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강
우상
사도행전 19:23-32
성도들이 성경을 읽을 때에 많은 부분은 자신과 관계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들이 많습니다. 우리가 아는 유명한 구절들을 말하면 거의 불신자를 향해서 전도하는 구절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성경에서 불신자를 향해서 예수를 믿으라고 촉구하는 구절은 없습니다.
오히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만이 진리라고 하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만이 구원의 능력이 되는데 이것이 복음이라고 하는 선포입니다. 그러니까 믿으라가 아닙니다. 그러니까 인간은 못 믿는다 하는 강한 부정이 들어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끊임없이 내가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고, 성경을 보면 늘 모세와 다윗 편이고 참된 선지자들의 편이며 예수님 편이고 바울의 편에 서 있습니다.
한 번도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는 이스라엘의 잡족들 속에 들어 있지가 않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마다 예수님을 대적하고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반대하는 세력 속에 자신을 집어넣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항상 의로운 쪽에서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을 평가해 왔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사실은 성경이 제대로 깨달아질 리가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십자가의 은혜가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죄를 지적하는 말씀으로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 지적하는 죄에 대한 사항들은 항상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적용되고, 나를 미워하는 나 외에 다른 사람에게 적용된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서 적어도 자신은 예수를 믿었으니까 근본적으로 죄를 지적받아야 하는 사안에 대해서는 제외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은 불신자를 위해서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불신자는 성령을 받지 않은 자들이기 때문에 성경을 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신자들에게 주의 은혜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그러한 면이 훨씬 강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했을 때에 그 원망하는 이스라엘 무리 속에 내가 있음을 발견해야 합니다. 다윗을 죽이려고 하는 사울 편에 나 라고 하는 존재가 서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군중들 속에 아니 갖은 방법과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서라도 예수님을 없애려고 하는 전면에 나서있는 유대교의 지도자들 속에 내가 보여야 합니다.
복음을 전하고 있는 바울 편이 아니라 바울을 반대하는 그 세력 속에 나를 편승시키고 있는 자신의 부끄러운 모습이 성경을 읽을 때마다 보여야 그 사람이 성도입니다. 그렇지 않고서는 결코 주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은혜로 여겨지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 에베소에서 있었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데메드리오라고 하는 사람이 아데미라는 신상을 만들어 파는 것으로 돈벌이가 잘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난데없이 바울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사람의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20절)고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놀라운 이적들을 베풀게 됨으로 말미암아 사람들이 바울 쪽으로 몰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스게와의 일곱 아들에 대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마술을 하던 자들이 책을 모아 불태우는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에베소 사람들이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다 믿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적어도 손으로 만든 것은 신이 아니라고 하는 말에 대해서는 새로운 인식을 가졌는지도 모릅니다.
우상을 만드는 자들이 적잖은 우려를 가지면서 “우리의 이 영업만 천하여질 위험이 있을 뿐만 아니라 큰 여신 아데미의 전각도 경홀히 여김이 되고 온 아시아와 천하가 위하는 그의 위엄도 떨어질까 하노라”(27절)고 했습니다. 그들은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장사하는 것으로 세상에서 행복을 누리고 있었습니다(25절). 그것이 그들에게 있어서는 천국이었습니다. 그런데 자기들의 천국에 위기가 온 것입니다. 그것을 사수하기 위하여 그들은 바울 사도의 일행을 붙잡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삶의 위협이 된 것에 대한 복수입니다.
이처럼 세상이란 다른 사람이 죽더라도 내가 살아야 되겠다는 것이 목표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중에 다른 사람이 죽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여깁니다. 아니 상대를 제압하고 죽여야 내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욕심입니다. 그 욕심은 돈을 좇는 것으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막연하지만 끝없이 돈을 좇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사람을 살리고 죽이고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돈이 우상이 아니고 살아남아야겠다는 우리 자신이 우상입니다. 다른 사람 볼 것 없습니다. 내가 바로 아데미의 은감실을 만들어 파는 자들입니다. 우리의 직장 생활이라는 것이 돈을 우상으로 섬기고 있고 그 돈으로 내일에는 좀더 나은 자아를 표출시켜 보자는 점에서 오늘날 교회가 세상과 다를 바가 뭐가 있습니까?
교회에 나오는 분들은 우상을 섬기는 문제는 말하면 항상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안심하고 있습니다. 나는 예수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늘 우리에게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것들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느니라”(골 3:5,6)고 말씀합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 말씀을 제대로 가르치지 않습니다. 이 말씀을 가르칠지라도 교회와 관련된 것들만큼은 예외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를테면 교회의 부흥에 대한 것입니다. 양적인 성장을 원하는 것이 뭐가 나쁘냐 라고 말합니다. 교인 수를 늘리는 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이 자기 백성들을 더하여 주신다면 교회는 얼마든지 많은 수가 모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교인 수를 늘리는 그것이 교회의 목표가 되어 있고, 또한 그 목표에 대한 욕심은 정당한 것으로 소위 말하는 거룩한(?) 욕심으로 교회에서 가르친다는 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문제가 있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비성경적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한국 교회의 모든 행사는 교인 수 늘리기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모든 일이 그것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 성장에 방해되는 요소가 발생된다면 언제든지 가차 없이 제거해 나갑니다. 목회자의 시무에 대한 문제도 그러합니다. 교회 부흥을 시켜주지 못하는 무능한 목회자이기 때문에 교회 사업에 도움이 안 되는 직원으로 몰아 교회에서 쫓아내는 것이 다반사입니다.
결국 인간은 자기를 섬기기 때문에 탐심조차도 종교적으로 미화하여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기를 섬기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교회는 원하되 주님의 몸은 원하지 않습니다. 목사는 믿어주되 예수 믿는 것은 거부합니다. 예배당은 믿지만 십자가는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그래서 주님은 에베소서를 통해 에베소 사람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이것을 말하며 주 안에서 증거 하노니 이제부터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너희는 행하지 말라 저희 총명이 어두워지고 저희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저희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이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엡 4:17-20).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는 모든 것이 죽은 것이고 우상입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체험한 자들이 계속해서 떡을 얻어먹는 것을 위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시기를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요 6:2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오병이어라는 기적조차도 썩는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썩지 않는 생명이란 생명이신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주어진 예수님밖에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가 행했던 이적에 대하여 병낫기를 구하는 그것 자체도 우상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또한 주님을 기쁘시게 할 만한 것으로 보인다고 할지라도 예수님에게서 나오지 않고 우리에게서 나왔다면 그것은 우상입니다. 기독교란 하늘에 오신 어떤 분에 의해 새로운 나라에 옮겨져서 날마다 나를 옮기신 그분의 은혜를 발견하는 것입니다. 그 안에서 날마다 신기한 일을 보는 것이어야 합니다.
보통 구원을 받는다고 말합니다. 그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하니까 자기가 소지하고 있는 것으로 오해를 하더라는 것입니다. 구원을 소지하는 개념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거룩, 경건 이러한 것들을 자꾸 자기에게서 만들어 내어서 가지고 있으려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이라고 하는 것은 세상의 것을 버리는 것과 더불어 들어갈 수 있는 곳입니다. 따라서 구원이란 무엇을 받았다는 식으로 생각하기보다 세상의 것을 버리는 것으로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과 그분이 이루신 그의 나라를 받았음을 알고 더 이상 받을 것이 없는 존재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십여 년 전에 러시아 상공에 손가락이 나타나 글을 썼다는 소식이 기독교계에 파다했습니다. 어떤 극성스러운 사람은 외신 보도들을 번역하여 복사를 해서 각 교회들마다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하늘에서 글을 쓴 내용은 ‘때가 가까우니 예비하고 있으라’는 그런 내용이었습니다. 그 내용이 성경적이다 아니다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러한 것들을 기독교의 어떤 한 내용으로 생각한다는 것이 우상입니다.
은혜로 주신 것들을 깨달으려고 하지 않고 자기 행위에 의미를 두는 것이 있다면 그것이 우상입니다. 이를테면 내가 하는 기도, 예배, 찬양, 전도, 헌금 행위 등으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고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는 천국이라는 나라를 보장받아 놓은 것으로 생각한다면 곧 천국 가고자 하는 내가 우상입니다.
그렇다면 그 기도와 전도의 행위는 행운을 가져다준다는 네 잎 클로버, 럭키 세븐 같은 것 과 차이가 없고 내가 드리는 예배, 찬양, 헌금 등은 절간에서 부처에게 불공을 드리고 시주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도 우상일 수 있습니다. 주의 성령께서 날마다 나의 육체의 소욕을 못박는 십자가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그 십자가는 우상입니다.
우리 교회를 왔다 가시는 분들의 말을 들어보면 기존 교회에 대해서 염증을 느끼는 분들이 많습니다. 한국 교회가 썩었기 때문에 자신은 거기에 동화되어 썩지 않기 위해 페니실린을 찾는 것과 같이 여러 교회를 돌아다니 다니는 분들이 많이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교회를 비판한다고 해서 주를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닌 것은 버리면 됩니다. 교회를 개혁하고 뜯어고쳐서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그것이 나에게 우상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은 주님이 직접 만드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주님이 보시기에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고, 교회다운 교회로 만들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쓰는 가운데서 오히려 주님의 것을 더럽히고 본질을 훼손하게 된다는 것을 알고 내게서 만들어지는 모든 종교적인 것들을 날마다 버리는 작업이 있어야 주님을 믿는 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결국 자기를 믿기 때문에 모든 일에 대해서 애착을 가지게 되고 무엇이든지 믿고자 하는 자기 자신을 날마다 부정하고 버리며 죽이는 십자가의 삶을 살아가는 자가 주님이 원하시는 신자임을 다시한 번 확인하고 정리하도록 합시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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