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강론/출애굽기

21. 출애굽기 10:21-29 흑암 이적

불편한 진리 2025. 11. 2. 14: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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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애굽기 강론 21강

출애굽기 10:21-29

흑암 이적

 

아홉째 흑암 이적인데 사전 경고 없이 주어졌지만 사실 “메뚜기가 온 땅을 덮어 땅이 어둡게 되었으며”(15절)라는 말씀을 통해 이미 예고된 것이나 다름없는 이적이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하늘을 향하여 네 손을 내밀어 애굽 땅 위에 흑암이 있게 하라 곧 더듬을 만한 흑암이리라”(21절). “하늘을 향하여”라는 표현을 통해 보여주시는 것은 흑암이 위에서 온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 이적 역시 단순히 재앙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진리를 나타내주신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흑암이라는 이적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지 못한다면 재앙이 되어 심판 가운데 있는 것으로 드러나고, 언약의 말씀으로 받아들여진다면 언약의 표,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입는다. 그래서 “네 손을 내밀어”라는 표현으로 하나님의 능력이 모세를 통해 진리를 전해주고 있음을 나타낸다.

“흑암”의 ‘호셰크’는 ‘(빛의 반대로) 어두움, 흑암, 밤, 불행, 파멸, 죽음, 무지, 슬픔’이라는 뜻이다. 빛이 창조되기 전 흑암의 상태를 보여주신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창 1:2)라는 말씀에서 “혼돈”(히, ‘토후’), “공허”(히, ‘보후’), “흑암”(히, ‘호셰크’)이라는 표현을 통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곧 생명이 없는 상태라는 것이다. 애굽이 태양신을 섬기는 것 자체가 흑암의 상태이다.

 

22 내 백성은 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요 지각이 없는 미련한 자식이라 악을 행하기에는 지각이 있으나 선을 행하기에는 무지하도다 23 보라 내가 땅을 본즉 혼돈하고 공허하며 하늘에는 빛이 없으며 24 내가 산들을 본즉 다 진동하며 작은 산들도 요동하며 25 내가 본즉 사람이 없으며 공중의 새가 다 날아갔으며 26 보라 내가 본즉 좋은 땅이 황무지가 되었으며 그 모든 성읍이 여호와의 앞 그의 맹렬한 진노 앞에 무너졌으니 27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길 이 온 땅이 황폐할 것이나 내가 진멸하지는 아니할 것이며 28 이로 말미암아 땅이 슬퍼할 것이며 위의 하늘이 어두울 것이라 내가 이미 말하였으며 작정하였고 후회하지 아니하였은즉 또한 거기서 돌이키지 아니하리라 하셨음이로다(렘 4:22-28)

 

그래서 “더듬을 만한 흑암”이라고 하였는데 “더듬을 만한”의 ‘마샤쉬’는 이삭이 에서인지 확인하기 위해 야곱을 만지는 것에 대해 사용되었던 그 단어이다(창 27:12, 21, 22). 즉 진리를 찾지 못하고 더듬는 상태라는 뜻이다. 진리를 찾지 못하고 더듬고 만지고자 한다는 것은 율법 가운데서 율법을 좇아 진리를 찾고자 하나 진리를 찾는 자기 의를 진리로 착각하는 상태이다. 이런 모습을 하나님의 심판 가운데 있는 것으로 말씀한다.

 

14 여호와의 큰 날이 가깝도다 가깝고도 빠르도다 여호와의 날의 소리로다 용사가 거기서 심히 슬피 우는도다 15 그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폐와 패망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흑암의 날이요(습 1:14-15)

 

1 시온에서 나팔을 불며 나의 거룩한 산에서 경고의 소리를 질러 이 땅 주민들로 다 떨게 할지니 이는 여호와의 날이 이르게 됨이니라 이제 임박하였으니 2 곧 어둡고 캄캄한 날이요 짙은 구름이 덮인 날이라 새벽 빛이 산 꼭대기에 덮인 것과 같으니 이는 많고 강한 백성이 이르렀음이라 이와 같은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이후에도 대대에 없으리로다(욜 2:1-2)

 

구약에서 여호와의 날은 단순히 심판만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심판이 주어졌다는 것은 그 속에서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의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다시 말해서 흑암 이적을 애굽은 재앙으로 여길 수밖에 없는 심판이지만 이스라엘은 언약의 표로 받아들여져 구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언약 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이요 은혜이다.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 캄캄한 흑암이 삼 일 동안 애굽 온 땅에 있어서”(22절). “삼 일”(22절)은 구원의 삼 일 길을 의미한다. 그래서 “모세가 하늘을 향하여 손을 내밀매”라고 말씀한다. 즉 구원의 삼 일 길은 하늘에서 주어지는 하나님의 능력이다. 모세가 손을 내밀어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께서 은혜로 베푸시는 구원은 어둠 가운데서 진리를 찾는 과정을 계시한다. 진리를 찾아 그 진리가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죽는 흑암 가운데서 삼 일 만에 부활하신 그 부활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23절). “그동안은 사람들이 서로 볼 수 없으며”라고 하였는데 당시는 등불이나 횃불 등의 불을 밝히는 도구가 있었던 시대였기에 서로를 볼 수 없었다는 것을 문자적으로만 이해할 수는 없다. 육의 사람들은 혈통으로만 형제 관계를 생각한다. 그러나 영의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진리의 말을 하는 사람을 형제로 본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자가 형제요 자매요 모친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하는 자가 내 형제요 자매요 어머니이니라 하시더라(마 12:50)

 

여기서 아버지의 뜻대로 한다는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십자가 죽음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 안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형제로 찾아오셔서 십자가 죽음을 이루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고 같은 진리의 말을 한다는 의미에서 형제이다. 그러나 오늘날 땅의 교회들은 예수를 말하면서 형제라고 하지만 서로 다른 예수를 말하기에 그저 육의 모습을 보여줄 뿐이다. 왜냐하면 건물 교회에 모였다는 것으로 형제라고 하면서 서로 친절하게 인간적인 사랑을 베풀고자 하는 것이 그 증거이다. 형제라면 인간적인 사랑을 나누고 도와주면서 친절하게 대하는 것에 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같은 복음, 같은 십자가의 예수 그리스도를 나누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자기 처소에서 일어나는 자가 없으되”라고 하였는데 여기서 “자기 처소”의 ‘타하트’는 ‘아래에 있는 부분, 바닥, ~의 아래에 있는 것’이라는 뜻으로 ‘토아흐’(억압하다)에서 유래한 단어이다. 즉 억압으로 무엇인가에 의해 억눌려 바닥이 되어 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바닥에서 스스로 일어날 수 있는 자가 없었다. 율법 아래 종으로 억압받고 있는 상태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행하여 자기 의를 쌓으려고 하나 도리어 율법에 억눌려 죄의 권세에 매인 흑암의 상태였기에 스스로 일어나 진리를 볼 수 없었다는 뜻이다.

“온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주하는 곳에는 빛이 있었더라”라는 표현을 통해 흑암과 대조하여 빛에 대한 계시를 주신다. 애굽이 ‘혼돈과 공허, 흑암’(창 1:2)의 상태를 보여준다면 이스라엘은 ‘빛’(창 1:3)의 상태 보여준다. 땅적 존재요 육의 사람은 흑암에 있으나 하늘적 존재요 영의 사람은 빛에 거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이 빛에 거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들이 무엇인가를 행하여서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담아 놓으셨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이 담고 있는 의미가 하나님께서 언약으로 행하신다는 것이다. 그 언약의 실체로 오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요 8:12)

 

그래서 산상강론에서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마 5:14)라고 하셨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실 수 있었던 것은 산에서 내려오셔서 친히 십자가를 향해 가셨기 때문이다. 그 십자가 안에 자기 백성들을 부르셨는데 그들을 빛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다는 뜻이다. 이것이 언약의 완성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계시록에서 하늘의 상태를 이렇게 말씀하였다.

 

23 그 성은 해나 달의 비침이 쓸 데 없으니 이는 하나님의 영광이 비치고 어린 양이 그 등불이 되심이라 …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계 21:23, 22:5)

 

“바로가 모세를 불러서 이르되 너희는 가서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24절). “여호와를 섬기되 너희의 양과 소는 머물러 두고”라고 바로는 말하였다. 양과 소는 희생제물이기에 이것들이 없이는 제사에 대한 계시가 성립되지 않는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언약이 담긴 자들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드러내지 못한다면 이스라엘은 이스라엘로서 의미가 없다. 다시 말해서 희생제물이 곧 이스라엘이다. 따라서 희생제물로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이 땅에 희생제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언약으로 보여주어야 이스라엘로서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바로는 출애굽의 목적을 근본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어린 것들”의 ‘타프’는 ‘어린아이들’이라는 뜻으로 성경에서 어린아이는 문자적인 율법을 열심히 행하는 자를 가리킨다(고전 13:11). 그래서 진리의 말을 하지 못하는 자이다. 이런 점에서 “너희 어린 것들은 너희와 함께 갈지니라”라는 바로의 말은 종교적으로만 열심을 내는 모습에만 그치라는 의미의 말이다. 그것이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오늘날도 교회들은 기도, 전도, 봉사 등의 종교적 행위를 열심히 하도록 독려한다.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믿음으로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롬 3:28)

 

“25 모세가 이르되 왕이라도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드릴 제사와 번제물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겠고 26 우리의 가축도 우리와 함께 가고 한 마리도 남길 수 없으니 이는 우리가 그중에서 가져다가 우리 하나님 여호와를 섬길 것임이며 또 우리가 거기에 이르기까지는 어떤 것으로 여호와를 섬길는지 알지 못함이니이다 하나”(25-26절). “주어야 하겠고”(25절)라는 표현은 ‘나탄’으로 ‘주다, 놓다, 세우다’라는 뜻이다. 즉 바로 왕이 여호와께 드릴 제사와 번제물을 주는 것 같지만 사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여 세우시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구원이란 애굽에서 벗어나 하나님께서 세우시는 희생제물에 동참하는 것이다. 결국 희생제물을 나타낼 수 없는 이스라엘에게는 출애굽이 의미가 없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언약을 담아 놓으신 이유이다.

“27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 보내기를 기뻐하지 아니하고 28 바로가 모세에게 이르되 너는 나를 떠나가고 스스로 삼가 다시 내 얼굴을 보지 말라 네가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 29 모세가 이르되 당신이 말씀하신 대로 내가 다시는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27-29절).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27절)라는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이미 말씀하신 대로(출 4:21) 이루어지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는 또한 하나님의 말씀대로 이스라엘을 자기 언약대로 불러내실 것을 암시한다. “내 얼굴을 보는 날에는 죽으리라”(28절)라는 말씀은 바로가 율법의 권세를 가지고 이스라엘을 억압하는 존재였다는 점에서 그의 얼굴을 본다는 것은 율법을 겉으로만 보면 죽을 수밖에 없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모세가 “내가 다시는 당신의 얼굴을 보지 아니하리이다”(29절)라고 말한 것은 말씀의 본뜻, 곧 언약으로 자기 백성을 살리시는 하나님을 좇아가기에 더 이상 껍데기의 말씀인 바로 왕이라는 세상 임금에게로 돌아갈 일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고후 3:6)

 

(2025110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출21.1021-29 흑암 이적(20251102).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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