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사도행전

36.사도행전 22:1-21 바울의 바울 됨

불편한 진리 2014. 9. 30. 17:14

36

바울의 바울 됨

사도행전 22:1-21


사무엘상 16:7에 보면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고자 하실 때에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람은 외모를 보게 되어 있습니다. 아니 사람은 외모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은 상대의 중심이나 내면을 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사람들을 의식하고 사는 사람은 체면치레를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높은 학력을 추구하는 이유도 이런 것에 있습니다. 악착같이 돈을 벌어서 자신의 환경과 조건을 좋게 만들려고 하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입니다.

결국 종교라는 것도 자기를 포장하고 치장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겸손과 경건 이런 것들은 자기를 얼마나 훌륭한 인간으로 보이게 나타내느냐 하는 도구에 불과합니다. 이런 점에서 많은 교인들이 기도, 예배, 찬송, 전도, 헌금 심지어는 성경을 읽는 것조차도 자기의 종교적 열심을 드러내는 것으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무엇을 얼마나 하였는가에 많은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어쨌든 결과만 만들어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점에서 성경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서도 결과만 보고 말하는 경우들이 대부분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이 위대한 사도였기 때문에 바울과 같은 모습이 있으면 훌륭한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식으로 성경의 인물들을 모범으로 삼아서 그러한 결과를 자기도 만들어 내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식의 잘못된 신앙으로 나타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단 한 가지밖에 없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들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를 항상 이렇게 꾸짖고 있습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6:7,8).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은 속임을 당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자신이 영생을 심지 않은 곳에서 영생을 거두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적인 것을 심어놓고 영생을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성령에 의해 주어지는 영생이 아니라면 애초부터 심겨진 것이 영생이 아닙니다. 그것은 가짜 영생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자신에게도 영생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갖가지 종교적 형식 속에 자신을 밀어 넣고 있으나 가짜 영생을 추구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 당시에도 바울을 대적하고 죽이려고 했던 자들 속에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성경은 그것을 철저히 해부하고 또한 폭로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을 보면 바울 사도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예루살렘에서 강론을 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자기 자신에 대한 긴 변명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결코 그런 관점에서 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바울을 잡아서 고소한 것에 대한 변호의 내용이 본문에 전혀 언급되지 않지 않을 뿐만 아니라 20:11에 의하면,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증거 한 것이 자기 자신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일에 대해 증거 한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죄목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말하고 있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율법을 훼방하며 어그러뜨리고 이방인을 성전에 데리고 들어가서 거룩한 것을 더럽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유대인들이 바울에 대해서 가장 크게 분노한 것은 저가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신앙 노선을 거부하고 반대한다는 것입니다. 기존의 세력에 대하여 도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자신을 부르신 예수님, 그분이 바로 하나님이라고 강론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내가 곰곰이 생각해 보고 또 성경을 연구해 보니 이러하더라 그래서 이것이 맞구나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가 맞는지 기존에 자기가 알고 있던 신앙이 맞는지 연구한 적도 없고 심지어 꿈도 꾼 적이 없었습니다. 단지 기존에 자기가 가지고 있던 신앙이 무조건 옳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갑자기 나타나셔서 바울 자신을 십자가의 길로 끌고 가셨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울에게 나타나셨던 예수는 바울에 의해 핍박을 당하는 예수님이었습니다. 바울은 자신의 신앙관을 가지고, 자기가 믿는 하나님으로 예수님을 공격하였습니다. 자신이 전혀 주님을 향해 공격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을 때에 예수님의 부르심으로 비로소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저 자기의 신앙에 대한 막연한 확신을 가지고 새로운 종교 단체에 의해 공격을 당하기 때문에 그것을 막아야겠다는 생각해서 교회를 핍박하고 없애려고 했던 자신을 예수님께서 부르셔서 예수님의 증인으로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이제 오히려 바울은 같은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공격을 당하고 모함을 받는 그런 상태가 되었습니다.

후에 내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성전에서 기도할 때에 비몽사몽간에 보매 주께서 내게 말씀하시되 속히 예루살렘에서 나가라 저희는 네가 내게 대하여 증거 하는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17,18).

바울 사도는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을 때에 이미 예루살렘 사람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받지 않을 것이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러기에 자신이 지금 여기서 증거 하는 것도 결코 사람들이 알아들으리라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전에 예수님을 거부하고 스데반을 죽이는 일에 앞장섰던 자신의 모습이 지금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예루살렘의 유대인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다는 것을 폭로할 뿐이었습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이 없는 신앙이었습니다. 그것은 종교생활에 불과한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고소도 바울을 고소한 것과 흡사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나 그 고소의 내용을 정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겠다는 것으로 거짓 증거를 채택했을 뿐입니다(26:59-61).

스데반에 대한 분노도 바로 이러한 것이었습니다(6:13,14). 모든 유대인들이 신앙의 중심으로 삼고 있는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입니다. 성전을 모독한 것을 곧 하나님을 모독한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율법을 고수하는 것이 하나님께 대한 신앙을 유지하는 것으로 본 것입니다.

것이 바로 지금 바울이 드러내고, 공개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율법의 형식만 가지는 것으로 천국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종교적인 경건과 의식을 반복하는 것은 결국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를 핍박하고 또 다시 죽이는 결과밖에 되지 않는다는 뜻이었습니다.

바울의 바울 됨은 오직 자신이 핍박한 예수님의 부르심에 있었습니다.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에서 이렇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 자로라 그러나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9,10).

여기서 바울 사도가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란, 우리 인간이 주님을 조금이라도 생각하거나 주를 위해서 무엇인가 하려고 할 때 베풀어지는 것으로 말해지는 은혜가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죽이려고 하고 예수를 없애려고 하는 주님과의 원수 관계로 있었을 때에 주님의 부르심에 굴복되어진 상태를 가지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란, 인간이 하나님을 위해서 조금이라도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 전혀 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주를 거부하고 공격하는 그런 상태에서 주어진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그런 상태로 살자 그러면 주님의 은혜가 주어질 것이라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인간은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예수님에 대하여, 복음에 대하여 거부하는 상태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모습이었고, 지금 예루살렘에서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며,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이요 죄인 된 상태라고 말씀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마귀의 권세에 매여 있을 뿐만 아니라 그를 추종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이 말씀하신 진리를 수용하지 않습니다(8:44-46). 그러나 하나님께 속한 자는, 즉 주님께서 부르신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되어 있습니다(8:47).

연구하고 공부한다고 해서 예수님에 대해서 알아지는 것이 아니라 성령께서 오셔야만 되는 문제였습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인간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시고 십자가를 보게 하실 때에 비로소 십자가가 무엇인지 알게 된 것입니다.

성경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 또한 성경을 자기 자신이 유익되는 길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보면 인간의 죄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죄를 모르니 주님의 은혜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오히려 자신은 의롭게 살려고 하는데 세상이 자신을 악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아니라 본래 세상이 악한 것입니다. 악한 것 속에 있는 인간들이 선하다면 얼마나 선한 모습이겠습니까? 그래봤자 하나님이 보시는 악이요 죄입니다. 그 속에서 주님은 우리에게 자신의 은혜를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율법에 열심이었고 그 열심 가지고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현장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강하게 드러나고 있습니다.

비 복음적인 것이 오늘날 교회에 얼마나 큰 걸림돌이 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런 비 복음적인 교회들이 있기 때문에 참된 주님의 교회가 어떤 것인가 하는 것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게 되고 또한 신자들은 참된 교회를 갈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마치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이스마엘을 낳도록 묵인하셔서 이스마엘이 있는 중에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심으로 약속의 아들인 이삭이 더욱 견고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가짜 속에서 주님의 은혜가 더욱 견고하게 드러나도록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바울의 바울 됨을 통해 바울을 죽이려고 하는 예루살렘 가운데에서 십자가로 증거 되었습니다. 내 안에서 종교적 틀을 갖추는 것으로서가 아니라 오직 십자가의 은혜에 의해 사로잡힌바 된 인생 그가 주님의 사람이요 또 다른 바울입니다. 그 사람에게서는 인간의 냄새나 자랑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 속에서 오직 주님의 십자가 은혜만 드러날 것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