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강
말씀의 위로
사도행전 20:7-12
사람들은 사는 것과 죽는 것에 대해서 민감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는다면 모든 계획과 목표가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땅의 모든 활동들은 자기 자신이 살아남기 위한 작업입니다. 이러한 생존 경쟁에서 진다면 그 인생은 실패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인간은 자신의 계획과 목표 때문에 살아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에 삶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이 땅에서 내가 무엇인가 해놓는 것이 없다면, 남겨놓는 것이 없다면 존재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리 속담에도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처럼 예로부터 우리 인간들은 자기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 생을 살아온 것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는 것에서부터 출발하고 있습니다. 결국 인간의 언어가 혼잡하게 된 것도 인간들이 바벨탑을 쌓아 우리 이름을 내자는 이유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들은 아담의 선악과를 먹는 행위에 속한 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무시하고 독립된 자신의 나라를 세우고 자기 이름을 내고자 하는 죄를 오늘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바벨탑은 오늘날도 끊임없이 쌓아가고 있습니다. 예배당이라는 바벨탑이 있습니다. 기도라는 바벨탑, 전도라는 바벨탑, 예배라는 바벨탑, 화목하고 행복한 가정이라는 바벨탑 등등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세상은 자신과 교회적인 또는 국가적인 명예와 관련된 바벨탑 쌓기 놀이를 하고 있습니다. 지금 일본에서 나가노 동계 올림픽이 열리고 있습니다. 이때쯤이면 많은 교회들의 주일 설교 제목이 거의 비슷합니다. 그 강조점의 정도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내용은 신앙의 금메달을 따자는 것으로 일색입니다. 신앙의 금메달을 따자는 것은 인생의 성공자가 되자는 것입니다. 이 때에 인생의 성공자라는 것은 예수 이름으로 세상의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거머쥐는 것을 가지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결국 교회에서도 우리 이름을 내자는 죄를 강조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신앙이란 금메달을 따자는 목표를 가지는 것도 아니고 우리 이름을 내자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 말씀대로 주어진 신앙이라면 우리의 이름을 무시하자는 것입니다. 무시된 우리 이름 위에 주님의 이름만 드러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으로 보면 그것이 실패자입니다. 그러나 천국에서는 우리의 이름이 무시된 나라입니다. 우리의 의와 공적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곳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행해지는 모든 일이라면 천국과 무관한 것입니다.
결코 성경은 바울 사도가 얼마나 위대한가? 혹은 그들이 행한 일들이 자랑스러운 일이다 라고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들의 이름과 그들이 행한 일들을 무시하고 무의미한 차원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그들을 붙잡으시고 그들로 하여금 그러한 일들을 행하게 하시는 분은 오직 주님이시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성경을 다시 보아야 합니다. 내가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거기에 대하여 성경이 무슨 지침이나 어떤 교훈을 주는가 라는 식으로 성경을 보아서는 안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도 그런 차원에서 주어진 것이 결코 아닙니다. 본문의 말씀을 보면 드로아에서 있었던 한가지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드로아에서 바울 사도가 오랫동안 강론했기 때문에 창에 걸터 앉아있던 유두고라는 청년이 떨어져 죽었습니다. 바울이 내려가서 “생명이 저에게 있다”고 하면서 유두고를 살렸습니다. 이 말씀의 마지막 부분에 보면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살아난 아이를 데리고 와서 위로를 적지 않게 받았더라”(12절)고 했습니다. 여기서 위로를 받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죽었다가 살아난 것으로 인해 위로를 받은 것입니까? 물론 인간적인 입장에서 보자면 그것으로 인해 큰 위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애초부터 우리를 위로하고 우리의 자존심을 세워주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유두고를 살려서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게 했다는 아주 간단한 의미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바울 사도가 유두고를 다시 살림으로 말미암아 말씀의 위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죽음이란 말씀과의 결별입니다. 다시 말해서 생명되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된 것이 죽음입니다. 그 죽음의 결과와 증거로 죽음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죄 없는 분으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과 단절된 죽음이라는 것을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죽음이 지배할 수 없는 새로운 부활의 나라를 친히 세우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유두고를 살린 것은 바울의 하나님 나라 전파와 무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이런 점에서 바울 사도가 행한 이적들은 바울 자신이 일으킨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행하신 것이고 주님께서 그의 나라를 계속해서 보여주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그의 나라에 대한 선포는 바울 사도를 통해 계속되고 있었습니다(19:8-12). 그 나라는 온전히 주님의 말씀에 의해 지배되는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여기 본문에서 유두고를 살린 것은 유두고를 살린 이적 자체로 위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바울이 이제까지 강론한 것에 대한 실질적인 실물교육으로서 말씀 안에 있는 것이 어떤 것이며 말씀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란 어떤 상태인가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의 위로입니다. 즉 말씀의 지배를 받는 상태란 죽음을 극복하는 주님의 나라임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것이 큰 의미가 있습니까? 그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죽어서 천국을 보고 왔다고 해서 그것이 우리에게 중요합니까? 우리가 교훈받을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미 요한계시록을 통해서 하나님의 계시는 기록된 말씀으로 주어졌습니다. 여기에 어떤 것도 더하거나 뺄 수 없습니다. 말씀 그대로 믿는 자가 복되다고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말씀대로 사는 것이 복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원하는 대로가 아니라 주님의 뜻대로 예수님께만 관심 가진 자세로 살아진다면 내 의지 대로 뭐가 하나도 되는 것이 없는가 라고 생각할 것이 아니라 말씀대로 살아지는 그것이 복이라는 하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죽어다 살아나는 기적 체험하지 않아도 죽었다가 살아나신 주님 안에 있으면 그것이 복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성취된 것이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자에게는 위로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나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위로를 찾으려고 하지 마십시오. 대부분의 교인들은 성경에 밑줄을 긋는 곳은 자기에게 위로가 되고 은혜가 되는 말씀입니다. 어느 것은 은혜가 되고 어느 말씀은 은혜가 안 되는 것은 없습니다. 그것을 은혜로 느끼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에 나의 욕심으로 성경을 보기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해야 할 것은 바로 이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알기 위해서 나의 육체의 소욕을 십자가에 날마다 못박게 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내 중심에서 나를 위해 성경을 보지 마십시오. 나를 위한 어떤 위로가 있는가 하는 마음으로 성경을 펼쳐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고생하셨고, 왜 죽으셔야 했는가 하는 것으로 보시기 바랍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자가 신자입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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