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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02
마태복음 1:1-17
에게서
본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가 이러하니라’라는 말씀으로 시작한다. 구약적 표현으로 하자면 ‘톨레도트’이다. 즉 ‘아들 낳기의 역사’인데 그 방향성이 하나님의 아들을 향해 있었고 마태는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선언한다. ‘예수 그리스도 – 다윗 – 아브라함’이라는 소개로 시작하여 ‘아브라함 – 다윗 – 예수 그리스도’로 끝나는 구조로 전한다. 창세기의 톨레도트가 예수 그리스도로 완성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계보는 다윗을 중심으로 하는 왕적 계보임을 강조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인 순서로는 아브라함으로 시작하여 다윗으로 연결되는 계보로 소개한다. 다윗 언약을 강조한 계보이면서 또한 아브라함 언약을 놓치지 않는다. 이렇게 함으로 예수님의 계보는 단순히 혈통적 내력을 알려주는 정도가 아니라 언약의 성취를 보여 주려는 의도가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선포하였다.
2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롬 1:2-4)
그런데 문제는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에 얼마나 충실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이스라엘의 역사는 하나님의 언약에 인간 편에서 철저히 실패하였음을 보여 주는 역사이다(사 24:5, 렘 11:10, 겔 17:19, 히 8:9). 죄의 권세 아래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에 순종할 수 없는 존재임을 아셨기에(신 31:20) 하나님은 처음부터 “내 언약”(창 6:18, 9:15, 17:2, 출 19:5 등)이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나님이 기억하신다고 밝히셨다(창 9:15-16, 출 2:24-25, 레 26:42, 겔 16:60 등).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언약의 성취자로 보내시기까지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기억하시고 그 언약대로 행하셨다.
그렇게 언약을 이어가기 위한 하나님의 특별한 조치가 취해지는데 “~는 ~를 낳고”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계보에서 “~에게서”(3, 5, 6, 16절)라는 표현이다. 헬라어 ‘에크’는 ‘~에서, ~에 의하여, ~로부터, ~때문에’라는 발단이나 근원을 나타내는 전치사이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루어감에 있어서 믿음 없는 이스라엘에 하나님께서 특별한 희생을 보여 주셔야 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의 불순종으로 인해 하나님의 언약이 담긴 인물을 보내셔야 했다는 뜻이다. 결국 “에게서”라는 희생은 인간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과 자비에 의해서 성취되는 언약이라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에게서”는 다섯 명의 여인 “다말”(3절), “라합”(5절), “룻”(5절), “우리야의 아내”(밧세바)(6절), “마리아”(16절)이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3절). “유다는 다말에게서”라고 하였다. 창세기 38:1-30에 기록된 사건이다. 2절에서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라고 하였는데 아브라함에게서 이삭, 그리고 야곱에서 이어지는 계보는 장자인 ‘르우벤’이어야 한다. 그러나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라고 한다. 야곱을 이은 인물이 르우벤이 아니며 이스라엘의 기근에서 구원하여 애굽으로 옮겨 장자의 역할을 한 요셉도 아닌 “유다”이다.
이스라엘이 된 야곱의 아들들은 12지파가 된다. 하나님의 선택은 유다를 향해 있었다. 이렇게 하여 이스라엘의 역사는 유다 지파를 통해 다윗과 그 후손으로 이어진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유다와 다말의 사건을 전한다. 유다는 “가나안 사람 수아라 하는 자의 딸”과 결혼하여 “엘, 오난, 셀라”를 낳은 후 엘을 위해 “다말”을 데려왔다(창 38:1-6). 즉 “다말”은 유다의 며느리였다. 그러나 엘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여 죽임을 당했고(창 38:7), 유다는 계대(시형제) 결혼 관습(후에 신명기 25:5-6에서 율법으로 주어진다)에 의해 다말에게 오난을 주었으나 땅에 설정함으로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기에 죽임을 당하였다(창 38:8-10).
유다가 셋째 아들 셀라를 주지 않자 다말은 변장하여 유다와 동침하였다. 유다에 의해 버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다말은 ‘씨’(후손)를 위해 유다의 가문, 즉 언약의 집을 붙잡았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의 언약에 참여되는 은혜 안에 있음을 보여 주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비언약적 사고방식을 가진 유다의 집안에 하나님의 언약 정신을 가진 자를 투입시켜 언약이 이어지도록 하셨다. 이 일로 말미암아 유다는 자식을 지키려는 자신이 의로운 줄 알았으나 언약 정신을 가진 다말이 의롭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유다가 그것들을 알아보고 이르되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 하고 다시는 그를 가까이 하지 아니하였더라(창 38:26)
시아버지와의 불륜을 외형적으로 보자면 다른 남편을 취하였으니 간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유다 가문을 통해 언약의 씨를 주신 것이라면 유다 가문의 복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유다의 혈통으로 오셨다는 것은 언약의 후손을 다말이 이었다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다말은 하나님의 의에 참여된 은혜를 입은 것이다. 그래서 다말을 의롭다고 선언하였다. 히브리어 ‘타마르’는 ‘종려나무’(대추야자)인데 “의인”을 상징한다(시 92:12). 결국 유다는 다말을 통해 보여 주신 하나님의 의에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고 그 다말에 의해 하나님의 언약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5절a). “라합”은 이방 여인이면서 기생이었지만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살려줌으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이스라엘에게 주셨음을 인정하였다. 그것은 곧 하나님의 언약에 불신하는 이스라엘을 고발하는 것이었다. 라합을 통해 믿음을 보임으로써 이스라엘에게 약속의 땅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가를 나타내고자 하신 것이다(수 2:9-11).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선언한다.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꾼을 평안히 영접하였으므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히 11:31)
라합의 믿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었기에 약속을 주신 이스라엘과 그 생명이 결탁되어 있음을 고백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라합이 이스라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언약을 인정한 것은 믿음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라합을 하나님의 언약에 동참되도록 만드셨다는 뜻이다. 그 후 라합은 더 이상 언급되지 않지만 마태는 살몬과의 관계에서 보아스를 낳았다고 밝힌다.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5절b). “룻”은 사사시대 인물이다(룻 1:4). 왕이 없으므로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행하는 시대였다(삿 17:6, 18:1, 19:1, 21:25). 한마디로 여호와 하나님을 왕으로 여기지 않는 때였다. 이스라엘이 장대하고 힘 있는 사울 같은 왕을 원하여 세우고자 할 때 하나님은 자기 언약에 합당한 왕을 세우시기 위하여 룻을 통해 준비하고 계셨다. 룻은 모압 여인이었지만 시어머니 나오미가 고향(약속의 땅)으로 돌아갈 때 자신의 길을 포기하고 시어머니의 하나님을 좇아감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보아스를 통해서 이어지는 희생 안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룻기 마지막 본문에 이렇게 밝힌다.
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룻 4:18-22)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6절).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우리 구약 성경에서는 “우리아”라고 번역하였음)라고 하였다. 우리가 아는 이름은 분명 “밧세바”인데 그 이름을 직접 기록하지 않고 마태는 왜 이렇게 표현하였을까? 우리야는 “헷 사람”이었다(삼하 11:3). 즉 밧세바는 이방인의 아내였지만 다윗과의 관계에서 솔로몬을 낳았다. 육체적으로는 다윗과 밧세바 사이에 태어난 아들이다. 그러나 언약의 관점에서는 밧세바를 다윗의 아내로 보지 아니하고 우리야의 아내로 보고 있다는 것은 솔로몬이 우리야의 아들이라는 뜻이다. 이것이 언약적 의미에서 생각해야 할 부분이다.
우리야는 다윗의 범죄(삼하 12:9-10)로 인해 억울하게 희생된 자였다(삼하 11장). 따라서 솔로몬에게는 우리야의 희생을 반영함과 동시에 다윗의 죄악을 고발하는 기능을 같이 지니고 있다. 다윗의 죄를 회복하는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로서 솔로몬을 ‘하나님께 사랑을 입었다’라는 의미의 이름인 “여디디아”라고 하였다(삼하 12:25). 그래서 다윗은 시온이 유지되는 것은 오직 “주의 은택”이라고 고백하였다(시 51:18). 결국 다윗 언약 계통의 왕들은 자신의 업적을 과시하는 이방 나라의 왕들과는 달리 백성의 죄를 담당하는 대표자로서 희생적 모습을 담아내는 자여야 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는 다윗과 같은 죄인에 의해 희생되어지는 우리야의 모습으로 등장하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예수님은 다윗의 족보를 따라 나신 다윗의 자손이면서 다윗의 왕권적인 모습을 거부하면서 우리야와 같이 세상의 권력에 의해 희생당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왕으로 오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16절)라고 표현하였다. 즉 예수님은 요셉의 족보를 취하고는 있으나 요셉과는 관계없이 하나님 언약의 성취로 이 땅에 오신 것임을 강조한다.
마리아는 비천한 처녀의 몸으로 요셉과 정혼한 상태에서 아이를 잉태하는 희생을 감당해야 했다. 그러한 희생을 통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게 되었다. 이렇게 하나님의 언약은 사람들이 무시하고 연약한 자로 여기는 비천한 여자들을 통해 언약이 대가 끊어질 위기를 넘기면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실로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에 의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본 장에서 중요한 것은 기름 부음 받은 사람들과 언약의 계보에 투입된 여자들을 부르시고 적재적소에서 언약을 이어가도록 일하신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계보에서 강조된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이나 왕의 계승자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최종적으로 기름 부어 세우신 ‘그리스도가 예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것 때문에 본 장의 계보에는 역사적인 인물들이 다 기록되어야 필요가 없었고 여자의 이름이 기록되어도 상관이 없는 족보이다. 오히려 “에게서”라는 표현으로 연약하고 비천한 여자를 통해 언약을 성취하신 하나님의 일하심을 극대화하였다.
결론은 하나님께서 언약을 성취하시기 위하여 이 땅에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그분만 복음이시기 때문이다. 이제 이 이후의 마태복음 강론은 복음이신 ‘예수께서 그리스도’시라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질 것이다. 결국 ‘톨레도트’라는 아들 낳는 역사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자기 백성을 아들로 낳으시는 역사를 완성하셨다.
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6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빠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갈 4:4-6)
너희가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으니(갈 3:26)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엡 1:5)
아들 낳는 역사가 완성되었기에 역사는 이미 종결되었음이 확정되었다. 그래서 성도는 하나님의 아들로 십자가 은혜 안에 감추어져 종말을 사는 자이다(20231115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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