면 얻어지는 것과 동시에 곧 의심을 하게 되고 또 다른 증거를 찾는 것이 인간의 죄성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이런 것들을 밟고 나아가게 만듭니다. 그것은 끝없는 속임수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바울 곁에 서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울을 통해 하실 일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 말이 물론 바울이 없으면 주님의 일이 안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이라고 하는 한 죄인을 사용하셔서 일하신다는 주님의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은 자신의 일과 상관없이 주님께 붙잡힌바 된 채로 로마에까지 가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이 시편 23편에서 고백했던 대로 주님은 오직 자기 이름을 위하여의의 길로 인도하시는 분이십니다. 그것 때문에 바울은 음침한 골짜기로 가야 했던 것입니다(참고 시 23:4). 다윗이 노래했던 그 길은 예수님께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입니다.

주님은 자신이 가셨던 길과 동일한 길로 이제 예수 믿는 자들을 인도하십니다. 그 길은 사람들이 좋아하지 않는 길입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요, 좁은 길입니다. 다윗이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베푸셨다”(23:5)고 노래했듯이 원수들이 널려있는 길입니다.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바로 이런 길입니다.

사도행전 본문으로 돌아와서 12절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바울 당시에 있었던 이런 자들이 오늘도 우리를 위협하고 공격하면서 예수를 반대하고 있습니다.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그런 환경이 주어질 때에 실제적으로 가장 큰 문제는 외부적인 조건이나 환경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에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자기 자신 안에서 신앙의 근거를 확인하려고 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오직 주님 편의 십자가에 있다고 하는 사실을 다시 말씀으로 확인합시다. 오늘도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와 함께 하시면서 말씀으로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말씀 안에 살아지는 것으로 느껴진다면 그것이 주님이 내 곁에 계시는 증거인줄 알고 말씀 안에 살게 됨을 늘 감사하시기 바랍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