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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계시록 강론 88
요한계시록 22:10-15
생명나무의 권세
“구원”이란 말의 사전적인 의미는 “위험이나 곤란에 빠져 있는 사람을 구하여 준다”라는 뜻이다. 이 말이 종교적으로 쓰일 때는 “인류를 죄악과 고통과 죽음에서 건져내는 일”이라고 정의된다. 그런데 성경은 인류 모두를 구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신다고 말씀한다(마 1:21).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흘린 피는 자기 백성들의 죄를 위한 대속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선택 안에 있는 자와 선택 밖에 있는 자로 갈라놓고 말씀하실 뿐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이고 권세이다. 오늘 본문은 이러한 하나님의 권세를 말씀한다.
“또 내게 말하되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을 인봉하지 말라 때가 가까우니라”(10절). “이 두루마리의 예언의 말씀”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이전 개역한글에서는 “이 책의 예언의 말씀”이라고 하였는데 ‘책’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겠다. 10:4에서는 “일곱 우레가 말을 할 때에 내가 기록하려고 하다가 곧 들으니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말하기를 일곱 우레가 말한 것을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 하더라”라고 하였는데 이때 인봉하고 기록하지 말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진노를 참으시고 긍휼을 베푸시겠다는 뜻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인봉하지 말라”라고 말씀한다. 다니엘서에 이렇게 말씀한다.
다니엘아 마지막 때까지 이 말을 간수하고 이 글을 봉함하라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하며 지식이 더하리라(단 12:4)
“간수하고”라는 표현의 히브리어 ‘사탐’은 ‘막다, 메우다, 폐쇄하다, 봉쇄하다, 잠그다’라는 뜻이고, “봉함하라”의 ‘하탐’은 ‘인을 찍다, 봉인하다’라는 뜻이다. 한마디로 봉인하여 잠궈서 알리지 말라는 것이다. 그런데 다니엘 선지자에게 주셨던 말씀과는 대조적으로 요한 사도에게는 인봉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 이유는 다니엘에게 주셨던 계시는 “마지막 때까지”라고 하셨기 때문이고 요한계시록의 상황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성취된 것이 다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니엘 선지자가 전한 “마지막 때”를 신약에서 이렇게 나타낸다.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막 1:15)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왜냐하면) 때가 가까우니라”라는 말씀에서 우리 성경에 번역되지 않은 ‘가르’(왜냐하면)가 있다. “때”라는 ‘카이로스’는 하나님께서 일하신 결정적인 시점을 의미하는 표현이다. “가까우니라”라의 ‘엥귀스’는 시공간적으로 가까운 상태에 있다는 뜻으로 현재형으로 썼다. 즉 이 책의 말씀을 인봉하지 않은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 죽음으로 대속을 이루신 언약 성취의 때이며 하나님 왕국이 계속 주어져 있는 상태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도 이렇게 선언하였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롬 10:8)
그러므로 지금 이 책의 말씀은 열려 있다. 예언의 말씀이 열려 있고 공개된 상태 이것을 종말이라고 한다. 더 이상 다른 계시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고 필요도 없다. 따라서 우리에게 이 말씀이 읽혀지고 들려져 마음에 새겨지면 그것이 복이다. 이것은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한 것이기에 은혜이다.
그래서 “불의를 행하는 자는 그대로 불의를 행하고 더러운 자는 그대로 더럽고 의로운 자는 그대로 의를 행하고 거룩한 자는 그대로 거룩하게 하라”(11절)라고 말씀한다. 즉 말씀을 인봉하지 않은 상태로 두면 십자가에 의해 불의를 행하는 자와 의롭고 거룩한 자로 갈라져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 말씀 역시 다니엘 선지자가 선포한 말씀 안에 있는 것이다.
9 그가 이르되 다니엘아 갈지어다 이 말은 마지막 때까지 간수하고 봉함할 것임이니라 10 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하게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단 12:9-10)
“불의를 행하는 자”와 “더러운 자”가 짝을 이루고, “의로운 자”와 “거룩한 자”가 짝을 이루어 “불의를 행하는 자”와 “의로운 자”, “더러운 자”와 “거룩한 자”를 대조하였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불의를 행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능동태이고 거룩한 자에 대해서는 수동태로 썼다는 것이다. 불의한 자는 자기 능력으로 행하지만, 거룩한 자는 하늘에서 주어지는 은혜를 입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모든 말씀은 비유라는 의미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13 그러므로 내가 그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것은 그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며 들어도 듣지 못하며 깨닫지 못함이니라 14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15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이는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달아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을까 두려워함이라 하였느니라 16 그러나 너희 눈은 봄으로, 너희 귀는 들음으로 복이 있도다(마 13:13-16)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12절). 불의한 자, 더러운 자와 의로운 자, 거룩한 자를 왜 여전히 그렇게 두시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행한 대로 갚아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라는 말씀은 이미 앞에서 생각하였던 대로 ‘지금 신속히 계속 오고 계신다’라는 의미이다. “내가 줄 상이 내게 있어”라는 표현에서 “상”이란 ‘미스도스’로 ‘품삯, 임금, 보상’이라는 뜻으로 궁극적으로 구원을 의미한다.
“그가 행한 대로”라는 말씀은 ‘에르곤’으로 ‘일, 행위’라는 뜻으로 ‘그의 일대로’라는 의미이다. “갚아 주리라”라는 말씀은 22:2에서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라고 하였을 때 앞의 “맺되”는 ‘포이에오’(만들다, 창조하다, 행하다)였고 뒤의 “맺고”는 ‘아포디도미’라고 하였는데 같은 단어로 ‘넘겨주다, 나누어주다, 돌려주다, 보상하다’라는 뜻이다. 즉 불의한 자, 더러운 자의 일은 불의를 행하는 그 일대로 넘겨주고, 의로운 자, 거룩한 자의 일은 의로운 일, 거룩한 일 그대로 넘겨준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의로운 자, 거룩한 자의 일은 무엇인가?
28 그들이 묻되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 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니라 하시니 … 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모세가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떡을 준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께서 너희에게 하늘로부터 참 떡을 주시나니 33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요 6:28-29, 32-33)
“하나님의 일”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고 출애굽 때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듯이 하늘에서 주시는 참 떡으로 상징되는 “생명”을 주시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로운 자, 거룩한 자에게 넘겨주시는 생명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것이 생명을 넘겨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각 사람에게 그가 행한 대로 갚아 주리라”라는 말씀은 교회 봉사를 얼마나 많이 하였는가를 따져서 차등 있는 상급을 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죽음으로 의로운 자, 거룩한 자로 만드시고 그들에게 넘겨주시는 것은 생명이라는 의미이다.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 4:5)
우리가 무엇이 잘나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이 있겠는가? 우리는 죽은 죄인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것을 받아야 할 당위성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은혜를 베푸셔서 주신다면 그것은 ‘생명’이라는 것 외에 다른 것이 있을 수 있을까? 따라서 죽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이런 점에서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마지막이요 시작과 마침이라”(13절)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는 헬라어 처음과 마지막 철자인데 히브리어로 말하자면 “알파”는 ‘알렙’이고 “오메가”는 ‘타우’이다. ‘알렙과 타우’가 결합된 첫 단어가 창세기 1:1의 ‘에트’이다(‘베레쉬트 바라 엘로힘 에트 하샤마임 웨에트 하아레츠’). 여기서 ‘에트’가 목적격으로 쓰였는데 직역하면 ‘그 하늘들과 그 땅을’이라는 말이다. 앞에서 말씀한 것이 전혀 없음에도 불구하고 정관사를 붙였다면 어떤 특별한 것을 지칭한 것이다. 그래서 창조 언약 안에서 보자면 땅인 우리를 하늘들로 새 창조를 이루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그렇다면 “알파와 오메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처음과 마지막, 시작과 마침”이란 창조 언약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새 언약으로 완성하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 일을 머리이신(‘베레쉬트 – 로쉬’)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하신 것이다.
“자기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은 복이 있으니 이는 그들이 생명나무에 나아가며 문들을 통하여 성에 들어갈 권세를 받으려 함이로다”(14절). “두루마기”의 ‘스톨레’는 ‘겉옷, 긴옷’으로 어떤 의식을 위해 격식대로 차려입은 옷으로 특히 제사장의 옷을 의미한다. 옷을 빨았다는 것은 죄 씻음의 은혜에 동참되어 영원한 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었음을 의미한다(히 6:20, 계 7:13-14). 직역하면 ‘그들의 겉옷들을 빠는 자들은 복이 있다. 그들의 권세가 생명나무에 있도록, 그리고 그들이 문들을 통해 그 성에 오도록’이라는 말이다. 교회요 성도는 생명나무의 권세, 거룩한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도록 권세를 받은 자라는 뜻이다.
그러나 교회가 아닌 자들, 곧 영원한 생명을 누리지 못하는 상태를 “개들과 점술가들과 음행하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및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는 다 성 밖에 있으리라”(15절)라고 말씀한다. 이 표현은 문자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진리와 관련된 표현이다. “개들”이란 토한 것을 도로 먹는 존재이다(잠 26:11, 벧후 2:22). 그래서 “행악하는 자들”을 “개”라고 하였다(빌 3:2). 여기서 “행악하는 자들”의 헬라어 ‘에르가테스’는 ‘교사, 일꾼’이라는 뜻으로 ‘악한 교사’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진리는 소화하지 못하고 뱉어내고 기존에 먹었던 율법으로 다시 먹어 종교 행위로 돌아가는 거짓 교사를 지칭한다(참고 마 7:6). 그래서 율법에서는 창기를 개로 비유하였다(신 23:17).
“점술가들, 음행하는 자들, 살인자들, 우상 숭배자들, 거짓말을 좋아하며 지어내는 자”이란 이미 21:8에서 나누었던 것처럼 진리에 진리가 아닌 것을 섞는 자들이며, 비진리와 연합하여 놀아나는 자들이고, 진리를 깨뜨리며, 진리를 우상으로 삼는 자들로 비진리를 전하는 자들이다.
“성 밖”이란 당연히 거룩한 성 예루살렘 밖을 의미한다. 기존의 예루살렘에 있는 자들은 건물 성전을 중심으로 율법적 행위를 하는 자들이 자기 의를 위해 진짜 의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성 밖으로 몰아내어 십자가에 죽였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록자는 영문 밖에서 죽임을 당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가자고 하였지만(히 13:12-13) 이제 상황이 바뀌었다. 성 밖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죽임을 당한 경험이 없는 자들은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안에 들어갈 수 없다는 뜻이다. 따라서 미래에 죽어서 갈 천국의 성 밖에 있다는 말이 아니라 거룩한 새 예루살렘 성이 되어 생명을 누리는 상태와 대조해서 성 밖의 현재 상태를 표현한 것이다. 생명나무의 권세,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권세는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은혜로 주어진다. 그러기에 자기 죽음을 그 십자가를 날마다 확인할 수 있는 은혜가 있는 자가 교회요 성도이다(20240818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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