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사도행전

31.사도행전 19:8-20 하나님 나라

불편한 진리 2014. 9. 29. 20:38

31

하나님 나라

사도행전 19:8-20


누구나 가장 소원하는 것이 있다면 천국일 것입니다. 천국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만큼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천국이 막연히 좋은 곳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이렇게 무조건 좋은 곳으로 알고 천국을 원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두 가지에 근거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세상에 대하여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부자든 가난한 자든 세상에 대하여 만족하고 사는 사람은 없습니다. 부자는 부자들 나름대로 다 고민이 있고 만족하지 못합니다. 뿐만 아니라 가난한 자는 가난한 자들 나름대로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생각하며 만족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천국을 그토록 원하는 또 한 가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죽는다는 것에 있습니다. 분명히 이 세상만으로 끝이라고는 생각이 안 되는 것입니다. 아니 저 세상이 있든 없든 죽은 다음에 혹시 천국이라는 곳이 있다면 그곳에 가는 것이 좋겠다는 사후 보장을 받아놓고 싶은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후 보장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이 돈에 있다고 보는 것입니다. 돈이 있으면 행복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모든 목표를 돈에 걸고 죽기 살기로 돈을 모으는데 일생을 소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막상 많은 돈을 가지고 보면 그것으로도 행복이 오는 것이 아님을 압니다. 그것을 깨닫게 될 때에는 인간의 관심이 종교로 돌려지는 것입니다.

어차피 돈으로 만족이 되지 않는 세상이니 사후에 대한 보장을 만들어 놓자는 심산으로 헌금을 듬뿍듬뿍 하며 종교에 열의를 가지는 것입니다. 마치 보험이라도 들어 놓듯이 말입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에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천국도 돈으로 사려고 하는 마음으로까지 우리의 욕심이 뻗쳐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과연 천국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는 먼저 천국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에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는 천국에 대한 개념을 깨뜨려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알고 있는 천국은 지옥이기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가고 싶어 하는 막연히 그리고 무조건 좋은 천국은 성경에 없는 천국입니다. 그리고 또한 실제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천국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그러면 성경에 말씀하는 천국은 어떤 것입니까?

바울이 에베소에서 권면하고 말씀을 가르치되 3개월 동안 했다고 합니다. 8절에 보면 담대히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하며 권면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합니까? “어떤 사람들은 마음이 굳어 순종치 않고 무리 앞에서 이 도를 비방”(9)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세우고 두란노서원에서 날마다 강론하였습니다. 도를 비방하는 자들과 구분하여 따로 2년 동안 가르쳤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바울의 손으로 희한한 능을 행하게 하셨다고 되어 있습니다(11). 즉 바울이 이적을 베푸는 내용이 등장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강론과 더불어 이적을 행한 것에 대해 기록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왜 여기서 하나님을 말씀을 전했다든지 아니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사실을 전했다고 말씀하지 않고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 강론했다고 합니까?

그것은 이적을 통해 시사 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말씀하려고 하는 의도가 있는 것입니다. 거꾸로 말하자면 바울이 이적을 행하는 것을 통해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가 하면 바로 천국, 즉 하나님 나라입니다. 마태복음에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예수께서 온 갈릴리에 두루 다니사 저희 회당에서 가르치시며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백성 중에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니 그의 소문이 온 수리아에 퍼진지라 사람들이 모든 앓는 자 곧 각색 병과 고통에 걸린 자, 귀신들린 자, 간질하는 자, 중풍병자들을 데려오니 저희를 고치시더라”(4:23,24). 천국 복음이 전파되는 것과 더불어 제시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질병을 고치며 약한 것을 고치시는 것입니다.

이는 구약적 배경을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대표적으로 이사야 35:5,6에 보면, “그 때에 소경의 눈이 밝을 것이며 귀머거리의 귀가 열릴 것이며 그 때에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뛸 것이며 벙어리의 혀는 노래하리니 이는 광야에서 물이 솟겠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를 것임이라고 예언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메시야를 통해 성취되어지는 하나님 나라를 여러 가지 병으로 말미암아 억눌려 있는 자들이 거기서 놓임을 받는 것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면서 병든 자와 귀신들린 자들을 고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즉 예수님 자신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나라가 왔다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속에서 제자들이나 바울 사도가 이적을 행하는 것을 통해 오늘날 우리도 믿음이 있고 능력을 받으면 이렇게 이적을 마음대로 나타낼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일은 계속되고 있다는 뜻입니다. 결코 유대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고 해서 끝난 것이 아니라는 의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름을 높이고 그 이름 앞에 굴복하지 않는 이적은 아무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지금 바울 사도가 복음을 선포하고 있는 모든 대상은 죄의 권세에 철저히 매여 있다는 것을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바울이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강론할 때에 그 도를 비방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또한 무조건 바울의 몸에서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져다가 병을 고치려고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이 행하는 것처럼 예수를 빙자하여 이적을 나타내며 인기도 끌며 돈을 벌어 보려고 하는 자들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 속에 나타난 사람들의 모습이 한국 교회 교인들의 상황을 다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를 빙자하여 자기 이득을 챙기려고 하는 모습이 지금 한국 교회의 상태입니다. 자기를 위한 예수를 믿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믿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권세에 매여 있는 인간의 모습입니다.

유대의 제사장 스게와의 일곱 아들이 귀신을 대항하니까 귀신들린 사람이 말하기를 예수도 내가 알고 바울도 내가 알거니와 너희는 누구냐?”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악귀 들린 사람이 그 두 사람에게 뛰어올라 억제하여 이기니 저희가 상하여 벗은 몸으로 그 집에서 도망했다고 합니다(16). 이 일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두려워하면서 주 예수의 이름을 높이게 되었습니다(17).

성경에서 말씀하는 천국, 하나님 나라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나라입니다.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1:13,14)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얻은 상태가 천국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아들의 나라에 옮겼다고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는 모두가 예수님에 의해 옮겨짐을 당했다고 고백하는 자들뿐입니다. 자기 힘으로 나왔다고 하는 자는 발붙일 곳이 없는 나라입니다.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없는 나라는 하나님 나라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 나라란, 특정한 한 인격체, 즉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분 안으로 자기 백성들을 모아서 그 사람들만 통치하는 상태를 두고 말합니다. 따라서 왕 되시는 하나님께서 인격체로 이 땅에 오셨을 때에 비로소 하나님 나라는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나라에 산다는 것은 그분이 지신 십자가의 일을 믿는 것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의 이름을 사용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예수라는 이름을 안다는 것이 아닙니다. 나에게서 예수님의 인격, 삶이 전체로 투영되어 나타나야 합니다. 이것을 갈라디아서 2:20의 표현대로 하자면, 나는 그리스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기 때문에 나는 오직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바울 사도를 통해 예수님이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귀신은 예수도 알고 바울도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대항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적함에 있어서 바울이 예수님과 같은 편에 서 있기 때문에 귀신은 바울도 적으로 간주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무서워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계시고 우리를 장악하고 계신 예수님을 무서워합니다. 마귀와의 싸움은 나의 싸움이 아니라 주님의 싸움입니다. 주님의 일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아무리 내가 능력있는 사람이 된다고 할지라도 내 안에 예수님이 살지 않으면 우리는 마귀의 종입니다. 예수의 이름만 차용하고 있는지 아니면 예수님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그리스도인인지 마귀가 먼저 알고 조롱합니다.

에베소의 이런 일로 말미암아 결국 성경이 어떻게 평가하고 있는지를 봐야 합니다. “이와 같이 주의 말씀이 힘이 있어 흥왕하여 세력을 얻으니라”(20)고 말씀합니다. 바울 사도가 힘을 얻어 더 능력 있게 말씀을 전했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말씀이 세력을 얻는 것이 주님이 하시는 일이고 하나님 나라의 일입니다.

우리 주성교회라는 단체의 세력이 커진다는 것은 복음이 아닙니다. 성경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문제는 말씀이 세력을 얻는 이 일에 우리 교회가 동참되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주님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갈 때에 가능한 일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모습으로 산다는 것은 능력 받아서 주의 일을 하겠다는 것과는 차원이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것만큼 교만한 말이 없습니다. 주님의 능력을 받아서 하려고 하지 말고 지금 주님과 함께 죽는 것에 만족하는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 내가 죽고 예수님이 나의 인생을 살아줄 때 그 때 예수님의 모습이 제대로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흉내는 누구나 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나의 인생을 산다는 것은 주도권이 내 쪽에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나의 인생이 예수님께 흡수되어지는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 그런데 그 앞에 항복이 안 된다면 가짜 예수, 가짜 하나님을 섬기고 있고 가짜 천국을 기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라가 우리를 덮쳤습니다. 항거할 수 없는 이 사실 때문에 꼼짝없이 발목 잡힌 자로 순응하며 사시기 바랍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