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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론 30강
출애굽기 14:1-14
홍해를 건너는 이스라엘(1)
13:18에서 “하나님이 홍해의 광야 길로 돌려 인도하시매”라고 하였다. 하나님께서 인도하셨는데 광야 길이다. 인간들이 하나님을 믿는 이유는 종교적 삶을 열심히 살면 하나님께서 좋은 것으로 보상해 주실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 광야라면 거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뜻이 있다. 구원은 ‘나의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에게 명령하여 돌이켜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에 장막을 치게 하라”(2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1절)라는 선언은 이제까지도 그랬지만 출애굽의 모든 여정은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을 인도하신다는 의미이다. 이런 점에서 이스라엘은 자신의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말씀에 이끌려 가는 것이다. “명령하여”(2절)라는 표현은 ‘다바르’이다. 즉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다바르’를 ‘아마르’ 하시고 이스라엘 자손에게 다시 ‘다바르’로 주어진다. “돌이켜”는 ‘슈브 하나’인데 ‘슈브’는 ‘(되)돌아가(오)다, 회복하다, 세우다, 놓다’라는 뜻이고, ‘하나’는 ‘기울이다, 진을 치다’라는 뜻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 말씀으로 회복하시는 길이 광야이다.
“바다와 믹돌 사이의 비하히롯 앞 곧 바알스본 맞은편 바닷가”(2절)라는 지역은 지금 정확하게 어딘지 확인하기 어렵다. 지금 우리의 입장에서 위치를 확인하기 어렵다는 것으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사실인지 아닌지를 생각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다. 중요한 것은 지명을 통해 하나님께서 인도하심의 의미가 어떤 것인가를 드러내신다는 것이다. “믹돌”의 ‘미그돌’은 ‘탑, 망대’라는 뜻인데 아마도 애굽의 견고한 성읍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하히롯”의 히브리어 ‘피하히로트’는 ‘목초지’라는 뜻이고, “바알스본”은 두 단어로 ‘바알 차폰’인데 ‘바알’은 ‘주인, 소유주, 남편’이라는 뜻이고, ‘차폰’은 ‘북쪽’이라는 뜻이다. 북쪽은 가장 먼 쪽, 가장 높은 자리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상태로 표현된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차폰)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사 14:13)
그런데 하나님의 시온산이 북쪽에 있고(시 48:2) 거기서 오셔서 구원을 이루신다고 말씀한다.
북쪽에서는(차폰) 황금 같은 빛이 나오고 하나님께는 두려운 위엄이 있느니라(욥 37:22)
이스라엘 자손을 북방(차폰) 땅과 그 쫓겨 났던 모든 나라에서 인도하여 내신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리라 내가 그들을 그들의 조상들에게 준 그들의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리라(렘 16:15)
애굽의 견고한 성읍인 망대, 탑에 갇혀 있던 이스라엘은 북쪽 끝의 경계에서 그것을 목초지로 삼아 하나님을 대적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믹돌, 비하히롯, 바알스본”이라는 지명을 통해 친히 북쪽 끝에서 이스라엘을 자기 백성으로 불러내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나타내신 것이다.
“바로가 이스라엘 자손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들이 그 땅에서 멀리 떠나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 하리라”(3절). “광야에 갇힌 바 되었다”라는 표현은 바로의 조롱이다. 여호와의 인도를 받아 애굽을 떠났지만 자유를 누리기는커녕 오히려 광야에 갇혀 죽음을 초래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도 사람들은 바로처럼 조롱한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십일조를 꼬박꼬박하는데 왜 하는 일마다 안 풀리고 고난의 연속인가?”라고 말이다. 이런 조롱이 나오는 이유는 사람들이 설정한 종교적 목적 때문이다. 즉 신을 믿는 목적이 자신의 잘됨, 행복, 미래의 불안 요소 제거 등등 이런 것에 있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인도는 바로에게 이스라엘을 포기하지 않고 추격의 빌미를 마련해준 꼴이 되고 말았다. 때문에 이스라엘은 책임이 자신들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 있는 것이라고 원망한다.
“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 바로가 그들의 뒤를 따르리니 내가 그와 그의 온 군대로 말미암아 영광을 얻어 애굽 사람들이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 하시매 무리가 그대로 행하니라”(4절). 하나님께서 인도하신 광야 길은 우리가 어떤 목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가를 날마다 폭로하시는 일이 된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믿음 안에 있는가, 자기 믿음 안에 갇혀 있는가를 말씀으로 드러내신다. 바로와 애굽인만 완악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도 완악하기 때문이다. 다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져 있기에 그 언약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시는 것으로 인해 잠시 저들의 죄악을 덮어 놓고 보실 뿐이다. 따라서 “나를 여호와인 줄 알게 하리라”라는 말씀은 애굽인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니라 이스라엘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고 곧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씀이다.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엡 1:17-19)
“5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 바로와 그의 신하들이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 이르되 우리가 어찌 이같이 하여 이스라엘을 우리를 섬김에서 놓아 보내었는가 하고 6 바로가 곧 그의 병거를 갖추고 그의 백성을 데리고 갈새 7 선발된 병거 육백 대와 애굽의 모든 병거를 동원하니 지휘관들이 다 거느렸더라”(5-7절). “그 백성이 도망한 사실이 애굽 왕에게 알려지매”(5절)라는 표현은 모세가 “사흘 길쯤 광야에 가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희생을 드리려 하오니 가기를 허락하소서”(출 5:3, 참고 3:18, 8:27)라고 한 말로 인해 아마도 출애굽 후 3일이 지난 뒤였던 것 같다.
바로와 애굽은 눈에 확실하게 보이는 이적들을 체험하였다. 그러나 이적을 재앙으로 받아들임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이 온전히 드러났다. 믿음 없는 상태였기에 다시 이스라엘을 붙잡아 오고자 했다. 이런 점에서 “그 백성에 대하여 마음이 변하여”(5절)라는 표현은 완전히 놓아주려 하였다가 마음이 변했다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의 본성이 더 분명하게 드러났다는 의미이다. ‘사흘 길’을 자기 마음대로 또한 편리한 대로 해석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알지 못하는 자들의 특징이다.
“병거 육백”(7절)은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일하심을 나타내는 ‘7’에 미치지 못하는 수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언약을 대적하는 행위를 상징한다. 거기에 ‘100’이라는 수를 곱하였으니 물량적인 것으로 엄청난 힘을 자랑하는 것이다. 바로가 이스라엘을 추격하고자 하는 이 모습은 거짓 교사들이 사람을 끝까지 비진리 가운데 가두어 율법의 종으로 삼고자 하는 모습이다. 오늘날 많은 목사들이 교인들을 자기 수하에 두고 엄청난 수적인 부흥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신 것이기에 자기한테만 말씀을 배워야 이단 사상에 빠지지 않는다고 가르치면서 오히려 진리를 찾고자 하는 자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며 자기 교회를 떠나면 저주를 받을 것처럼 협박하는 것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모습이다.
“8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의 뒤를 따르니 이스라엘 자손이 담대히 나갔음이라 9 애굽 사람들과 바로의 말들, 병거들과 그 마병과 그 군대가 그들의 뒤를 따라 바알스본 맞은편 비하히롯 곁 해변 그들이 장막 친 데에 미치니라”(8-9절). “나갔음이라”(8절)의 ‘야차’는 ‘나가다, 떠나다, 나가게 하다, 이끌어내다, 분리, 죽음’이라는 뜻인데 완전히 벗어난다는 의미이다. “담대히”(8절)의 ‘베야드 라마’는 ‘높은 손으로 인하여’라는 말이다. 즉 이스라엘이 자기 의지로 담대하게 나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의해 애굽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있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8절)라는 말씀은 바로의 마음이 완악함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강력한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셨다는 의미를 드러낸다. 이렇게 죄의 권세에서 건져내심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능력의 손에 의한 것이다.
[시] 새 노래로 여호와께 찬송하라 그는 기이한 일을 행하사 그의 오른손과 거룩한 팔로 자기를 위하여 구원을 베푸셨음이로다(시 98:1)
“바로가 가까이 올 때에 이스라엘 자손이 눈을 들어 본즉 애굽 사람들이 자기들 뒤에 이른지라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10절). “이스라엘 자손이 심히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부르짖고”라는 말씀은 바로의 추격을 봄으로 심한 두려움에 사로잡히는 것이 죄인의 본성임을 보여준다. 그 본성은 종교적으로 하나님께 부르짖는 쪽으로 나아간다. 그래서 인간의 종교성은 두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 안에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절망의 두려움 가운데서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구원임을 보여주신다.
“11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12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11-12절). 그런데 신기한 것은 두려움으로 인하여 여호와를 찾고 부르짖지만 정작 이스라엘이 원하는 것은 애굽이라는 사실이다. 이런 점에서 보자면 애굽이라는 세상은 우리를 붙잡고 놓지 않는 어떤 힘이고 세력임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 바 되었으니 하나님이 자기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심은 그로 말미암아 우리를 살리려 하심이라(요일 4:8-9)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12절)라는 백성들의 말은 생명을 모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죽음의 반대가 생존이고 곧 그것을 생명으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애굽의 종, 율법의 종으로 생존하는 것이 마음 편하다고 생각한다. 복종하는 행위를 통해 자기 만족과 성취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교회를 찾아와 율법을 문자로 공부하면서 행할 것을 달라고 요구한다. 소위 말하는 적용이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13 모세가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두려워하지 말고 가만히 서서 여호와께서 오늘 너희를 위하여 행하시는 구원을 보라 너희가 오늘 본 애굽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보지 아니하리라 14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13-14절). “가만히 있을지니라”(14절)의 ‘하라쉬’는 ‘새기다, 침묵하다’라는 뜻인데 말하는 것을 멈추는 것을 의미한다. 진리를 이루시는 구원 앞에 죄인은 비진리를 말하는 것에서 멈추고 침묵하는 것이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14절)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구원은 ‘여호와의 전쟁’으로 주어지는 구원이라는 뜻이다.
4 너희는 거짓말을 지어내는 자요 다 쓸모 없는 의원이니라 5 너희가 참으로 잠잠하면(하라쉬) 그것이 너희의 지혜일 것이니라(욥 13:4-5)
바로의 추격은 사람들에게 믿음이란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믿음은 눈에 보이는 증거로 인하여 생존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눈에 보이지 않는 생명을 주시니 그것을 소중한 것으로 알 수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생명을 소중한 것으로 알게 되는 것은 십자가의 은혜로 인한 것이다(20251221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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