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강론/마태복음

06. 마태복음 3:1-12 세례자 요한의 선포

불편한 진리 2023. 12. 6.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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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06

마태복음 3:1-12

세례자 요한의 선포

 

이방인 동방 박사들의 방문 이후 헤롯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였기에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베들레헴을 떠나 애굽으로 가도록 지시하셨다. 그때 마태는 “애굽으로부터 내 아들을 불렀다”(2:15)라는 말씀이 성취되었다고 선언하였는데 참 이스라엘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 되어 이스라엘을 애굽으로 보신다는 의미라고 생각했었다. 결국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내 아들을 불러내시는 일은 자기 백성을 죄에서 아들로 불러내시는 구원을 이루실 분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보여주신 것이었다.

예수님께서 애굽에서 이스라엘로 다시 오셨으나 갈릴리 나사렛으로 가셨고 구체적인 구약의 본문을 뽑아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나사렛이란 동네에 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2:23)라고 하였다. 그리고 마태는 3장에서 그리스도로서의 사역을 시작하신 시기의 일을 기록한다. 이때가 30세가 되셨을 때 일이다. 복음서 중에서 누가만 “예수께서 가르치심을 시작하실 때에 삼십 세쯤 되시니라”(눅 3:23)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니까 2장과 3장 사이에는 약 28-9년간의 예수님의 생애가 생략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전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앞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왕이시라는 사실을 이방인(동방 박사)들을 통해 증거한 반면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선지자 요한을 통해 증거하신다.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1절). “그때에”라고 하였는데 직역하면 ‘그리고 그날 안에서’라는 말이다. 단순히 2장과 연결하여 표현한 말이 아니다. 이방인들이 예수님을 경배하였고 헤롯과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하였지만 장면을 전환하여 본격적으로 예수님의 그리스도 되심을 요한의 선포로 시작한다는 뜻이다. 우리 성경에는 “세례 요한”이라고 번역하였지만 헬라어 ‘밥티스테스’는 ‘세례를 베푸는 자’라는 말로, 정확하게 표현하면 ‘세례자 요한’이다. “유대 광야”는 예루살렘에서 헤브론의 산악 지역으로부터 동쪽 사해로 내려가는 지역을 말한다. “전파하여”라고 하였는데 단순히 전하고 알린다는 뜻보다 일방적으로 선포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요한이 왜 유대 광야에서 외치는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 하였을 때 약속의 땅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홍해와 요단강을 건너야 했다. 이 홍해와 요단강은 세례를 뜻하는데(고전 10:2), 세례란 이전의 자신이 죽고 새롭게 태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즉 약속의 땅은 새롭게 된 자가 들어갈 수 있다는 뜻이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하나님의 계시가 없는 것으로 요한 당시 약속의 땅에 있는 이스라엘이 이스라엘의 모습을 갖지 못하고 있었기에 그들을 광야로 끌어낸 다음 세례를 주어서 다시 약속의 땅으로 돌려보낸다. 이런 점에서 요한의 세례는 새로운 출애굽을 준비하는 의미가 있다.

이런 점에서 “이 요한은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었더라”(4절)라고 밝히고 있다. “낙타털 옷을 입고 허리에 가죽 띠를 띠고”라는 표현은 엘리야를 생각나게 한다.

 

그들이 그에게 대답하되 그는 털이 많은 사람인데 허리에 가죽 띠를 띠었더이다 하니 왕이 이르되 그는 디셉 사람 엘리야로다(왕하 1:8)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는 의미는 제2의 출애굽으로 모세 언약 안에서 새로운 언약을 이루고자 하시는 데 있다. 그러므로 요한은 이러한 일을 위해 준비하는 역할을 한다. 때문에 그는 광야에서 의도적으로 엘리야의 모습을 하고 행동하였다. 말라기에서 “선지자 엘리야”(말 4:5)를 보낸다고 말씀하셨고 예수님께서도 “오리라 한 엘리야가 곧 이 사람이니라”(11:14)라고 하셨다. 헤롯왕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한 것은 바로왕의 치하에 있는 애굽과 같은 상황이었고, 아합왕과 그를 따르는 바알의 선지자들이 득실대는 엘리야 때의 상황과 다를 바 없는 상태였다.

그래서 요한의 음식은 “메뚜기와 석청”이라고 하였다. “메뚜기”의 헬라어 ‘아크리스’는 요한계시록 9:3, 7에서는 ‘황충’으로 번역하였는데 히브리어로 ‘아르베’이다. “석청”의 ‘멜리 아그리온’은 ‘야생의 꿀, 들 꿀’을 뜻한다. 요한이 청빈한 삶을 살았다는 것이 아니다. ‘메뚜기’(히, ‘아르베’)는 애굽에 내려진 재앙 중의 하나이고(출 10:14), ‘들 꿀’은 출애굽 당시에 언약의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출 3:8, 17, 신 31:20 등)으로 표현하였다.

이런 점에서 요한의 음식은 회개와 구원을 보여주는 말씀 선포가 자신의 양식이었다는 뜻이다. 결국 요단강에서 세례를 베푸는 것으로 홍해의 죽음을 통해 애굽의 재앙을 벗어나 언약의 땅을 얻는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준다. 때문에 요한은 나실인으로 언약의 자손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도록 하는 역할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가랴에게 주신 계시에서 잘 드러난다.

 

13 천사가 그에게 이르되 사가랴여 무서워하지 말라 너의 간구함이 들린지라 네 아내 엘리사벳이 네게 아들을 낳아 주리니 그 이름을 요한이라 하라 14 너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이요 많은 사람도 그의 태어남을 기뻐하리니 15 이는 그가 주 앞에 큰 자가 되며 포도주나 독한 술을 마시지 아니하며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 16 이스라엘 자손을 주 곧 그들의 하나님께로 많이 돌아오게 하겠음이라 17 그가 또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 아버지의 마음을 자식에게, 거스르는 자를 의인의 슬기에 돌아오게 하고 주를 위하여 세운 백성을 준비하리라(눅 1:13-17)

 

요한의 선포는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2절)라는 것이었다. 직역하면 ‘(계속) 회개하고 있으라, 왜냐하면 그 하늘들의 그 왕국이 (계속) 가까이 왔기 때문이다’라는 말이다. ‘그 하늘들의 그 왕국’이란 하늘로부터 말미암은 왕국이라는 의미이다. 일차독자가 유대인이기 때문에 마태는 주로 ‘하늘 왕국’(천국)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지만 그렇다고 다른 표현을 전혀 사용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나님의 왕국”(12:28, 19:24, 21:31, 43), “인자의 왕국”(13:41), “아버지의 왕국”(13:43), “주(당신)의 왕국”(20:21) 등의 표현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였다.

‘하늘 왕국’이란 단순히 하나님의 통치라거나 영토, 주권, 국민이라는 세상적 요소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땅에 인격체로 오셔서 그 안에 자기 백성들을 불러 하나님만 주권을 가지고 다스리시는 형태의 왕국이다. 이런 점에서 예수님께서 “회개하라 천국(하늘 왕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라고 말씀하신 것은 자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이루시는 하늘 왕국을 염두에 두고 말씀하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 왕국이시다(골 1:13).

“그는 선지자 이사야를 통하여 말씀하신 자라 일렀으되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 하였느니라”(3절). 마태는 요한이 선지자가 예언했던 그 사람이라고 지적하면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한다.

 

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2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 그것에게 외치라 그 노역의 때가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느니라 그의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벌을 배나 받았느니라 할지니라 하시니라 3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4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5 여호와의 영광이 나타나고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 이는 여호와의 입이 말씀하셨느니라(사 40:1-5)

 

3절에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라는 표현을 마태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라고 하였다.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란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라는 것이다. 그것은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육체가 그것을 함께 보리라”는 말씀이 성취되는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말미암아 일방적으로 이스라엘만의 구원이 아니라(물론 구약에서 이스라엘만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의미가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 안에는 이미 이방인의 구원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방인에게까지 빛으로 비춰지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히 다 드러날 것이라는 의미이다.

마태는 요한의 사역과 선포를 통해 이사야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것과 말라기 선지서에서 말씀하는 내용을 언급함으로 하나님께서 언약하신 모든 말씀이 곧 성취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다”(10절)는 것과 “타작마당”(12절)이라는 표현은 역사의 종결이 임박했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인간이 가진 기존의 모든 것을 거부하고 심판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는 것을 혹시 모를 임박한 진노를 피하기 위한 또 하나의 정결 의식을 행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 같다. 그래서 요한은 “요한이 많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세례 베푸는 데로 오는 것을 보고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7절)라고 하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8절)라고 선포한다.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은 요한의 관점에서 헛된 자랑을 버리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기들만의 하나님으로 생각하는 것이 무너져야 한다.

이런 점에서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9절a)라고 하면서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9절b)라고 선언한다. 이 말씀의 의미는 돌(히, ‘에벤’)과 같이 무가치한 존재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후손에 대한 언약을 주신 것처럼 자기 언약에 의해 친히 세우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회개의 합당한 열매”란 과거 이스라엘이 출애굽 할 때 홍해를 건너 죽음을 통해 광야 교회가 되었듯이 자신의 죽음, 즉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율법적인 행위를 이루는 자신이 죽어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좋은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리라”(10절)라고 한 말씀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좋은 열매”, 즉 선한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는 것이다. 선한 열매를 맺으시는 예수 그리스도와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면 인간은 선악의 나무를 취하여 하나 된 상태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요한은 죄인의 상태를 찍혀 불에 던져지는 심판 가운데 있는 존재로 말씀한 것이다.

그것을 “나는 너희로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나보다 능력이 많으시니 나는 그의 신을 들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이요”(11절)라고 말씀하였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언약에 의해 오실 자손으로서 메시아, 곧 예수 그리스도의 역할이라는 것이다. “회개하게 하기 위하여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라고 하였는데 직역하면 ‘물 안에서 회개를 향하여 세례를 베푼다’라는 말이다. “회개”란 ‘메타노이아’는 ‘방향을 바꾸다’라는 뜻이다. 즉 죽음을 상징하는 세례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께로 방향이 바꾸어지지 않는다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 방향을 바꾸는 회개조차도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내 뒤에 오시는 이”가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베푸실 것”라고 선언한다. 요한은 내 뒤에 오시는 이, 즉 예수님은 단순히 성령으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지 않고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실 것이라고 하였다. 성령세례가 따로 있고 불세례가 따로 있다는 뜻이 아니라 성령님의 사역이 마치 불과 같이 이중적인 역할을 할 것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1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2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3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4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행 2:1-4)

 

불은 더럽고 불순한 것들을 태워 정결하게 하고 순전하게 하는 것처럼 심판의 기능이 있다. 그와 같이 성령께서 자기 백성들의 죄의 더러움을 불살라 심판함으로 정결하게 하실 것을 의미한다(참고 사 1:25-26, 4:4).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 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쭉정이는 꺼지지 않는 불에 태우시리라”(12절)라는 심판과 구원이 이루어진다(20231206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마06.0301-12 세례자 요한의 선포(20231206).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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