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강
주님의 뜻
사도행전 21:7-14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예수 믿는다는 사람치고 이 문제에 대하여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이 문제에 대하여 한 때 고민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내가 과연 신학교에 가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아니면 신학교에 가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이 문제로 인해 심각하게 고민하면서 아는 목사님이나 전도사님께 질문도 많이 했더랬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주제로 나온 책이 10권 이상이 되는 것으로 기억됩니다. 그 책들은 모조리 다 사서 읽었습니다. 물론 저는 수많은 상담과 책을 통해 분명한 해답을 얻지 못했으나 어쨌든 신학의 과정을 하게 되었고 지금 목사가 되어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이쯤에 와서 말씀을 보면서 한 가지 안타까운 것을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그 때 저는 많은 상담과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과 내가 신학을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을 지적받지 못했습니다. 내가 가진 생각이나 계획을 가지고 주님을 위해 일하려고 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이 생기게 된 것이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는 어떤 일에 직면했을 때에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라고 잘 고민합니다. 그러다가 자기가 계획했던 길이나 자신에게 유익되는 길로 결과가 맺어지면 그제서야 그것이 당연한 하나님의 뜻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하나님의 뜻을 그런 식으로 말씀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하여 주님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 어떻게 나타내시는가를 살펴봅시다.
사도행전 20:22,23에 보면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이제 나는 심령에 매임을 받아 예루살렘으로 가는데 저기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알지 못하노라 오직 성령이 각 성에서 내게 증거하여 결박과 환난이 나를 기다린다 하시나”. 앞으로 어떤 일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지 바울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대로부터 온 아가보라는 선지자가 바울의 띠를 가지고 자기 손과 발을 묶고서 말하기를 “성령이 말씀하시되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이 이같이 이 띠 임자를 결박하여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리라”(11절)고 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권합니다(12절).
4절에도 보면 두로의 교인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더러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권했습니다. 이 말씀은 성령의 감동으로 바울을 만류했다는 것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바울이 어떻게 될 것인지를 알았습니다. 그것을 알고나니 두로의 교인들은 바울을 아끼는 마음에서 바울이 예루살렘으로 가지 못하도록 말릴 수밖에 없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에게 있어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것은 단호하였습니다. 두려워할 수 없는 사안이었습니다. 자신을 만류하는 가이사랴의 교인들을 향해 “너희가 어찌하여 울어 내 마음을 상하게 하느냐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 받을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했습니다(13절).
“저가 권함을 받지 아니하므로 우리가 주의 뜻대로 이루어지이다”(14절). 이 말은 바울의 단호한 답변에 대한 가이사랴 교인들의 말이었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이루어지는 것에 모든 것을 맡길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뜻 앞에 교인들은 더 이상 바울을 만류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주님의 뜻이 무엇입니까? 더 나아가서 바울에게, 뿐만 아니라 나에게 향하신 주님의 뜻이란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산상수훈에서 가르치신 기도에 보니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마 6:9,10). 여기서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신 모습이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조금 나아가사 얼굴을 땅에 대시고 엎드려 기도하여 가라사대 내 아버지여 만일 할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께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 26:39).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셨고, 예수님 또한 십자가를 거부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죽이시는 것으로 온전히 드러났습니다. 결국 예수님의 뜻도 자신이 십자가에 죽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처럼 이 땅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는 기도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는 것으로 성취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막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6장에 보면 베드로가 주님의 십자가를 만류하는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 말씀하시기를 하나님의 일은 생각지 않고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을 위하는 베드로의 생각은 사단적인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 십자가였다면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의 운명은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달리 말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생애는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가셨던 십자가의 길을 그대로 가고 있음을 성경은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방인의 손에 넘겨져서 죽는 것처럼(눅 18:32) 바울 사도 역시 이방인의 손에 넘겨지게 되어 있었습니다(11절).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향해 올라가셔야 했던 것처럼(눅 9:51) 바울 사도 역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야 했던 것입니다(13절). 뿐만 아니라 십자가를 만류하는 베드로로 인해 괴루우셨듯이(마 16:23)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말라고 만류하는 가이사랴 교인들로 인해 바울의 마음이 심히 상한 적이 있습니다(13절).
이는 문자적으로 예수님과 같이 바울도 그대로 당해야 한다는 뜻이 아니라 성경은 바울의 생애를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그려 나가면서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은 예수님과 같은 운명으로 십자가의 길을 가는 자들이라고 말씀해 주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성취하신 하나님의 뜻을 펼치는 일에 바울 뿐만 아니라 오늘날 우리들도 십자가의 길에 늘어서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 때에 베드로가 예수님으로 하여금 십자가를 지지 않도록 막는 것이 예수님의 위한 것이 아니었듯이 가이사랴의 교인들이 무조건 바울로 하여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바울을 위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바울이 죽음으로 나아가는 그것이 주님의 뜻이었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성령께서는 바울에게 예수의 이름을 위해 복음을 증거하는 일로 결박 받고 죽는 것도 전혀 두렵지 않는 그런 마음을 주신 것이었습니다(13절, 20:24). 결국 바울의 살고 죽는 문제는 인간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주님의 뜻에 맡겨진 것일 뿐이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주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우리 개인적인 일을 억지로 주님의 뜻과 연관시키려고 해서는 안될 것입니다. 대부분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는다고 할 때에는 두 가지 갈림길에서 늘 고민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두 가지 물음이 내게 왜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저 멀리 계시고 이미 내가 계획해 놓은 길이 있기 때문에 생기는 갈등입니다.
그러므로 내 뜻과 내 생각을 포기한다면 오직 주님이 원하시는 길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오늘도 내일도 주님과 함께 복음을 위해 십자가에 죽는 것밖에 없는 것입니다. 내계획, 내 생각을 포기한다면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는 것으로 갈등하고 고민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주님의 뜻이란 내 생각을 포기하는 것에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은 멀리 계시면서 우리에게 두 가지 길을 제시하시면서 어느 길로 갈 것인가 결정하라는 식으로 일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주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성령을 주시고 그 성령의 인도로 철저히 자기 십자가의 길을 가도록 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렇다면 신자란 결코 다른 길이 있을 수가 없습니다. 성령께서 주장하시는 십자가의 길 외에 나의 길이란 있을 수가 없습니다.
결국 주님의 뜻이란 성령께서 우리를 십자가의 죽음으로 내모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바울은 죽음이라는 것을 두려워할 수 없었습니다. 이미 죽음이란 성령 안에서 날마다 행해지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서도 동일하게 일하십니다. 날마다 우리는 죽이고 주님의 뜻에 합당한 새로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태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더불어 사는 자는 더 이상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라고 묻지 않습니다. 날마다 성령께 붙잡혀 주님의 뜻이 무엇인가 라고 묻고 싶어 하는 인간의 욕심을 죽이시기 때문에 묵묵히 주님의 인도를 따라 그냥 살아갈 뿐입니다. 내 뜻만 포기할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날마다 주님과 함께 죽는 죽음 안에 던져 넣으시기 바랍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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