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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05
마태복음 2:13-23
내 아들을 불렀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을 때 누가가 목자들의 경배를 기록한 것과 달리 마태는 동방 박사들의 경배를 기록하였는데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찾아 경배하였다는 것은 예수님이 “이방의 빛”(사 42:6, 49:6)이 되신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을 받은 민족이었지만 메시아의 오심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음을 고발한다. 이렇게 왕이신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인하여 반응하는 죄인들의 모습은 단순히 거부하고 싫어하는 정도가 아니라 헤롯 왕을 통해 드러난 것과 같이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는 것이었다.
그리스도의 탄생 이후 “유대인의 왕”(2절)에 대한 원수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요한계시록 12장에는 어둠의 나라를 상징하는 큰 붉은 용에 대해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어둠의 왕국은 아담이 선악의 나무를 취한 이후로 그리스도의 왕국을 대적해 오고 있다. 사탄은 헤롯 왕을 도구로 하여 여자의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죽이려고 하지만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호하심으로 그 시도는 실패한다. 이는 창세기 3:15에서 말씀하신 그 말씀이 실제로 드러나고 있는 모습이다. 그렇지만 하나님 편에서는 여전히 자신의 언약을 신실하게 이행하고 계셨다. 여자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머리를 밟아 상하게 하시는 그 자리까지 인도하실 것이다.
2장 전반부에 보면 헤롯이 동방 박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2:7-8). 그러나 박사들은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가니라”(2:12)라고 말씀한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그들이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어라”(13절)라고 말씀한다. 그 말씀대로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14-15절a)라고 하였다.
이 사실에 대하여 선지자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는 주께서 선지자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라”(15절)라고 밝히고 있다. 이 말씀은 호세아의 말씀을 인용한 것으로 우리 성경 본문은 미래에 이루어질 것 같은 표현이지만 이미 성취되었다는 차원에서 18절과 같이 완료형으로 쓰고 있다. 즉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라는 표현이다.
그리고 19-21절에 보면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지시하심으로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돌아왔다고 하였다. 문자적으로 보면 이때가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이 성취되는 시점이다. 다시 말해서 애굽에서 나올 때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선언하는 것이 맞는데 마태는 이스라엘에서 나와 애굽으로 갈 때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는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였다는 것이다. 호세아서에 보면 이렇게 말씀한다.
1 이스라엘이 어렸을 때에 내가 사랑하여 내 아들을 애굽에서 불러냈거늘 2 선지자들이 그들을 부를수록 그들은 점점 멀리하고 바알들에게 제사하며 아로새긴 우상 앞에서 분향하였느니라 3 그러나 내가 에브라임에게 걸음을 가르치고 내 팔로 안았음에도 내가 그들을 고치는 줄을 그들은 알지 못하였도다(호 11:1-3)
호세아 선지자는 여로보암 2세가 죽기 직전에 시작하여 이스라엘이 멸망하기 전까지 말씀을 전한 북이스라엘의 선지자였다. 여기서 “내 아들”이란 출애굽한 이스라엘을 지칭한 표현이다(출 4:22). 그러나 그들은 여전히 언약의 땅에서 출애굽하지 못한 상태의 모습을 보였다. 그렇다면 호세아 선지자의 선포는 이스라엘이 아들이 아니라는 선언을 담고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을 마태가 예수님에게 성취된 말씀으로 적용하고 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 참 이스라엘임을 선언한 것이다. 예수님의 이스라엘 베들레헴 탈출이 출애굽이라는 뜻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자기 아들로 불러내신 이스라엘은 진짜 아들이 아니라 진짜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는 것임을 나타낸 것이고 그래서 말씀이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참 이스라엘로 이 땅에 오셨기에 이제 지리적인 입장에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존재하시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로 애굽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결정된다. 즉 예수님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기준이 되신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떠나시면 그곳이 애굽이고 그 나라의 왕이 바로다.
헤롯의 잔학한 행동으로 인해 유대 땅에 두 살 이하의 많은 아이가 희생된다.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본 그 때를 기준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 함이 이루어졌느니라”(16-18절). 여기서도 마태는 예레미야 선지자의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선언한다.
15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라마에서 슬퍼하며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 때문에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어져서 위로 받기를 거절하는도다 16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네 울음 소리와 네 눈물을 멈추어라 네 일에 삯을 받을 것인즉 그들이 그의 대적의 땅에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17 너의 장래에 소망이 있을 것이라 너의 자녀가 자기들의 지경으로 돌아오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렘 31:15-17)
여호수아 18장에 보면 “라마”는 베냐민 지파의 기업이다. 라헬은 베냐민을 낳고 죽었는데 야곱이 “에브랏 곧 베들레헴 길”에 장사하였다(창 35:16-19). 솔로몬 이후 나라는 북왕국 이스라엘과 남왕국 유다로 나누어진다. 북왕국 이스라엘은 열 지파로, 남왕국은 유다와 베냐민 지파로 이루어진다. 요셉의 아들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야곱이 자기 아들로 삼아 손을 어긋나게 축복함으로 에브라임을 장자로 삼았다(창 48:1-6). 그래서 북이스라엘의 대표 지파는 에브라임으로 불린다. 남북으로 갈라져 북이스라엘은 앗수르에 의해 남유다는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함으로 라헬은 자식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라헬은 살아 있을 때나 죽어서도 자식을 위해 애곡할 수밖에 없는 상태임을 말씀한 것이다.
예수님은 애굽으로 피신하였으나 베들레헴과 그 부근의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이 죽임을 당한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하나님께서 예수님도 살리시고 베들레헴의 아이들도 살려주시면 좋았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일하시지 않고 헤롯이 아이들을 다 죽이도록 내버려 두신다. 그 이유는 애굽의 장자들을 치심으로 이스라엘을 빼내신 것처럼 애굽과 같은 베들레헴의 아이들을 치심으로 출애굽의 구원이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될 것임을 보여 주신 것이다.
유대의 분봉 왕 헤롯은 과거 이스라엘을 압제하는 애굽 왕 바로의 역할을 하였다. 바로가 다스리는 나라가 애굽이고 세상이듯이 헤롯이 다스리는 나라가 애굽이요 세상이다. 반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계신 곳이 이스라엘이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참된 이스라엘이시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사건을 통해 새로운 출애굽을 보여 주신다. 즉 새로운 출애굽은 과거 출애굽을 통해 계시하신 바, 그 본질적인 의미는 죄로부터의 구원임을 보여 주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 언약의 말씀이 궁극적으로 성취된다.
결국 자식을 잃고 애곡하는 라헬의 슬픔은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십자가 죽음을 이루어내실 하나님의 슬픔을 반영한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심으로 애굽과 같은 베들레헴의 아이들, 즉 죽음 가운데 있는 자식들이나 그 자식을 위해 애곡하는 어머니들 모두 죄의 권세에 매인 자들이고 그들을 위해 예수께서 구원을 이루실 것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왕으로 오신 예수님은 그 백성들의 죄에서 구원해 내실 것이기 때문에 애굽으로 내려가심으로써 과거에 그의 백성들이 간 그 길을 가시는 것이고, 그 백성이 애굽에서 노예가 되어 겪었던 그 압제에까지 동참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바로의 박해로 인해 어린아이들이 살해되는 상황에서 건짐 받은 자가 모세였고 그 모세를 따라 나온 자가 이스라엘이었다. 그와 같이 헤롯의 박해로 인해 아이들이 살해되는 상황에서 건짐 받은 자가 예수님이시고 그 예수님을 따라 부름을 받은 자가 새로운 이스라엘이다. 이 새로운 이스라엘이 교회이다. 따라서 오늘날 교회는 세상에서 예수님 때문에 어떤 박해와 핍박, 고난을 당하느냐로 증명된다. 라헬의 울음은 곧 교회의 세상에 대한 울음이요 탄식이 되어야 한다(18절). 그것이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헤롯은 죽고 하나님은 다시 애굽에 있는 예수님을 이스라엘로 불러올리시되 갈릴리 지역의 땅으로 부르신다. 현실적으로는 헤롯 아켈라오 때문에 갈릴리 지방으로 가신 것으로 말씀한다. “그러나 아켈라오가 그의 아버지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22-23절). 포악한 헤롯 아켈라오를 피하여 요셉과 마리아가 예수님을 갈릴리 나사렛으로 데려간 일은 그가 “나사렛 사람이라 불릴 것”이라는 선지자들의 예언을 성취한다. 마태는 여기서 어떤 한 선지자의 구체적이고 명확한 예언의 말씀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선지자들’의 예언을 종합한 주제를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즉 구약 성경에서는 ‘나사렛’이라는 마을 자체가 전혀 언급조차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나사렛은 구약 전체를 통해 한 번도 언급되지 못할 정도로 보잘것없는 마을이었다. 그러기에 유대인들이 나사렛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영광스런 지위에 대한 찬사라기보다는 변변치 못한 출신에 대한 조롱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빌립이 나사렛 예수를 소개하자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요 1:46)라고 반문함으로써 예수님을 출신지 때문에 별 볼일 없는 사람처럼 간주하였다. 그런데 마태가 보기에 예수께서 이와 같이 사람들의 이목을 전혀 끌지 못하는 보잘것없는 마을 출신으로 사람들의 멸시와 천대의 대상이 되는 그 자체가 구약의 예언을 성취하는 메시아의 모습인 것으로 보았다.
이렇듯 예수님의 오심에 관한 모든 것이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구약 성경)대로 철저하게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이었고, 말씀의 성취란 기존의 것과 타협하는 측면이 아니라 새로운 것으로서의 도출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은 믿음으로 오셨다(롬 1:17). 믿음은 세상과의 타협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하나님 왕국)로의 몰입이다. 우리의 세계는 늘 율법적인 행위로 영생을 취하려는 행위에 불과하다. 예수 그리스도는 죄의 권세에 매여 율법적 행위를 따르는 자들을 새로운 나라, 왕국으로 부르시는 것이다.
16 생베 조각을 낡은 옷에 붙이는 자가 없나니 이는 기운 것이 그 옷을 당기어 해어짐이 더하게 됨이요 17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마 9:16-17)
마태는 예수님에게 일어난 모든 일을 구약 예언의 성취로 보았다. 앞에서도 동정녀 마리아를 통해서 탄생하신 것(마 1:22-23)과 탄생 장소가 베들레헴인 것(마 2:6)에 대해서 선지자들의 예언을 따라 그렇게 오신 것이라고 소개했다. 또한 예수님이 애굽으로 피신하여 살게 된 것(15절)이나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베들레헴 부근의 아이를 죽인 것(18절), 그리고 나사렛에서 자라게 되신 것(23절)이 모두 하나님께서 이미 주신 언약을 성취하기 위한 일들이고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겨냥하고 있는 것임을 선언하였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단순히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내 안에 이루어져 언약의 말씀이 온전히 성취되는 복음이어야 한다(20231129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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