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상

30.사무엘상 26:1-25 사울의 창과 물병

불편한 진리 2014. 9. 6. 20:11


사무엘상 26:1-25

사울의 창과 물병

 

스스로 남의 피를 흘리는 과오를 남기는 것도 피했고 지혜로운 여자를 아내로 얻은 다윗에게 다시 한 번 시험이 찾아왔다. 하나님께서 이미 사울 왕을 버리셨고 다윗을 선택하여 새로운 왕으로 세우고자 하셨다.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직 대다수의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왕의 자리에 있는 사울에게 충성하고 있었다. 그런 자들 가운데 십 백성들이 또 다시 사울에게 다윗이 여시몬 맞은편의 하길라 언덕에 숨었다고 신고한다.

사울은 그 소식을 듣고 3,000명의 군사를 데리고 십 광야로 간다. 그의 목숨을 빼앗을 수 있었는데도 살려준 다윗의 은혜를 잊은 사울이 다시 그를 죽이겠다고 달려온 것이다. 이런 사울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무조건 사울을 비난할 일만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자기 야망을 이루기 위하여 집착하는 우리 죄인들의 모습이 사울에게 그대로 담겨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과 관계없는 상태에 놓이게 되면 죄를 짓는 일에 이토록 집착할 수밖에 없는 모습이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사울이 자신을 찾아 십 광야에 있다는 말을 들은 다윗은 스루야의 아들 요압의 아우 아비새와 야밤에 사울의 진영을 찾아갔다. 사울은 무기를 옆에 둔 채 진지 가운데서 잠들어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아비새는 창을 들어 단번에 사울을 찔러 죽이자고 다윗에게 제안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절호의 기회라는 것이었다. 또한 성경에서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을 깊이 잠들게 하셨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12). 실로 하나님께서 주신 완벽한 기회였다고 볼 수밖에 없다. 정말 그런가?

아비새는 하나님께서 어떤 분이신가를 알지 못했다. 하나님의 뜻에 자신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각에 하나님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처럼 우리는 일상적인 삶 속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우리의 생각을 맞추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현실을 보고 하나님의 말씀을 끌어다 갖다 붙이는 경우들이 많다. 예를 들면 내가 하고자 하는 사업이 내 생각대로 일사천리로 잘 되고 있으면 무조건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이라고 정당화시켜 버린다. 말씀의 원칙에는 내가 반드시 잘 되어야 한다는 것은 없다.

그러나 다윗은 여기서도 사울을 죽이지 않았다. 다윗에게는 긍정적 측면에서든지 부정적인 측면에서든지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세우셨으면 하나님께서 나타내실 뜻이 있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원칙이 있었고 그 원칙 때문에 현실이 아무리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상황을 하나님의 뜻이라고 정당화하지 않았다. “9다윗이 아비새에게 이르되 죽이지 말라 누구든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치면 죄가 없겠느냐 하고 10다윗이 또 이르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그를 치시리니 혹은 죽을 날이 이르거나 또는 전장에 나가서 망하리라”(9-10). 다윗은 자신이 얼마든지 사울을 죽일 수 있었다는 증거로 그의 물병과 창을 취하여 사울의 진영을 빠져나왔다.

여기서 사울의 창은 다윗과의 갈등에서 자주 사용되었던 무기이다. 골리앗을 죽이고 돌아온 다윗이 그를 위하여 수금을 타고 있을 때 사울은 그를 창으로 죽이려 했었다(삼상 18:10-11). 또 다윗이 블레셋 사람들과 싸워 이기고 돌아와 사울을 위하여 수금을 탈 때에도 그를 창으로 찔러 죽이려 했다(삼상 19:9-10). 요나단이 다윗의 억울함을 호소하자 사울이 화가 나서 요나단을 죽이려고 던진 것이 창이었다(삼상 20:33). 이런 점에서 다윗이 사울의 창을 가지고 나왔다는 것은 사울이 더 이상 다윗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지 못한다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당시 이 지역에서는 물을 목숨만큼 귀한 것으로 여겼다는 점에서 다윗이 사울의 물병을 취하였다는 것은 사울의 목숨을 끊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이 사건 이후 다시는 사울이 다윗을 위협하지 못한다.

 

다윗은 사울의 군대로부터 안전한 거리를 확보한 다음 아브넬을 부른다. 다윗이 24장에서는 사울을 직접 불렀으나 여기서는 왜 아브넬을 부르는가? 아마도 다윗이 아브넬의 위치와 그의 야망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비록 사울이 왕의 자리에 있지만 사울 정권의 실질적인 권위자는 아브넬이라는 것을 다윗이 의식했던 것 같다. 실제로 후에 사울이 죽은 후 실권을 잡은 자는 아브넬이었다(삼하 3:6-11). 다윗은 이스라엘의 최고의 용사가 신하로서 왕을 보호하지 못하고 있는 것에 대해 질책하면서 아브넬은 죽어야 마땅한 자라고 선언한다(16).

 

사울은 다윗의 음성을 듣고 내 아들 다윗아 이것이 네 음성이냐?”라고 묻는다. 이 표현을 통해 사울의 이중적인 마음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과 그의 군사들에게 자신의 의로움을 강조한다. 19절을 보면 다윗은 사울에게 원하건대 내 주 왕은 이제 종의 말을 들으소서 만일 왕을 충동시켜 나를 해하려 하는 이가 여호와시면 여호와께서는 제물을 받으시기를 원하나이다마는 만일 사람들이면 그들이 여호와 앞에 저주를 받으리니 이는 그들이 이르기를 너는 가서 다른 신들을 섬기라 하고 오늘 나를 쫓아내어 여호와의 기업에 참여하지 못하게 함이니이다라고 말한다.

다윗의 말은 사울을 격동시켜 자신을 해하려 하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라면 자신이 제물이 되어 죽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라면 전적으로 순종하여 죽겠다고 나서는 다윗의 마음이었다. 이것이 언약을 아는 자의 마음이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우리들의 유익이란 존재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향해 가시면서 결코 물러서거나 거부하는 자세가 있을 수 없었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26:39)라는 것이 언약을 성취하고자 하신 예수님의 기도였다.

사울은 또 다시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백한다. “사울이 이르되 내가 범죄하였도다 내 아들 다윗아 돌아오라 네가 오늘 내 생명을 귀하게 여겼은즉 내가 다시는 너를 해하려 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어리석은 일을 하였으니 대단히 잘못 되었도다 하는지라”(21). 그리고 사울은 여기서도 부지중에 예언적 말을 발설한다. “사울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 아들 다윗아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네가 큰 일을 행하겠고 반드시 승리를 얻으리라 하니라 다윗은 자기 길로 가고 사울은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25).

사울은 다윗이 어떤 존재인지 은연 중 예언하였다. 성경에서 말씀하는 큰 일이란 언약을 이루어 구원을 성취하는 일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울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선택하여 언약의 나라를 세우게 될 것을 말했다. 여기서 사울은 지금 자신의 왕국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지만 결국 파멸을 맞게 될 것임을 시사한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사울 왕은 다윗을 추격하는 일을 더 이상 시도하지 않게 되었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울을 다윗의 손에 붙이심으로 모든 상황은 끝났고 사울의 의가 아닌 다윗의 의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의라는 것을 드러내셨다.

어떤 문제에 직면하게 되면 우리는 그 문제를 내가 다 해결해야 하는 것처럼 생각한다. 오해를 받고 있으면 그것을 내가 적극 해명해야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언약을 위한 길에는 우리 자신이 해결해야 할 일은 없다.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것이 언약 안에 있는 자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손에 맡겨질 때 가장 언약다운 모습이 드러난다. 결국 사울의 악함을 이기는 것이 다윗의 의다! 이 다윗의 의는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주어진 하나님의 의이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의는 십자가에 죽으실 때 부활로 증거되었다. 따라서 성도는 날마다 그리스도와 더불어 죽을 때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고 증거될 것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12.10.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