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상

32.사무엘상 28:1-25 엔돌의 무당을 찾은 사울

불편한 진리 2014. 9. 6. 20:15


사무엘상 28:1-25

엔돌의 무당을 찾은 사울

 

다윗이 블레셋 땅에 몸을 숨기고 그들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고 있는 동안 블레셋은 이스라엘과 맞서 싸우기 위하여 구체적인 전쟁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전쟁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블레셋의 아기스는 다윗에게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전쟁에 참여하도록 명령했다. 다윗은 아기스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할 수 없었다. 아기스는 이번 전쟁으로 다윗의 유능함을 시험하고 영원히 자기 호위병으로 삼으려는 계산이었다. 그렇지만 다윗은 이 일로 위기가 고조되고 있었다.

다윗은 과연 이번 전쟁에서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을 치는 모험을 할 수 있을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다윗이 블레셋의 장군이 되어 진정으로 이스라엘을 공격하는 대열에 가담할 마음이 있었는지 아니면 하나님께서 다른 길을 예비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그렇게 대응했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기름 부어 세운 사울을 직접 해하지 않은 사실을 반추해 볼 때 하나님께서 다윗 자신에게도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우셨기 때문에 하나님의 언약과 그에 따른 계획이 분명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였을 것이다.

 

긴장감이 고조된 상황에서 갑자기 스토리는 사울로 바뀌어 전개되었다. 이런 기록내용을 통해 보아서 성경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기름부음을 받은 두 왕의 대조적인 상황이다. 다윗이 비록 이방 땅에서 이방인들에 의해 보호를 받고 있으나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대해 궁금해 하거나 불안한 상태로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에 맡겨진 채로 이끌려 가는 모습이지만 사울은 블레셋의 공격에 대하여 불안해하며 하나님의 뜻이 궁금하여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도하고 있다.

그 사실을 더욱 극적으로 보여 주는 말씀이 바로 사무엘이 죽었으므로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무엘을 위해 슬퍼하며, 사무엘을 그의 고향 라마에 장사지낸 지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 땅에서 무당과 점쟁이를 쫓아냈습니다”(쉬운성경)라는 3절 말씀이다. 사울은 사무엘이 죽은 후 무당과 점쟁이들을 쫓아내면서 백성들 눈에 사무엘처럼 하나님을 열심히 섬기는 왕으로 비쳐지기를 원했던 것 같다. 곧 자신이 사무엘의 역할을 한다는 것을 무당과 점쟁이들을 쫓아내는 것으로 백성들에게 보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무당과 점쟁이를 쫓아내었지만 블레셋 군대가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사울은 엄청난 두려움에 떨게 되어 하나님께 어떻게 해야 할지 물었다. 그는 다양한 종교적 형식을 다 동원하였지만 하나님의 응답은 없었다. 아니 하나님은 사울의 종교적 행위에 대하여 전혀 답을 할 필요가 없으셨다. 그러자 결국 사울은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게 옷을 갈아입고 하나님 대신 엔돌에 있는 신들린 무당을 찾아갔다.

여기서 우리는 사울의 종교적 심성을 알 수 있다. 블레셋과의 전투를 앞두고 두려움에 떨면서 여호와 하나님을 찾았던 것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신앙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스라엘 민족의 신을 찾았을 따름이었다. 그러므로 여호와 하나님께서 응답하지 않는다고 판단하자 거침없이 다른 신을 찾았다. 사울은 무당에게 사무엘을 불러 달라고 요구한다. 사울이 다른 유명한 인물을 불러 달라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의 혼을 불러 달라는 것이었다. 사무엘이 가장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였던 같고 뿐만 아니라 비록 무당을 찾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는 테두리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았던 심리가 작용한 것 같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은 단순히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무당이나 점쟁이를 찾아가지 말라는 교훈을 주기 위한 기록이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사울의 생각이나 행위를 통해 볼 때 죽은 자의 영혼이라도 불러서 블레셋으로 인한 위기 상황을 해결하려고 하는 사울의 사고방식이 너무도 비언약적이라는 사실을 공개하고 있다. 기름부음 받은 왕으로서 이스라엘을 어떻게 다스려야 하는지 생각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자리를 유지하기 위해 위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아 이용하고자 하는 사고방식이 다윗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결국 과거 무당과 점쟁이를 쫓아낸 사울의 행위가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좇는 신앙적 행위가 아니었다는 것을 폭로한다. 그의 비언약적 사고방식과 행위가 이방인들의 모습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베드로후서 2:20-22에 보면 20만일 그들이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벧후 2:20-22). 사울이 바로 이런 이방인과 같은 모습이었다.

신들린 무당이 불러올린 사무엘이라는 귀신이 사울 왕에게 말했다. 무엇 때문에 자신을 불러 올려 번거롭게 하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사울이 하나님께 아무리 기도하고 선지자를 통해 물어보았으나 응답이 없어 무당에게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요구하였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귀신은 하나님이 이미 사울을 완전히 떠났고 사울 왕국을 폐하시고 다윗에게 새로운 왕국으로 허락하신다고 전해 준다. 이는 그가 여호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하나님께서 사울의 군대를 블레셋에게 패하도록 내어줄 것이며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이 전투 현장에서 전사하게 될 것을 말한다.

고대 히브리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스올, 즉 음부라고 하는 지하세계로 들어간다고 생각하였다. 그리고 하나님, 천사와 같은 존재는 하늘의 어느 공간에 거주한다고 여겼다. 그래서 불러올리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죽은 사무엘이 다시 사울에게 나타났다. 이 말씀을 우리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여기서 문제는 이것이다. 즉 사무엘이 진짜 사무엘의 혼령인가 하는 것과 또 무당이 죽은 사람의 영을 자유롭게 불러올 수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사실 죽은 자의 귀신이 있느냐에 대한 것은 쓸데없는 관심이다. 무당이 귀신을 부를 수 있느냐라는 것도 역시 쓸데없고 무가치한 관심이다. 만약 죽은 자의 귀신이 있고 무당이 그 귀신을 불러내서 귀신의 능력으로 앞일을 알아낼 수 있다고 한다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것인가? 신통력이 있는 무당을 찾아가서 앞일에 대해 문의하고 싶다는 것인가? 그런 의도가 아닐 바에는 귀신이 있든 없든 그런 문제들은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에 아무 연관이 없다. 설사 무당이 귀신을 불러내어 대화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했다 할지라도 답은 같다. 그런 장면으로 인해서 믿음이 흔들리고 무당 쪽으로 마음이 기울어진다면 그것은 아예 예전부터 믿음의 사람이 아니었다는 증명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호기심이라고 할 수 있고, 신기한 일이기 때문에 알고 싶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언약백성들의 호기심은 하늘을 향하는 것이 마땅하고, 신기한 일 역시 부패하고 사망에 처한 우리를 건지시고 아들의 피로 죄를 씻어주신 하나님의 일이지 무당이 죽은 자를 만나는 것 따위를 가지고 신기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나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들에 대해서는 소홀히 하면서 무당이나 점쟁이의 진위 여부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이 있는 것이 사실인데 그것이 바로 우리의 죄성이다.

이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 자들의 주장은 사무엘이 한 예언이 모두 맞다는 측면에서 그렇게 받아들이나 실제 이는 비성경적이다. 성경의 전체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죽은 자의 혼령이 나타날 수도 없고 또한 무당이 죽은 자의 혼령을 불러올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무당이 불러낸 존재는 사무엘을 가장한 귀신이다. 즉 사단이 사무엘을 가장하여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 사단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고 또한 능력도 대단하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도 실제 하나님께서 이미 다 나타내신 내용에 불과하다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우리는 다시 보지 않을 수 없다.

 

21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22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23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7:21-23)

 

아마도 하나님께서는 물음에 답하지 않으셔도 사무엘이라면 도움이 되고 필요한 말을 해줄 것이라는 기대가 사울에게 있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울의 기대는 비참하게 무너진다. 나타난 사무엘마저 자신이 원하는 말을 해주는 것이 아니라 사무엘이 살아있을 때 사무엘을 통하여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다시 확증하는 말이 전부였다. 그러므로 우리의 관심은 이런 일이 어떻게 있을 수 있느냐에 두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이 있게 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를 생각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죽은 사무엘을 다시 나타나게 하셔서 하나님 자신의 언약을 이루는 일을 위해 필요한 말씀을 주신 것이었다. 여기서도 하나님은 자신의 언약을 이루는 일을 위해 필요한 말씀을 하신 것이지 사울이 듣고 싶어 한 말씀을 주신 것이 아니었다.

사실 우리도 자신에게 필요한 말씀을 듣고 싶어서 교회를 찾고 예수님을 찾는다면 그것은 사울이 무당을 찾아 사무엘을 불러달라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우리는 성경을 펼쳐 나에게 필요한 말씀을 찾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과 상관없이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을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이것이 언약의 말씀을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의도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12.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