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상

27.사무엘상 23:19-29, 시편 54:1-7 십 사람들의 신고

불편한 진리 2014. 9. 2. 21:39


사무엘상 23:19-29, 시편 54:1-7

십 사람들의 신고

 

다윗이 그일라 사람들을 블레셋 사람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기에 다윗이 위기에 처하면 그를 돕는 것이 마땅한데 오히려 배신할 것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셨기에 그일라에 거하지 못하고 그곳을 떠나야 했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해 다윗이 그 무엇이나 누구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피난처로 삼도록 만들어 가신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주에 생각하였다.

그런데 19절 이하에서 또 다시 비슷한 일이 발생한다. 다윗이 그일라에서 십 황무지에 피신해 있을 때 십 사람들이 사울 왕이 있는 기브아에까지 가서 다윗을 신고한다.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넘길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19-20). 십 사람들은 다윗을 사울이라는 왕의 권력에 넘기는 것이 의무라고 생각하였다.

십 사람들이 다윗을 미워하여 사울에게 고발했다기보다는 사울 왕이 쫓는 다윗이 자기들 땅에 있다는 것이 부담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다윗을 사울에게 고발함으로 사울의 권력에 여전히 충성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자신들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하였다. 이렇듯 세상은 언제나 보이는 힘에 굴복할 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힘에는 굴복하려고 하지 않는다. 우리의 눈에 분명하게 보이지 않는 이상 우리는 하나님의 힘은 없다고 생각하며 언제나 보이는 힘만 의지하는 것이 죄인들의 본성이다. 그런 악한 심성의 죄인들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다. 이런 점에서 십자가를 이 땅에 세우신 것은 죄인들이 하나님의 힘을 무시한 증거이며 동시에 세상을 힘으로 알고 그 힘을 의지한 것에 대한 고발이라고 할 수 있다.

신고를 받은 사울 왕은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21)라고 말한다. 사울은 다윗이 그일라에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하나님께서 다윗을 자신의 손에 붙여주셨다고 하였는데(삼상 23:7) 여기서도 사울이 얼마나 착각하고 있는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행동하며 아니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복을 빌며 악행을 지속적으로 행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면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을 거스르며 악행을 저질 수밖에 없다. 그러면서도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들먹이며 스스로 믿음 있는 척 하게 된다.

오늘날 우리도 십자가에서 언약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면 사울과 같이 온갖 기독교적인 용어를 쓰면서도 실제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욕되게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거스르며 살게 된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아니라 믿는 것을 말한다(17:3, 1:12).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없다면 아무리 기독교적인 용어를 쓰며 성경을 말하고 찬송을 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허공에 뇌까리는 소음에 불과한 것이다.

사울은 십 사람들에게 좀 더 구체적인 실상을 파악하도록 명령했다. 그러면서 군대를 동원해 다윗을 추격하였다. 22-23절을 보면 사울은 다윗을 찾기 위하여 철저히 준비시키는 말을 한다. ‘더 자세히 살펴서’,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모든 곳을 정탐하고’, ‘실상을 내게 보고하라는 말을 보면 사울이 얼마나 집요하게 그리고 철저하게 다윗을 추격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는 자는 언제나 자기 자존심을 세우는 일에 열심을 내고 집착할 수밖에 없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다윗은 블레셋을 물리쳤던 마음으로 사울 왕의 군대와 맞부딪혀 싸우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울을 피해 광야 여기저기를 옮겨 다녔다. 다윗은 군대를 이끌고 남쪽의 아라바에 있는 마온 광야에 피해 있을 때 사울 왕의 군사들에 의해 거의 포위될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심각한 상황이 되었을 때 사울 왕에게 급한 소식이 전해졌다. 블레셋 군대가 이스라엘을 공격해 온다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사울 왕은 다윗을 추격하는 것을 멈추고 곧장 되돌아갔다. 그리고 그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게 되었다. ‘셀라바위라는 뜻이고 하마느곳이란 말은 도피, 분리라는 뜻이다. 분리의 바위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왕으로 세우셔서 그일라에서 있지 못하게 하셨으면 십 사람들의 땅에서라도 거할 수 있게 하시지 왜 십 사람들이 사울에게 다윗을 신고하도록 그냥 두시는가? 더구나 갓 선지자를 통해 유다 땅으로 가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이신데(삼상 22:5) 단순히 사울에게 추격만 당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속한 유다지파 사람들에게서 마저도 대접을 받지 못하고 배신을 당하도록 하시느냐는 것이다. 어쩌면 하나님께서 이렇게 조장하신 것같이 보이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여기서 우리가 생각해야 할 것은 23:14에서 사울이 매일 찾되 하나님이 그를 그의 손에 넘기지 아니하시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사울 손에 붙이지 않으시면 다윗은 사울의 손에 넘겨질 수 없다. 아무리 십 사람들이 다윗을 사울의 손에 넘기려 한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허락하시지 않으면 그런 일은 결코 불가능하다. 이렇듯 하나님의 일에 사울이나 그 권력에 하수인 노릇하는 어떤 자도 방해자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세워 언약을 이루고자 하시는 일을 좌절시킬 수 있는 세력은 이 땅에 없다. 십 사람들의 신고로 다윗이 고난을 겪는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다윗에게 가르치고자 하신 것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세상 모든 일은 하나님의 다스림에 의해 움직여지고 있다는 것을 다윗에게 분명히 보여 주셔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만드시기 위하여 다윗을 고난 가운데 던져 넣으셨던 것이다.

다윗을 언약의 나라인 이스라엘의 왕으로 세우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무엇을 위해서인가?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위해서이다. 그 언약을 위해 하나님은 다윗과 사울을 갈라놓으시는 일을 하신다. 다윗과 사울을 분리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과 비언약을 분리하신다는 뜻이다. 이처럼 비언약은 언제나 하나님의 언약을 거부하고 이기려고 한다.

그러나 결코 비언약이 하나님의 언약을 이길 수 없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분명하고 완전하게 보여 주신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만 의지하고 살아가야 하는 이유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말씀을 하고 있다.

 

14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고후 6:14-16)

 

우리에게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졌다는 것은 세상과 분리되었다는 뜻이고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것은 세상을 거부하며 더 이상 세상에 기대를 가지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시편 54편은 다윗의 마스길, 인도자를 따라 현악에 맞춘 노래, 십 사람이 사울에게 이르러 말하기를 다윗이 우리가 있는 곳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던 때에찬양한 시로 표시하고 있다. 다윗은 이 시에서 십 사람들을 낯선 자들이라고 하였고 개역성경에는 외인이라고 표현하였는데 이는 이방인과 같다는 의미이다. 그들이 곧 강포한 자이다. 또한 그들에 대하여 다윗은 원수라고 표현하였다. 왜 그런가? 단순히 다윗을 사울에게 신고했다고 해서 십 사람들이 포악하고 무자비한 자라고 말하는가? 다윗을 사울의 손에 붙이려고 하였기 때문에 십 사람들이 다윗의 원수인가?

결코 그런 뜻으로 성경은 말씀하지 않는다. 그들을 이렇게 표현한 이유는 한 마디로 하나님을 자기 앞에 두지 않기 때문이다. 즉 하나님을 무시하며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원수라는 차원으로 말씀한 것이다. 하나님을 무시하며 살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을 언약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하지 않으며 사는 자들은 당연히 언약이 주어진 다윗의 원수가 될 수밖에 없다. 이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범죄를 한 후 하나님께서 여자의 후손과 뱀이 원수가 되게 하리라고 말씀하신 이후 생긴 관계이다(3:15).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진 자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편으로 끌어당기실 것이기 때문에 뱀, 즉 사탄과 사탄을 따르는 자들과 원수가 되도록 만드셨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기름을 부어 이 관계를 보여 주고 계신다. 즉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진 다윗과 함께 하지 않는 자들이 다윗의 원수이고 하나님의 원수이다. 이 본질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통해 드러난 것이다. 원수를 물리치는 하나님의 언약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성취되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은 하나님이여 주의 이름으로 나를 구원하시고 주의 힘으로 나를 변호하소서”(1)라고 하였고 주께서는 내 원수에게 악으로 갚으시리니 주의 성실하심으로 그들을 멸하소서”(5)라고 하면서 하나님의 구원과 심판에 맡긴다. 자신의 언약 백성이라면 하나님께서 친히 구원하실 것이고 언약을 모르고 언약 백성들을 부당하게 대우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철저히 하나님께서 심판하신다는 사실에 맡긴다.

따라서 다윗은 이 일로 인하여 십 사람들을 미워할 필요도 없고 그들을 자신이 직접 심판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다윗은 사울을 피해 다니면서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다윗도 이 사실을 사울에게서 쫓겨 다니는 과정을 통해 철저히 깨닫고 있었다(개정성경에는 26절에 두려워하여라는 말을 의역하여 집어넣었지만 쉬운성경에는 원문 그대로 다윗이 두려워한다는 표현이 없다). 그래서 다윗은 비록 십 사람들이 자신을 사울 왕의 손에 붙이기 위하여 신고하였지만 구원과 심판은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는 것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하지 않으며 오히려 감사의 예물을 드리며 하나님의 이름을 찬양하고 있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12.9.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