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강
교회의 사명
사도행전 20:17-35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을 보면 두 부류가 있습니다. 교회에 나오면서 (물론 자기는 예수님에게만 관심 있다고 말은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관심이 없고 오직 자기가 원하는 것에만 관심을 두는 사람이 있습니다. 또 다른 한 부류는, 교회라는 조직체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예수님에게만 관심이 있는 자가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관심이 없고 자기가 원하는 바에만 관심을 두고 교회에 나온 사람은 교회에 나와서도 성경 말씀에서 교회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는지에 대해서는 무관심합니다. 오직 자기가 생각한대로 되는 교회를 꿈꾸고 있습니다. 막연하게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으로 생각하고 하나님이 세우신 교회 안에 있으면 구원받았다고 확신하고 싶은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한 주일이라도 교회에 나가지 않으면 불안한 것입니다. 그 주간에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하나님께서 벌주실 것 같은 그런 느낌을 가집니다. 그래서 무엇인가 자기에게 유익되지 않는 일이 일어나면 하나님의 보응이라고 단정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하나님의 재앙을 피하기 위해 매주일 교회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관심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관심이 있고, 교회라는 조직체에 관심이 있습니다. 교회를 통해서 온전한 자기를 실현해 보자는 쪽으로 나갑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교회의 사명은 선교와 구제에 있다고 정해 놓는 것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선교와 구제에 있기 때문에 어떤 일로든지 거기에 참여만 되면 하나님의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몇 푼의 돈이라도 선교 헌금으로 내놓으면서 헌신을 하고 있다고 흐뭇해합니다. 돈으로 먼 이국땅에서 선교하는 선교사의 복음 전하는 고난에 동참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목사에게 충성하고 교회 조직체의 요구에 응하면 주를 위해서 사는 것으로 여깁니다.
이러한 교인들의 심리를 오늘날 목회자들은 잘 파악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온갖 잡동사니 같은 프로그램들을 얼기설기 만들어 놓고는 참여하지 않으면 갖은 회유와 협박을 동원해서 교인들을 괴롭히고 있습니다. 천국에는 상급이라는 것이 있어서 열심히 하는 자에게 주어진다고 잘 알지도 못하는 성경 구절들을 갖다 붙입니다. 그러면서도 말은 교인들을 위해서 이렇게 한다고 합니다. 교인들을 천국에 가도록 하는 일이라고 사기를 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은, 오직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흘리신 희생의 피가 구원의 능력이 됨을 믿는 자가 가는 곳입니다. 아무나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 조직체를 위해서 열심히 일한 자가 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더더구나 천국에는 열심히 봉사한 자에게 많은 상급이 주어지고 적게 봉사한 자에게 적은 상급이 주어지는 그런 차등이 있는 나라가 아닙니다. 주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주신 영생 그것 자체로 기뻐하고 주님께 영광 돌리는 나라가 천국입니다.
그러므로 오직 예수님에게만 관심 가진 자는 이 땅의 교회 조직체가 어떻게 되느냐 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교회에 관심이 있고, 그 교회 조직체를 통해 온전한 자아를 실현시키려고 온 자는 교회의 많은 일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특히 선교와 구제의 일이 제대로 시행되지 않으면 교회답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반대로 선교와 구제가 활발하게 되어지고 있으면 그것은 교회다운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전혀 그렇게 말씀하고 있지를 않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는 바울 사도가 밀레도에 들러 에베소 장로들을 청하여 말씀을 나누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까지 자신이 어떻게 무엇을 위해 살아왔는가 하는 이야기를 합니다. 이미 성령께서 가르쳐주신 대로 이제는 예루살렘으로 가면 환난과 결박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마지막으로 에베소 장로들에게 강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 가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바울이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보여집니다마는 결코 바울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가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바울의 행위나 말이 성경에 기록되어졌다면 그것은 주님을 계시하는 차원에서 기록되어졌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바울 개인에 대한 자랑을 성경에 기록해 놓은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자기 피로 사신 교회”를 치게 한 모든 감독자(장로)들에게, 즉 모든 주님의 몸된 자들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그것을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했던 일과 결부하여 교회에 말씀으로 주시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 사도는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 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24절)고 했습니다. 바울 자신의 전 생애는 오직 복음을 전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는 일에 자기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길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은 도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바울이 에베소 교회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를 향하여 “지금 내가 너희를 주와 및 그 은혜의 말씀께 부탁하노니 그 말씀이 너희를 능히 든든히 세우사 거룩케 하심을 입은 모든 자 가운데 기업이 있게 하시리라”(32절)고 합니다. 교회는 이렇게 말씀이시고 살아계신 주님께 맡겨진 공동체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의 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님이 전했던 것, 바울이 나타내었던 것들을 그대로 증거하고 드러내는 자들이어야 합니다. 바울 사도가 무엇을 증거 하였습니까? 21절에 보면, “하나님께 대한 회개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을 증거 했다고 말씀합니다. 24절에서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25절에서는 “하나님 나라”, 27절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전파하였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바울 사도의 사명이었고, 우리들에게도 동일하게 맡겨진 사명입니다. 교회의 사명이란 다른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나라이고, 하나님의 뜻입니다. 교회의 할 일이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나타내고 전파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그것을 나타내고 증거 하기 위해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지지 않고 살았던 바울 사도와 같이 주님께 생명을 바치는 교회여야 합니다. 그것이 교회의 사명입니다.
그 사명을 누가 합니까? 32절의 표현대로 하자면 교회는 이미 주님의 은혜의 말씀에 맡겨졌습니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사로잡고 있는 것이 교회입니다. 교회는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 안에서 말씀대로 말씀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교회는 주님의 몸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주님께서 움직이시는 대로 움직여져야 합니다. 궁극적으로 교회를 통해 복음을 증거 하는 일을 누가 하느냐 하면 주님이 하신다는 것입니다.
교회라는 주님의 몸에 속해 있다는 것은 주님의 일에 부름 받은 것입니다. 주님의 일에 부름 받았다는 것은 복음을 증거 하는 일로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결국 교회란 주님의 사명 안에 있습니다. 더 이상 자신을 위한다거나 인간의 조직체를 위한 모습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자기의 목숨을 자기의 것으로 여기지 않는 모습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사명을 받았다는 것은 목숨을 예수님께 바치고 이미 죽은 상태에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 주님 자신이 생명이고 그 생명이 가장 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주님께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35절)고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끊임없이 주어야 합니다. 구제와 선교한답시고 세상을 향해서 물질과 알량한 동정을 베푸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교회는 이런 교회의 사명을 제대로 감당하노라고 주보의 전면에 소위 “우리가 도우는 교회와 기관”이라는 제목으로 시골교회와 개척교회의 이름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한국 교회가 사명이라고 떠들어대면서 하는 구제와 선교는 세상적인 차원에 머물고 있을 뿐입니다. 교회의 사명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라 도무지 세상이 알지 못하는 하늘의 비밀인 복음을 증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뜻이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주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 사명 때문에 사도행전 9:15,16에 의하면, 바울은 무수한 고난을 받아야 할 것으로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날 역시 주님의 몸 된 자들에게도 이러한 고난에서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서 나타난 주님의 기도 내용을 보면, 교회는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께로부터 보냄은 받은 자로 말씀하셨습니다(요 17:18). 자기가 자기를 보낸 자는 오직 자기의 목표와 비전을 이루는 일에 관심이 있기 때문에 교회라는 조직체를 바라봅니다. 목사에게 관심이 있습니다. 자기가 교회에서 가지는 명예와 직분 등에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으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자는 자기 자신의 모든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고 나를 세상에 보낸 분이 누구인가에 관심을 쏟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오직 예수님께만 관심이 쏠려 있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복음을 증거 하는 일에 내 목숨을 내 것으로 여기지 말고 주님의 복음을 위해 날마다 죽기 위해서 사는 그것이 기쁨인줄을 아시기 바랍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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