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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론 57강
출애굽기 25:10-22
언약궤
성막은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이스라엘 안에 함께 하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이방인들의 신전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철저히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것이고 자기 언약을 위한 것이다. 그 성막의 핵심은 ‘언약궤’, ‘법궤’, 혹은 ‘증거궤’로 불리는 것인데 그것을 덮는 뚜껑으로 ‘속죄소’까지 포함한다. 이 말씀은 성막 건립의 과정에서 다시 반복된다(출 37:1-9). 계시의 과정에서는 성막의 핵심인 법궤에 대하여 먼저 언급하고 성막에 대한 말씀이 나오지만 실제 건립 과정에서는 성막이 만들어지고 법궤를 제작하는 것으로 기록한다.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짜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10절). “조각목”은 앞에서 이미 살펴본 대로 ‘싯딤 나무’로 사막의 아카시아 나무이다. “궤”의 ‘아론’은 ‘상자, 궤, 관’이라는 뜻이다. 창세기의 마지막 구절이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창 50:26)라고 하였는데 ‘아론 미츠라임’이다. 죽음을 담은 상자이다. 상자는 노아의 상자(히, ‘테바’)를 연상시키고 방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을 계시하는 상자로 모세를 담은 “갈대 상자”(히, ‘테바’)를 건지셨고(출 2:3), 이제 그 상자를 죽음을 담은 ‘아론’으로 표현하여 증거궤로 만들도록 말씀하신다. 법궤의 기본 구조는 다음과 같다.
증거궤의 규격을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 높이는 한 규빗 반”으로 계시한다. 한 규빗은 약 45-50cm이다. 궤의 규모는 성막 뜰에 위치한 번제단의 절반이다. 이 의미는 백성들은 지성소의 증거궤를 볼 수 없으니 번제단을 통해 증거궤를 볼 수 있게 한 것이다. 즉 번제단을 비롯하여 성막의 모든 기물들은 언약궤를 증거한다. 방주의 규격을 하나님께서 계시로 주셨듯이 법궤도 하나님의 계시로 주어진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임의로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보자면 브살렐이 만들었다.
브살렐이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었으니 길이가 두 규빗 반, 너비가 한 규빗 반, 높이가 한 규빗 반이며(출 37:1)
그러나 신명기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1 그 때에 여호와께서 내게 이르시기를 너는 처음과 같은 두 돌판을 다듬어 가지고 산에 올라 내게로 나아오고 또 나무궤 하나를 만들라 2 네가 깨뜨린 처음 판에 쓴 말을 내가 그 판에 쓰리니 너는 그것을 그 궤에 넣으라 하시기로 3 내가 조각목으로 궤를 만들고 처음 것과 같은 돌판 둘을 다듬어 손에 들고 산에 오르매 4 여호와께서 그 총회 날에 산 위 불 가운데에서 너희에게 이르신 십계명을 처음과 같이 그 판에 쓰시고 그것을 내게 주시기로 5 내가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서 여호와께서 내게 명령하신 대로 그 판을 내가 만든 궤에 넣었더니 지금까지 있느니라(신 10:1-5)
여기서는 모세가 만든 것으로 말씀한다. 모세가 만들었다는 것은 모세가 직접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돌판을 하나님께서 만드신 궤에 하나님께서 넣으셨다는 의미로 표현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의 구원은 하나님의 계획에 의해 하나님께서 주도하심으로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언약의 의미이다. 민수기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33 그들이 여호와의 산에서 떠나 삼 일 길을 갈 때에 여호와의 언약궤가 그 삼 일 길에 앞서 가며 그들의 쉴 곳을 찾았고 34 그들이 진영을 떠날 때에 낮에는 여호와의 구름이 그 위에 덮였었더라(민 10:33-34)
구원의 삼 일 길을 야훼 하나님께서 먼저 앞서 가신다는 것이다. 이것을 이미 23장에서 “내가 사자를 네 앞서 보내어”(출 23:20), “내 사자가 네 앞서 가서”(출 23:23), “내가 내 위엄을 네 앞서 보내어”(출 23:27), “내가 왕벌을 네 앞에 보내리니”(출 23:28)라고 말씀하신 것이었다. 이 말씀을 우리는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아 구원과 심판을 이루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말씀이라고 상고하였었다. 이런 점에서 법궤가 앞서서 삼 일 길을 간다는 것은 구원의 길을 법궤가 인도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시는 구원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러므로 언약이 성취된다. 이런 차원에서 민수기에서 법궤, 증거궤를 “언약궤”라고 표현하였다. 결국 언약궤는 앞서서 구원과 심판을 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것이다.
4 자기 양을 다 내놓은 후에 앞서 가면 양들이 그의 음성을 아는 고로 따라오되 5 타인의 음성은 알지 못하는 고로 타인을 따르지 아니하고 도리어 도망하느니라 … 8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9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요 10:4-5, 8-9)
“너는 순금으로 그것을 싸되 그 안팎을 싸고 위쪽 가장자리로 돌아가며 금테를 두르고”(11절). 조각목 상자를 순금으로 안쪽과 바깥 면을 둘러 쌌는데 여기서 “싸되, 싸고”의 ‘차파’는 ‘씌우다, 입히다, 도금하다’라는 뜻인데 실제는 조각목 상자에 도금하여 금박을 입힌 것이 아니라 얇은 금상자를 만들어 안팎으로 끼워 넣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조각목 바깥의 얇은 금상자, 조각목 상자, 조각목 상자 안의 얇은 금상자로 세 개의 상자가 차례로 포개지는 형식이다. 그러므로 가장 귀한 금으로 덮었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가장 귀한 분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를 덮어 속죄를 이루신다는 뜻을 나타낸다.
“금테”는 상자 위쪽에 테로 만든 것인데 대체적으로 진설상의 턱과 마찬가지로(출 25:25) ‘한 손바닥 너비’(약 8cm)로 제작되어 그 위쪽에 금테 장식을 만든 것으로 본다. 그러나 법궤에는 그런 언급이 없으므로 바깥 금상자 위에 금테 장식을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2 금고리 넷을 부어 만들어 그 네 발에 달되 이쪽에 두 고리 저쪽에 두 고리를 달며 13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어 금으로 싸고 14 그 채를 궤 양쪽 고리에 꿰어서 궤를 메게 하며 15 채를 궤의 고리에 꿴 대로 두고 빼내지 말지며”(12-15절). “금고리 넷”(12절)은 금으로 덮인 법궤의 바깥 면에 금고리 넷을 만들어 “네 발”(12절)에 달았다. 금고리 넷과 네 발을 어디에 어떻게 달았는지 아직도 유대 랍비들 중에서 의견이 분분하다. “발”의 ‘파암’은 테이블의 다리를 뜻하는 진설상의 ‘긴 발’(히, ‘레겔’, 출 25:26)과는 히브리어로 다른 단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발”로 번역된 ‘파암’을 ‘모퉁이’를 뜻하는 것을 본다. ‘파암’은 대부분 보폭과 같은 어떤 일정한 간격이나 반복, 규칙적인 거리를 뜻한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네 고리를 네 발 옆에 달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것은 상식적으로나 무게 중심을 생각한 물리 역학적 이유로도 맞지 않는다. 왜냐하면 법궤 위에는 대단히 무겁고 높은 그룹 형태의 금덩어리가 놓여 있기 때문에 채를 끼우는 고리의 위치는 궤의 3분의 1 지점으로 보는 것이 안정적이고 타당하다.
“채”(13절)는 법궤 이동을 위한 긴 나무 봉인데 금을 입혔다. 그리고 “고리에 꿴 대로 두고 빼내지 말지며”(15절)라고 말씀한다. 그 이유는 법궤가 한 곳에 고정된 기물이 아닌 이동하고 움직이는 하나님의 보좌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구름 기둥이 갑자기 떠서 법궤를 운반해야 할 때 가정 선두에 서야 하는 법궤를 긴급히 이동시켜야 하기에 항상 채가 끼워져 있어야 했다(그림은 법궤의 운반 모습). 그런데 그 길이와 두께가 명시되어 있지 않다. 민수기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5 진영이 전진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들어가서 칸 막는 휘장을 걷어 증거궤를 덮고 6 그 위를 해달의 가죽으로 덮고 그 위에 순청색 보자기를 덮은 후에 그 채를 꿰고(민 4:5-6)
4명이 운반하여야 했기에 그 길이가 지성소의 길이(10규빗 ≒ 5m)에 버금가는 상태로 볼 수 있다.
채가 길므로 채 끝이 내소 앞 성소에서 보이나 밖에서는 보이지 아니하며 그 채는 오늘까지 그 곳에 있으며(왕상 8:8)
문제는 법궤에 끼우는 채의 방향이 어디인가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채를 긴 방향으로 끼웠는가 아니면 짧은 방향으로 끼웠는가 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동이 편한 상태로 긴 방향으로 끼워진 것으로 이해한다(위의 사진). 그러나 이는 법궤가 하나님의 보좌를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면 상식적으로 합당하지 않다. 보좌의 하나님이 옆으로 보고 진행하는 것이 아니라 앞을 보고 진행하는 것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짧은 방향으로 채가 끼워졌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이다(아래 사진). 법궤가 놓이는 위치와 성막의 구조는 다음 그림과 같다.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둘지며”(16절). 결론은 정해져 있다. 이스라엘의 반역과 하나님의 언약이 서로 대립하나 그들의 반역과 상관없이 자기 언약을 실행하시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죄를 전제한 언약이다. 다시 말해서 열 말씀을 주시는 과정에서 이스라엘은 금송아지 숭배 사건을 일으킨다. 이때 모세는 황급히 돌판을 깨뜨린다(출 32:19). 왜냐하면 말씀이 법대로 시행되면 이스라엘은 다 죽음의 저주에서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번째 돌판은 모세가 직접 다듬어 만든 돌이다(출 34:1-9). 이런 점에서 인간의 죄를 이겨 자기 언약으로 성취하신다는 증거가 된다. 그래서 “증거궤”로 칭한다.
이 율법책을 가져다가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곁에 두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게 하라(신 31:26)
“순금으로 속죄소를 만들되 길이는 두 규빗 반, 너비는 한 규빗 반이 되게 하고”(17절). “속죄소”의 ‘카포레트’는 ‘카파르’(덮다, 화해하다, 속죄하다, 역청으로 칠하다)에서 유래하였는데 ‘속죄소’라는 뜻이다. ‘소’라는 글자가 붙어 자칫 지성소 안의 어떤 특별한 장소가 따로 있는 것으로 착각할 수 있는데 뚜껑 부분이므로 ‘속죄 덮개, 속죄 판’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뚜껑의 역할만 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보좌 혹은 발등상이었다. 또한 속죄일에 여기에 피를 뿌려 이스라엘 백성들의 속죄가 이루어지는 장소였기에 ‘속죄의 자리’라는 뜻에서 ‘속죄소’로 번역이 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어권에서 ‘mercy-seat’로 번역되는데 이것을 우리가 ‘시은소’(施恩所, 은혜가 임하는 자리)로 번역되어 사용되나 한글 성경에서는 전혀 나오지 않는 표현이다. 결국 증거궤 위에 뚜껑을 속죄소로 만들게 하셨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덮어주시는 은혜를 나타낸다. 다시 말해서 율법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우리가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 그러나 율법이 예수 밖에 있다면 우리는 그 율법을 지켜야만 한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율법을 지킬 수 없기에 죽는 것이다.
벧세메스 사람들이 여호와의 궤를 들여다 본 까닭에 그들을 치사 (오만) 칠십 명을 죽이신지라 여호와께서 백성을 쳐서 크게 살륙하셨으므로 백성이 슬피 울었더라(삼상 6:19)
“18 금으로 그룹 둘을 속죄소 두 끝에 쳐서 만들되 19 한 그룹은 이 끝에, 또 한 그룹은 저 끝에 곧 속죄소 두 끝에 속죄소와 한 덩이로 연결할지며 20 그룹들은 그 날개를 높이 펴서 그 날개로 속죄소를 덮으며 그 얼굴을 서로 대하여 속죄소를 향하게 하고 21 속죄소를 궤 위에 얹고 내가 네게 줄 증거판을 궤 속에 넣으라”(18-21절). “쳐서 만들되”(18절)의 ‘미크샤’는 금송아지처럼 부어서 만든 조형물이 아닌 망치질로 넓적하게 펴서 만드는 작업을 뜻한다. 이 속죄소는 하나님은 그룹들 사이에 앉아계신 분으로 묘사한다(시 80:1, 99:1, 겔 41:18 등).
그룹 사이에 계신 이스라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는 천하 만국에 유일하신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사 37:16)
“그룹”의 ‘케루브’는 천사와 같은 계열의 존재를 의미한다고 본다. 성경에 처음 등장하는 그룹은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고 있는 것으로 언급된다. 이는 사람의 행위나 노력으로 생명나무를 얻을 수 없음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창 3:24)
그렇다면 속죄소에 그룹을 형상화하였다는 것은 속죄소가 생명나무임을 증거한다. 요한계시록에서 그룹들로 칭하지는 않지만 각각 여섯 날개를 가진 네 생물이 하나님의 보좌 둘레에서 경배하며 노래한다(계 4:7-7). 이 하늘의 모습을 지상에 성막의 언약궤로 보여주신 것이다. 결국 이스라엘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과 만나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 만남이 가능한 것이 언약이다. 다른 말로 하면 유월절 어린 양의 피 안에서 가능한 것이다.
16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17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18 그는 몸인 교회의 머리시라 그가 근본이시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신 이시니 이는 친히 만물의 으뜸이 되려 하심이요 19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 20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만물 곧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는 것들이 그로 말미암아 자기와 화목하게 되기를 기뻐하심이라(골 1:16-20)
“거기서 내가 너와 만나고 속죄소 위 곧 증거궤 위에 있는 두 그룹 사이에서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네게 명령할 모든 일을 네게 이르리라”(22절). 선악의 나무를 취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동산 밖으로 내보내신 것은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불러내시는 일을 위해 파송하신 것이었다. 이것을 성막으로 보여주시는 것이 시내 산 언약이다. 특히 법궤 위의 속죄소를 통해 하나님께서 은혜로 덮어주시는 구원임을 나타내셨다. 결국 그룹들로 에덴동산을 막아놓으신 것은 사실 언젠가 그 길을 여실 것을 계시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피의 은혜로 하늘의 길을 열어 자기 백성과 화목하심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만 길이요 진리이시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2026041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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