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출애굽기

22. 출애굽기 11:1-10 장자의 죽음 이적

불편한 진리 2025. 11. 2. 1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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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론 22강

출애굽기 11:1-10

장자의 죽음 이적

 

하나님께서 마지막으로 이적을 나타내신다. 그것은 처음 난 모든 것의 죽음이다. 이 이적으로 말미암아 바로 왕은 이스라엘을 쫓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런데 오늘 본문은 엄밀하게 말해서 장자의 죽음 이적에 대한 예고이고 사실상 12장 이하에서 유월절 규례로 주어지면서 열 번째 이적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그러나 여기서 장자의 죽음 이적에 대한 의미를 기초적으로 알 수 있기에 제목을 장자의 죽음 이적이라는 제목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내가 이제 한 가지 재앙을 바로와 애굽에 내린 후에야 그가 너희를 여기서 내보내리라 그가 너희를 내보낼 때에는 여기서 반드시 다 쫓아내리니 2 백성에게 말하여 사람들에게 각기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 하시더니 3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 또 그 사람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1-3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1절)이라고 표현한 것은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계속 이적으로 말씀을 나타내시는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과 짝이 되어 오실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신다. 이런 점에서 “모세는 애굽 땅에 있는 바로의 신하와 백성의 눈에 아주 위대하게 보였더라”(3절)라고 말씀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와 언약을 맺으셨고 그 언약에 근거하여 말씀으로 자신을 드러내셨다(요 10:30, 17;21). 그러므로 바로가 모세를 통해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 것처럼 바로와 같은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하나님을 알 수 있다.

 

17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18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7-18)

 

“한 가지”(1절)란 열 번째의 그 한 가지를 말씀하신다. 모든 이적을 하나로 만드는 통일 된 것으로 하나이다. 즉 완전한 재앙으로써 열 번째이다. “재앙”(1절)의 히브리어 ‘네가’는 ‘타격, 치기, 재앙’이라는 뜻인데 레위기 13-14장에서 “나병”과 관련되어 표현된다(신 24:8). 나병으로 하나님께서 치셨다는 표현을 통해 죄의 권세에 매인 인간을 보여준다. 신약에서 ‘플레게’로 번역되는데 이 단어 역시 ‘때리다, 치다’라는 뜻을 지닌 ‘플렛소’에서 온 말이다(참고 계 9:18, 20, 11:6 15:1, 6, 8, 16:9, 16:21, 18:4, 8 21:9, 22:18). 결국 재앙이 주어졌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을 거기서 벗어나 구원에 이르게 하신다는 의미이다(계 18:4).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치심의 절정은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것이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네가)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8)

 

그러므로 재앙을 통해 애굽인들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음이 드러나지만 언약 백성들은 언약의 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과 하나되는 은혜를 입는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이웃들에게 은금 패물을 구하게 하라”(2절)라고 말씀하신다. 마지막 한 가지 재앙이 완성되어 “은”은 ‘케세프’로 ‘생명의 값으로 치루는 돈’이고, “금”은 ‘자하브’로 진리를 상징한다. 이스라엘이 이것을 구한다는 것은 율법의 문자에서 변하지 않는 진리의 말씀과 대속의 예수 그리스도를 구한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을 구하여 갖추라는 것이 아니라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 출애굽이고 구원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이 진리로 성막(성전)은 세워진다(출 25:1-7).

“여호와께서 그 백성으로 애굽 사람의 은혜를 받게 하셨고”(3절)라는 말씀은 애굽 사람들이 베푸는 은혜를 받았다는 것이 아니다. “받게 하셨고”라는 말이 ‘나탄’으로 ‘두다, 놓다, 세우다’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바로라는 세상의 임금에게 율법으로 종으로 살게 하셨으나 그들과 하나되지 않고 오히려 애굽에 내리신 재앙을 통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다는 사실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 것이다. 때문에 애굽 사람들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은혜를 베풀어 더욱 확실하게 언약 안에 세우셨다는 의미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은혜를 베푸신 결과이다. 바로와 그 신하들과 백성들에게 모세가 큰 자로 보이게 된 것도 하나님께서 자기 계시를 위해 중보자로 세워 언약의 성취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도구로 쓰임 받은 모세에게 집중하여 모세의 사명이나 그가 믿음으로 어떻게 하나님의 일을 잘 수행하였는가 하는 것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라 오직 언약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게 관심이 가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죄인들은 누구나 자기가 높아지고 자기를 크게 보이고자 하는 일이 목표가 되고 있다. 그것이 인간의 자존심이다. 인간의 자존심 때문에 나오는 탐욕은 끝이 없다. 그 탐욕을 채우는 과정에서 우리는 남에게 수많은 피해를 입힌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고 죽음을 향해 가는 존재임을 늘 고백할 수밖에 없다. 종의 형체로 오셔서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가는 자가 교회요 성도이다. 한국교회 대부분의 교인들은 이런 말씀을 싫어한다. 입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말하지만 자신이 행복하게 되고 잘나가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착각한다. 그것은 우리의 망상일 뿐이다. 내가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내 안의 십자가가 드러나는 것으로 감사할 수밖에 없는 것이 교회요 성도의 삶이다.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요 3:30)

 

“4 모세가 바로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 5 애굽 땅에 있는 모든 처음 난 것은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 죽으리니 6 애굽 온 땅에 전무후무한 큰 부르짖음이 있으리라”(4-6절). 장자를 죽이는 마지막 재앙은 여호와께서 친히 “밤중에 내가 애굽 가운데로 들어가리니”(4절)로 시행된다. 하나님이 친히 애굽에 행하시는 심판임을 강조하고 있다.

“처음 난 것”(5절)의 ‘베코르’는 ‘초태생, 우두머리, 장자, 처음 난 자’라는 뜻이다. 장자는 인간의 혈통을 잇는 계승자요 대표자이다. 그래서 시편 기록자는 “애굽에서 모든 장자 곧 함의 장막에 있는 그들의 기력의 처음 것을 치셨으나”(시 78:51)라고 말씀하였다. 즉 인간의 힘의 시작이고 근원을 상징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을 진리의 관점에서 생각해 보면 인간이 처음 것을 힘으로 삼는 그것은 율법의 문자이다. 그래서 처음에 온 것을 소중하게 여긴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기 의를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고 힘으로 삼는 자기 의를 부인하게 만드신다. 이런 점에서 ‘베코르’는 처음에 온 육체, 먼저 된 자, 율법의 문자로 죽어야 할 장자라는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혈통, 육정, 사람의 뜻이라고 표현한다.

 

12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13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2-14)

 

혈통으로 나서 육에 갇힌 자들은 본성적으로 육체의 것을 좋아한다. 그래서 모든 것을 육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특기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롬 2:21-23)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롬 2:25)라고 하였다. 이것이 우리의 본질이다. 때문에 육체의 예수를 신으로 섬기는 종교 생활에 몰두한다.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5절)란 ‘맷돌 뒤에 있는 여종의 장자’이다. 밤 중에 맷돌을 돌리는 여종이란 먹고 살기 위해 밤중까지 먹을 것을 위해 맷돌을 돌린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왕위에 앉아 있는 바로의 장자로부터 맷돌 뒤에 있는 몸종의 장자와 모든 가축의 처음 난 것까지”(5절)라는 표현을 통해 바로 왕으로부터 미천한 애굽의 여종, 그리고 동물들에게까지 재앙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바로 왕의 장자나 이 땅에서 먹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여종까지의 장자나 다 동물(히, ‘베헤마’), 즉 네발 가진 짐승의 처음 난 것에 불과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에게는 사람에게나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 여호와께서 애굽 사람과 이스라엘 사이를 구별하는 줄을 너희가 알리라”(7절)라고 구원의 은혜를 베푸실 것을 말씀하셨다. 장자가 죽는 일로 인하여 애굽에게는 큰 곡성과 소동이 일어날 것이다. “짐승에게나 개 한 마리도 그 혀를 움직이지 아니하리니”라는 표현은 문자적으로 이스라엘은 그러한 소동과는 상관없이 오히려 개가 짖지 않을 정도로 평온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언약의 관점에서 보자면 “개”란 성경에서 주로 이방인을 상징한다. 이방인이란 진리와는 상관없는 말을 하는 자들이다. 그렇다면 결국 하나님의 큰 심판 속에서 진리가 아닌 거짓을 말하는 자들이 혀를 놀릴 수 없는 상황이 된다는 뜻이다.

애굽에 대해서는 심판이지만 동시에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구원이라는 은총이 주어진다. 하나님의 구원은 이와 같이 심판이라는 행위와 동시에 일어나는 구원이다. 여기서 심판의 대상은 애굽이고, 구원의 대상은 이스라엘이다. 그러면 어떤 자가 애굽이고, 어떤 자가 이스라엘인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언약이 주어진 자가 이스라엘이고 하나님의 언약을 모르는 자가 애굽이다. 그 근거는 하나님의 선택이다. 아담이 범죄한 이후 아벨을 선택하셨고 셋을 선택하셨으며 노아를 선택하셨고 아브라함, 이삭, 야곱을 선택하셨다. 그 선택으로 인해 하나님께서 언약을 주시고 그 언약에 여자의 후손을 약속하셨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잘나서 구원의 대상이 되었고 애굽은 못나서 심판의 대상이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언약 때문이다.

그 언약의 실체는 하나님이 친히 이 땅에 찾아오실 때 드러나게 되어 있다. 즉 하나님이 예수님으로 이 땅에 오심으로 말미암아 구체적으로 밝혀지게 되었다. 즉 언약의 실체는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분이 십자가로 언약을 성취하셨다. 그러므로 심판과 구원의 기준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를 어떻게 대하느냐 하는 것으로 심판받을 자와 구원받은 자가 드러나는 것이다.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18 그를 믿는 자는 심판을 받지 아니하는 것이요 믿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의 독생자의 이름을 믿지 아니하므로 벌써 심판을 받은 것이니라(요 3:17-18)

 

“8 왕의 이 모든 신하가 내게 내려와 내게 절하며 이르기를 너와 너를 따르는 온 백성은 나가라 한 후에야 내가 나가리라 하고 심히 노하여 바로에게서 나오니라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기를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 그러므로 내가 애굽 땅에서 나의 기적을 더하리라 하셨고 10 모세와 아론이 이 모든 기적을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가 이스라엘 자손을 그 나라에서 보내지 아니하였더라”(8-10절). “바로가 너희의 말을 듣지 아니하리라”(9절)라는 표현은 모세가 전하는 진리의 말씀을 듣지 않는 것은 죄인의 본성임을 밝혀주신다. 그래서 “이 모든 기적을 바로 앞에서 행하였으나”(10절) 바로는 완악하여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기적”이란 ‘모페트’로 언약의 표(히, ‘오트’)로 보지 못하고 그저 눈에 보이는 외형적인 신기한 일에 불과한 것으로 본다는 뜻이다. 종교인은 눈에 보이는 기적을 좇으나 교회요 성도는 언약의 표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다(2025110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출22.1101-10 장자의 죽음 이적(2025110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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