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상

28.사무엘상 24:1-22 사울의 겉옷을 벤 다윗

불편한 진리 2014. 9. 2. 21:41


사무엘상 24:1-22

사울의 겉옷을 벤 다윗

 

사울 왕의 추격으로 인하여 다윗은 엔게디로 피신했다. 사울은 3,000여명의 병력을 특별히 조직하여 다윗을 쫓았다. 사울이 들염소 바위에 이르렀을 때에 용변을 보기 위해 그 부근의 동굴로 들어갔다. 그 굴 깊숙한 내부에는 다윗과 그의 군인들이 숨어 있었다. 사울을 죽이거나 체포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찾아왔다. 다윗의 부하들은 그 기회를 결코 놓치지 말 것을 종용하였다. “오늘이 바로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날입니다. 여호와께서는 내가 네 적을 너에게 넘겨 줄 테니 네 마음대로 하여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4/ 쉬운성경). 하나님께서는 내가 네 적을 너에게 넘겨줄테니 네 마음대로 하여라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다. 아마도 부하들은 사울이 다윗을 핍박하는 상황과 다윗이 기름 부음 받은 사실에서 자기들이 원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추론해 내었을 것이다. 다윗의 부하들은 사울이 죽으면 기약 없는 방랑 생활을 빨리 끝내고 다윗이 왕으로 등극하는 시기를 상당히 앞당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은 사울을 죽이지 않고 겉옷 자락의 일부(아마도 겉옷의 네 귀퉁이에 말씀을 새겨 넣은 옷술일 것이다)를 칼로 베어냈다. 자기가 사울 왕을 죽일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사울에게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다윗은 사울 왕의 겉옷 일부를 벤 것조차 마음에 찔렸다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5). 다윗이 사울을 죽인 것도 아닌데 왜 겉옷 자락을 벤 것만으로도 마음에 찔려 괴로워했을까? 다윗은 개미 한 마리도 쉽게 죽이지 못하는 겁쟁이였기 때문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겉옷이란 옷과 이불을 겸한 것이었고 그 사람의 종교적, 사회적 권위와 정체성을 대변하는 것이었기에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22:26-27). 그래서 그 당시 사람들에게는 겉옷만 보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는 특징적인 것이었다(참고 삼상 28:14). 그러기 때문에 다윗이 사울의 몸을 해치지 않았지만 겉옷을 벤 것으로 사울 왕의 권위에 치명적인 손상을 준 것이 되었다. 이러한 상징적인 행위만으로도 흥분한 부하들을 진정시킬 수 있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이를 통해 사울에게도 죽일 수 있었지만 죽이지 않았다고 하는 증거를 제시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다윗에게 정말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자기 사람들에게 이르되 내가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내 주를 치는 것은 여호와께서 금하시는 것이니 그는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가 됨이니라”(6)라고 한 말을 보면 여호와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기 때문에 자신이 함부로 죽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오늘날 이 말씀을 근거로 하여 일반 교인들이 목사에게 함부로 대하고 저항해서는 안 되며 목사가 하고자 하는 일을 반대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가르치는 자들이 있다. 목사는 하나님의 기름부음 받은 종이기 때문에 혹시 그가 무슨 잘못을 하면 하나님께서 직접 간섭하실 것이므로 일반 교인들이 그의 잘못을 지적하거나 말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특별히 목사, 장로만 기름 부어 세운 자라고 말씀하지 않는다. 요한일서와 고린도후서에 보면 각각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되고 거짓이 없으니 너희를 가르치신 그대로 주 안에 거하라(요일 2:27)

 

21우리를 너희와 함께 그리스도 안에서 굳건하게 하시고 우리에게 기름을 부으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22그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우리 마음에 성령을 주셨느니라(고후 1:21-22)

 

성도에게는 기름 부음이 거한다고 하였는데 그 기름 부음이 고린도후서에서 성령이 거하신다는 뜻으로 말씀하고 있다. 즉 성도에게는 성령님이 거하시며 직접 가르치시기 때문에 사람이 가르치는 것으로 구원을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런 점에서 목사의 설교나 가르침은 새삼스럽게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연구하고 깨달은 것을 나누어 복음 안에 있는가를 서로 확인하는 방법 중의 하나일 뿐이다.

기름 부음이란 하나님께서 거룩하게 구별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참고 출 28:41, 3:3). 이렇게 볼 때 다윗이 사울을 기름 부음 받은 자로 보고 죽이지 않은 것은 기름 부음 받은 사울이라는 인물이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울을 쓰시기 위해 구별하여 세우셨다는 것에 초점이 있다. 다시 말해서 긍정적인 차원에서든 부정적인 차원에서든 하나님께서 언약을 위한 계시를 주시는 목적으로 선택하셔서 그에게 어떤 임무를 맡기셨다는 것으로 다윗은 이해하고 있다는 뜻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면 하나님께서 그 목적을 이루시기까지 쓰실 것이기 때문에 사람이 함부로 해할 수 없다는 것이 다윗의 입장이었다.

결코 사울이 뛰어난 신분이거나 귀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니다. 이미 사울은 하나님에 의해 버림을 받은 존재이다. 그러기 때문에 언젠가 하나님의 때가 되면 하나님께서 친히 사울을 왕의 자리에서 내리시고 그의 삶을 마무리 지으실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알아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나를 적용시켜야지 나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적용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는 말씀이 나를 따라오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말씀을 따라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내가 생각할 때 좋은 기회가 오면 그것이 곧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는 경우들이 많다. 좋은 기회, 유리한 상황 그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증거는 아니다. 좋은 기회니까 분명 하나님의 뜻으로 여기는 생각은 자기 입장에만 갇혀 이기적인 삶을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다. 그 어떤 상황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원리를 대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상황 자체가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질 수는 없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유리한 상황이든 불리한 상황이든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일하심 안에서 발생하는 것들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길에 대해 생각하게 하고 배우게 하는 수단이며 도구일 뿐이지 유리한 상황 자체를 하나님의 뜻으로 대입시켜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해석하고 정당화시켜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다윗은 모든 결과를 하나님의 손에 맡기고 있었다. “12여호와께서는 나와 왕 사이를 판단하사 여호와께서 나를 위하여 왕에게 보복하시려니와 내 손으로는 왕을 해하지 않겠나이다15그런즉 여호와께서 재판장이 되어 나와 왕 사이에 심판하사 나의 사정을 살펴 억울함을 풀어 주시고 나를 왕의 손에서 건지시기를 원하나이다”(12,15). 다윗이 의로우신 하나님께 심판을 호소하며 그분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는 것은 이미 도엑이나 십 사람들이 다윗을 거부하며 사울에게 신고하였을 때 드린 찬양 속에서 배우고 깨달은 것이었다(52:5, 54:5).

다윗의 이런 모습은 앞으로 오실 메시아 즉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완전하게 볼 수 있다. 고난을 당하시면서 아니 죽임을 당하시면서까지 원수들의 죄를 사해 주시기를 간구하시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것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신 것을 보여 주셨다(23:34,46). 그래서 바울 사도는 다음과 같이 선포하였다.

 

19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20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게 하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12:19-20)

 

사울이 용변을 마치고 동굴 밖으로 나갔을 때 다윗은 뒤에서 내 주 왕이여!”라고 큰 소리로 외쳤다(8). 다윗은 사울에게 엎드려 절을 하고 사울을 해치려는 의사를 가지고 있지 않음을 고하면서 그 증거로 겉옷자락을 보였다. 그러자 사울 자신은 다윗을 죽이려 하는데도 다윗은 그렇게 하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감격했다. 사울은 20보라 나는 네가 반드시 왕이 될 것을 알고 이스라엘 나라가 네 손에 견고히 설 것을 아노니 21그런즉 너는 내 후손을 끊지 아니하며 내 아버지의 집에서 내 이름을 멸하지 아니할 것을 이제 여호와의 이름으로 내게 맹세하라”(20-21)라고 말한다.

여기서 사울은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리라는 사실을 스스로 공표하고 있었다. 밀실에서 하는 말이 아니라 양편 군대의 병사들이 다 듣는 자리에서 말이다. 사실 이러한 일은 이미 사무엘 선지자의 예언을 통해 전해진 적이 있었다. 사울은 왕이 된 후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온전히 순종하지 않았다. 이 일로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했고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을 버리셨다고 선언하였다. 그러자 사울은 사무엘의 겉옷을 붙잡고 하나님의 뜻을 돌이켜 달라고 간청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의 간청을 뿌리치며 돌아서자 사울이 붙잡고 있던 겉옷자락이 찢어졌다(삼상 15:27).

이 일로 인하여 사무엘이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오늘 이스라엘 나라를 왕에게서 떼어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에게 주셨나이다”(삼상 15:28)라고 하였다. 여기서 왕에게서 떼어라는 말은 찢는다는 말과 같은 말이다. 결국 사울의 겉옷자락을 찢어서 왕보다 나은 왕의 이웃, 즉 사울의 사위이기도 한 다윗에게 넘겨주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사울 왕의 겉옷자락이 베어져 다윗의 손에 들려있다. 이로써 사무엘이 전한 하나님의 말씀, 즉 사울의 나라가 다윗에게 주어지게 될 것을 분명히 보여 주셨다.

사울은 자의에 의한 것이든 타의에 의한 것이든 다윗을 자신보다 의롭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17). 성경은 하나님의 모습을 보여 주는 사람을 의인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말이다. 의인은 언제나 희생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의인에 대하여 가해를 하는 자가 악인이다. 악인에 의해 희생당하는 의인의 모습을 다윗을 통해 보여 주신다. 앞으로 이렇게 악인에 의해 희생당하는 완전한 의인을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실 것이다.

다윗은 희생자로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사울 왕에게 맹세를 했다. 다윗이 관심을 기울였던 것은 사울 왕에 대한 승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제사장 나라였다. 이는 그 가운데 메시아가 오시게 될 것이며, 다윗 왕국은 메시아 왕국을 미리 보여 주는 언약의 나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12.9.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