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사무엘상

29.사무엘상 25:1-44 나발과 아비가일

불편한 진리 2014. 9. 6. 20:09


사무엘상 25:1-44

나발과 아비가일

 

25장은 사무엘의 죽음을 기록함으로 시작한다. “사무엘이 죽으매 온 이스라엘 무리가 모여 그를 두고 슬피 울며 라마 그의 집에서 그를 장사한지라”(1). 사무엘의 죽음을 이 부분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울을 왕으로 세우고 또한 왕권을 박탈하는 그의 사역이 끝났다는 것을 암시한다.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서 왕권을 빼앗아 가실 것을 두 차례나 선언하였고(삼상 15:23,26) 결국 사울은 그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삼상 24:20-21).

사울의 이 선언으로 말미암아 사무엘의 역할은 이제 끝이 났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언약을 위한 일에 사무엘의 역할이 끝났다는 측면에서 그의 죽음을 기록하였다. 성경은 하나님의 언약을 중심으로 기록하고 있기 때문에 사무엘의 죽음은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는 일에 있어서 사무엘의 역할이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갑자기 2절 이하에서 마온에 사는 한 인물을 언급한다. 나발이었다. 그런데 성경이 나발에 대한 소개를 할 때 이름을 먼저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부에 대하여 먼저 기록을 하고 이름을 나중에 말하고 있다. 이는 그가 얼마나 큰 부자이며 그 재물에 의지해서 사는 자라는 것을 암시한다. 즉 재물이 인격이 앞서는 인물이라는 뜻이다. 3절에 보면 아내의 이름은 아비가일인데 여자는 총명하고 용모가 아름다웠으나 나발은 완고하고 행실이 악했다고 한다. 나발이라는 이름은 어리석다는 뜻이다.

나발은 양이 삼천 마리에 염소가 일천 마리나 되는 부자였다. 양털을 깎는 축제가 있을 때 다윗은 부하 열 명을 보내 나발의 소유 중 얼마를 받아 오라고 하였다. 그냥 받아 오라는 것이 아니었다. 7절에 보면 네 목자들이 우리와 함께 있었으나 우리가 그들을 해하지 아니하였고 그들이 갈멜에 있는 동안에 그들의 것을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나니라고 한 것을 보면 다윗이 그들을 보호해준 것에 대한 정당한 대가를 요구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발의 입장에서는 다윗의 덕을 보았다고 생각할 근거가 없었다. 그래서 다윗은 누구며 이새의 아들은 누구냐 요즈음에 각기 주인에게서 억지로 떠나는 종이 많도다 내가 어찌 내 떡과 물과 내 양 털 깎는 자를 위하여 잡은 고기를 가져다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주겠느냐”(10-11)라고 하였다. 나발은 다윗의 요청을 일언지하에 거절하면서 다윗을 왕의 배신자로 간주하였다.

그러자 다윗을 나발을 응징하기로 결심했다. 육백 여명의 병사들 가운데 이백 명 가량은 후방에 남게 하고 사백 여명의 병사들에게 칼로 무장하여 나발에게 진군했다. 이 사실을 안 나발의 하인 하나가 아비가일에게 다윗의 군대가 쳐들어오고 있다는 것을 보고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비가일은 고기와 식물 등 양식을 나귀에 싣고 다윗을 맞으러 나갔다.

다윗을 만난 아비가일은 나귀에서 내려 다윗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남편의 무례함과 악함을 대신 사죄하면서 내 주여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 주도 살아 계시거니와 내 주의 손으로 피를 흘려 친히 보복하시는 일을 여호와께서 막으셨으니 내 주의 원수들과 내 주를 해하려 하는 자들은 나발과 같이 되기를 원하나이다”(26)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28주의 여종의 허물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여호와께서 반드시 내 주를 위하여 든든한 집을 세우시리니 이는 내 주께서 여호와의 싸움을 싸우심이요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 29사람이 일어나서 내 주를 쫓아 내 주의 생명을 찾을지라도 내 주의 생명은 내 주의 하나님 여호와와 함께 생명 싸개 속에 싸였을 것이요 내 주의 원수들의 생명은 물매로 던지듯 여호와께서 그것을 던지시리이다”(28-29)라고 하였다.

여기서 든든한 집이란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든든한 나라를 의미한다(참고 룻 4:11-12). 아비가일이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세우시는 나라를 인정하였다는 것은 다윗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에서 나온 행위였다. 인간이 부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은혜요 언약에 의한 혜택이다. 성경에서는 부자가 된 상태든 가난한 상태가 된 것이든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의 뜻을 드러내시기 위한 도구이다. 아비가일은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에 의한 것이고 그것을 통해 주의 나라를 든든히 세워가시는 일임을 고백한다.

그러나 나발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인물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이스라엘이 누릴 수 있는 부의 의미를 알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자기를 위한 세계를 구축하며 자기 왕국 안에서 자기 만족감과 즐거움에 취해 사는 자였다. 하나님의 언약에는 관심조차도 없는 자였다. 메시아와 메시아 왕국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었다. 그런 그가 다윗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은 것을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오히려 자기 자신이 왕이었지 다윗을 왕으로 인정할 수 없었다. 그러기 때문에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고백을 하고 있을 때 나발은 성대한 축제를 즐기고 있었다.

부부이면서도 똑 같은 다윗을 보면서 견해는 다르게 나타났다. 사울의 아들임에도 불구하고 사울과 요나단이 다윗을 보는 입장이 다르듯이 말이다. 한 집안에 같이 산다고 해서 마음과 생각이 항상 같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서로를 갈라놓을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34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35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36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37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며 38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10:34-38)라고 말씀하셨다.

 

나발에 대한 이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 사울 왕을 죽일 수 있는 기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고 살려 보내는 두 사건(24장과 26) 사이에 기록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 왜 이 두 사건 사이에 나발과 아비가일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을까? 그것은 다윗이 사울에게 긍휼을 베푸는 것과 대조해서 나발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어떻게 임하는가를 보여 주시기 위함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나발과 아비가일 사이에 보내시니 언약을 아는 자와 언약을 알지 못하는 자가 누구인가 확연히 드러나게 되었다.

다윗은 아비가일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것은 단순히 나발에 대한 분노를 풀었기 때문이 아니라 아비가일의 말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생각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언약에 합당한 말이었기 때문에 아비가일의 말을 받아들였다. 그래서 다윗은 아비가일을 향해 오늘 너를 보내어 나를 영접하게 하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할지로다 또 네 지혜를 칭찬할지며 또 네게 복이 있을지로다 오늘 내가 피를 흘릴 것과 친히 복수하는 것을 네가 막았느니라”(32-33)라고 하였다. 다윗은 아비가일을 하나님께서 보내신 것으로 여기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집으로 돌아온 아비가일은 술에서 깬 나발에게 다윗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다윗의 군사적인 응징은 중단되었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분명히 있을 것을 말했다. 그러자 나발은 심히 낙담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열흘 후에 이루어져 나발은 죽음을 맞았다(37-38). 이렇게 함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에 의해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을 강조한다.

 

나발이 죽은 후 아비가일은 다윗과 결혼을 한다. 아니 다윗이 아비가일을 취한다. 이러한 본문을 우리는 세상적 기준으로 보면 다윗을 욕할지 모른다. 그러나 성경이 말씀하는 것은 세상적 기준에 의해 다윗을 판단하라는 것이 아니다.

먼저 아비가일이 다윗을 만났을 때 그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림으로써 다윗을 경외하였다. 그리고 28-31절에서 아비가일이 다윗에게 한 말을 보면 다윗을 하나님이 지키시고 보호하시는 사람으로 보고 있다. “내 주의 일생에 내 주에게서 악한 일을 찾을 수 없음이니이다”(28)라고 말할 만큼 다윗에 대해 신앙적인 신뢰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나발에 대해서는 원하옵나니 내 주는 이 불량한 사람 나발을 개의치 마옵소서 그의 이름이 그에게 적당하니 그의 이름이 나발이라 그는 미련한 자니이다”(25)라고 말할 만큼 신뢰하지 않고 있었다.

아비가일이 다윗과 나발에 대해 전혀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는 것은 남자를 바라보는 기준이 어떤가를 보여 준다. 사실 아비가일은 남편의 나발의 편을 드는 것이 정상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비가일의 말은 단순히 다윗의 화를 누그러뜨리기 위한 가식적인 말이 아니었다. 나발에 대해서는 불량하고 미련한 자로 보았지만 다윗에 대해서는 철저한 신뢰를 표현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신다는 것으로 인해 신뢰하는 것이었다. 이것이 아비가일이 남자(사람)를 바라보는 시각이며 기준이었다.

아비가일은 세상적인 조건과 권력이나 힘을 기준으로 사람을 보지 않았다. 오직 하나님의 언약을 기준으로 누가 언약 안에 있는가를 보고 판단하였다. 자신이 의지하고 함께 할 남자는 돈이 있고 힘이 있는 남자가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언약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아비가일은 다윗을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자로 인정하였고 다윗은 남편을 잃은 아비가일을 아내로 받아들여 하나님의 언약이 어떤 자를 취하는가를 보여 주고 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은 남편을 잃어 전혀 세상에서 기댈 곳이 없는 자를 하나님의 언약 안으로 끌어들이신 것을 보여 주신다. 이것이 애굽을 탈출한 이스라엘의 참 모습이다. 다윗은 아비가일을 취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의 한 면을 보여 주고 있다.

다윗은 그 후 이스르엘의 아히노암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그 과정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있는 것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다윗을 통해 자신의 언약의 편에 끌어당기시며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언약을 아는 자, 믿는 자의 삶의 모습이다. 오늘날도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자, 믿는 자는 세상의 힘과 부를 가진 자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는 가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을 바라보는 자이다. 그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언약 안에 합류된 자이다(http://blog.daum.net/revealer 김영대/2012.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