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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강론 03
마태복음 1:18-25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우리는 1장 전반부의 말씀을 통해 마태복음의 서두가 단순히 예수님의 혈통적 계보를 소개하는 기록이 아니라 아브라함 언약 안에서 다윗의 후손 왕으로 오셨는데 그분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내용임을 확인하였다. 더구나 이 계보는 하나님께서 이방인. 비천한 여자를 이스라엘 속에 넣으셔서 언약의 말씀대로 이끌어 오신 역사를 완성시킬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어떻게 오셨는가를 밝혀주는 것이 오늘 본문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18절a)라고 다시 톨레도트에 해당하는 선언을 한다. 16절에서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라고 하였는데 왜 요셉과 마리아 사이에 태어난 것이 아니라 “마리아에게서”라고 표현하였는가에 대한 이유를 말씀한다.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18절b)라고 하여 예수님은 요셉과는 육체적으로 아무런 상관없이 성령님의 일하심에 의한 동정녀 탄생이라고 밝힌다.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정혼)을 하였으나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드러났다. 마태는 이 사실이 중요하기 때문에 의도적으로 약혼하였지만 육체적인 관계를 가지기 전이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당시 유대인의 “약혼”(헬, ‘므네스튜오’)은 결혼에 앞서 1년 정도 유지되던 관계로써 우리나라의 약혼과는 달리 결혼과 같은 강한 법적 효력을 갖는다. 약혼으로 법적 부부가 되어 “남편”(16, 19절)과 “아내”(20절)로 불린다. 하지만 결혼하기까지 함께 살지 않으며 육체적 관계도 금지되어 있다(참고 신 22:20-24). 이런 배경에서 볼 때 마리아와 요셉이 처한 상황은 심각한 것이었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19절)라고 하였다. “의로운 사람”이란 직역하면 ‘올바로 선 사람’, 즉 ‘율법 앞에 바로 선 사람’이라는 의미이다. “끊고자 하여”라는 말의 ‘아폴뤼오’는 다른 본문에서 ‘아내를 버리다, 이혼하다’(마 5:13, 19:3)라고 번역되었다. 요셉은 율법을 따라 사는 자였기에 그의 처리 방법은 은밀하게 이혼하는 것이었으나 하나님의 처리 방법은 그것이 아니었다. 꿈을 통해 계시를 주셔서 하나님께서 주신 일들을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었다.
하나님께서 주신 계시의 내용은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20절)이다.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 말미암은 이적이라는 말씀이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불륜으로 비칠 이 일이 실상은 하나님의 거룩한 영으로 말미암은 이적이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출생의 성격과 의미가 단순하지 않고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사건이요 인간의 차원을 초월한 일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결혼한 정상적인 부부 관계를 통해서 태어나게 하시지 않고 약혼한 상태에서 요셉과의 관계가 있기 전에 처녀의 몸에 잉태되게 하시고 태어나게 하셨을까? 우리는 이런 의문에 대하여 누가복음의 말씀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누가복음 1:34에 보면 천사가 나타나 마리아에게 계시를 전달하자 마리아는 어떻게 처녀인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가를 묻자 천사가 이렇게 전하였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어지리라(눅 1:35)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은 누가의 표현대로 하자면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니리”라는 말씀이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사람의 지혜나 사람의 방법, 사람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덮어주시는 은혜에 의한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 말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예수께서 마리아에게 잉태되고 출생하게 된 것은 평범한 한 사람이 아니라 그의 독특한 신분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거룩하신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이다. 예수께서 비록 사람으로 출생되지만 죄인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성령으로 나신 것은 단순히 남자의 역할 없이 잉태되어야 하는 이적이 필요하였기 때문이라기보다 태어나신 분이 거룩하신 자가 되시기 위한 조건이었다는 뜻이다.
요셉과 마리아가 등장하지만 예수님의 나심과 관련하여 아무런 역할을 하지 않는다. 이 일은 요셉과 마리아가 자의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일어난 일이 예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고 스스로 의도했던 일이 결코 아니었으며 오히려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어 치밀하게 하나님께서 계획하셨고 주도하신 일임을 드러내고 있다. 결국 성령에 의해 이루어진 일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이 단순히 한 인간, 죄인으로서의 출생이 아니라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이 땅에 오신 것을 강조한다. 이렇게 해서 예수님은 사람으로 또한 다윗의 계보를 이은 자손으로 오셨지만 궁극적으로는 거룩하신 하나님의 아들로 언약을 이루실 왕으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계속해서 하나님의 계시는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21절)라고 이어진다. 이름을 “예수”라고 짓도록 명하셨다. 그리고는 그 이름의 의미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고 따로 설명을 덧붙이고 있다. 당시 이스라엘에 예수라는 이름은 흔한 이름으로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의 히브리어 “여호수아”(히, ‘예호슈아’)의 음역이다. 그렇다면 흔히 알고 있는 이름의 뜻을 왜 이렇게 굳이 설명해야 했을까?
민수기 13장에 보면 여호수아라는 인물은 가나안을 정탐하기 위해 모세가 보낸 열두 명의 정탐꾼 중 한 명이었는데 그의 본래 이름은 ‘구원’이라는 뜻의 “호세아”였다(민 13:16). 그런데 모세가 그의 이름을 여호수아로 불렀다. 모세가 왜 호세아의 이름을 여호수아로 바꾸었는지 성경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이름의 뜻은 분명하게 알 수 있다. 즉 호세아라는 이름에 여호와를 의미하는 ‘야’(또는 ‘여’)를 덧붙였다. 그래서 원래 단순히 ‘구원’이라는 의미였던 이름 호세아에서 ‘여호수아’라고 하여 그 구원의 주체가 누구신지가 분명하게 드러나는 이름이 되었다. 즉 ‘여호와는 구원이시다’라는 의미로 누가 구원하시는지를 강조하는 이름이 된 것이다.
이렇게 하여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후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게 되는 일이 여호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 일이라는 것을 드러내고 강조하기 위하여 호세아의 이름을 여호수아로 바꾸어 불렀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호세아의 이름을 여호수아로 바꾸심으로써 자신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구원의 하나님’으로 드러내기를 원하셨던 것이다(‘물에서 건졌다’라는 뜻의 “모세”는 애굽에서 건져내는 것으로 그 이름에 담긴 역할을 다 하였다). 이렇듯 ‘예수’라는 이름이 가지고 있는 구약적 배경이 있는 ‘여호수아’라는 이름은 하나님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신약에 이르러 마태복음 본문에서 여호수아라는 이름의 의미만 그대로 받고 있는 것이 아니다. 천사가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면서 하나님이 구원하신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라는 의미를 덧붙여 주고 있다. 예수라는 이름은 단순히 하나님이 구원자시라는 말에 누구를 구원하며, 어디에서부터 구원인지를 분명하게 밝히고 있다는 점이다. 그 대상자는 “자기 백성”이며, 구원을 받게 되는 상황은 “그들의 죄에서 구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처음부터 그 목적이 너무도 분명하고 확실하게 설정되어 있었다! 예수님의 오심은 가난한 자들을 그 속에서 건지시는 것이 아니다. 세상적인 골치 아픈 문제들에서 해방되게 하시는 것도 아니다. 질병의 고통 속에서 놓임을 받고 평안을 가지게 하시는 것도 아니다. 힘든 세상에서 행복을 가지게 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건지시기 위함이다. 그분은 우리의 필요를 채우기 위한 목적으로, 즉 우리(나)를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 편에서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오신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22절)라고 말씀한다. 흔히 나를 위해,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라는 구호로 자기 자신을 위한 예수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께서 그리스도로 오심은 말씀의 성취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구약에서 언약하시고 그 언약의 말씀을 완성하시기 위해서 오셨다는 것이다. 이런 차원에서 마태복음은 복음서 중에서 구약의 말씀을 직접적으로 인용한 것이 가장 많은 책이다.
예수님의 오심에 대하여 마태는 가장 먼저 이사야 선지서의 예언을 인용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3절)라는 말씀이다. 직역하면 ‘보라! 처녀가 잉태할 것이다. 그리고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부를 것이다’라는 말이다. 마태가 인용하고 있는 구절은 구약 이사야 7:14의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를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사 7:14)
이사야 선지자가 기록한 이 내용은 아람 왕과 이스라엘 왕이 유다 왕 아하스를 대적하여 연합 공격을 펴던 상황에서 하나님께서 아하스 왕에게 주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아하스 왕에게 징조를 구하라고 말씀하셨으나 아하스 왕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기 위해 징조를 구하지 않겠다고 하였다. 그러자 이사야 선지자는 오히려 그것이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이라고 전하였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친히 징조를 주실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징조”의 히브리어 ‘오트’는 ‘표, 표시, 표적’이라는 뜻인데 한마디로 ‘언약의 표’라는 의미이다. “처녀”로 번역된 ‘알마’는 ‘처녀, 젊은 여자’라는 뜻이다. 아하스 왕에게 주어진 언약의 표는 한 ‘젊은 여자’가 아이를 낳을 것인데 그 아이가 장성하기 전에 연합 공격을 펴던 두 왕이 패망하게 될 것이라는 말씀이다(사 7:16).
여기서 “임마누엘”이라는 표현이 이사야 8:8과 10절에서도 언급되는데 임마누엘이라고 불리는 이 아이 구출자에 대한 말씀이 이사야 9:6-7과 11:1-2에서 계속 진행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사야 6장부터 12장에 걸쳐 구원을 이룰 중대한 임무를 띤 메시아적 인물로 드러난다. 따라서 이사야 7:14은 당시의 역사적 상황 속에서 메시아의 오심에 대한 의미를 담고 있는 예언으로써 마태는 이 말씀이 예수님에게 성취되었다고 선언한 것이다.
마태는 이 말씀이 예수님의 이름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실 역할에 의해 성취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마태복음을 마무리하면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라고 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단순히 예수님의 오심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의미를 세상에서 평안과 축복을 누리는 것으로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대부분 임마누엘 하나님을 들먹이면서 내 중심에서 나(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뜻으로 이해한다.
그러나 임마누엘의 역할을 하신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분리시켜 자기 편으로 끌어당겨 놓고 함께 하신다는 의미이다. 그분의 오심은 자기 백성들을 죄의 권세에서 분리하여 자신의 권세 아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자기 백성”, 즉 예수 그리스도와 한몸된 교회요 성도는 예수님이 누구이신지를 분명히 알게 될 것이라는 말이다.
요셉과 마리아에게 임한 성령의 덮으신 은혜는 율법으로 바르게 살아가려는 자들에게 임한 하나님의 은혜이다.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비천하고 연약한 이방인 여자들을 넣어서라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나님의 언약이다. 아브라함과 다윗 언약 안에서 자기 백성을 영원히 다스릴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왕으로 오셨다. 먼저 자기 백성들을 죄로부터 구원하시는 역할을 하시는 것에서 출발한다. 죄로부터 구원하여 그들을 자기 백성 삼으시고 영원히 의와 진리로 다스리시는 왕, 그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 사람이 되어 이 땅에 임마누엘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20231122 강론/주성교회 김영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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